[영원한 지금 23]_지금 여기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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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il Seonwon

Samil Seonwon

Күн бұрын

Пікірлер: 15
@user-rq9lb4sp2
@user-rq9lb4sp2 Жыл бұрын
감사드립니다🙏🙏🙏
@명인행
@명인행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
@일체지
@일체지 Жыл бұрын
선생님 귀한법문 감사합니다 👍🙏
@반야행-n3z
@반야행-n3z Жыл бұрын
🙏🙏🙏
@보월-c9k
@보월-c9k Жыл бұрын
선생님 감사합니다🙏🙏🙏
@조성현-b7i
@조성현-b7i Жыл бұрын
영원한 지금 감사합니다 _()_
@bork-hepark
@bork-hepark Жыл бұрын
그냥 잘 들어오는 법문 감사합니다 한번 뵐수가 있나요??? 언제가…….
@소소락락
@소소락락 Жыл бұрын
늘~감사합니다 11월 법회 공지를 알고 싶습니다~💖
@오기남古月
@오기남古月 Жыл бұрын
[영원한 지금 23]_‘지금 여기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大道無門)’ 2023년 11월 12일 선재 박준수 선생님 법문 중에서(5) 우리 공부는 아는 것으로부터 놓여나는 거예요. 모든 답으로부터 놓여나는 거야. 우리가 알고 있는 답 때문에 힘들었잖아요. 답대로 살아야 되니까. 답을 넘어갔어. 그 몰라. 답을 이제 쓸 수가 있는 위치에 서지. 답을 이제 쓸 수가 있지. 예전에는 답한테 부림을 당하고 살았는데, 답에서 놓여나서 이제 답을 쓰면서 살아. 그게 우리 세간을 그렇게 살자는 거예요. 답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답으로부터 놓여나서 답을 쓰면서 살자. 그게 해탈이라요. 우리는 세간을 벗어나서 출세간으로 갈 수가 없어. 세간을 살아낼 수밖에 없어. 그런데 단지 안목 하나 바뀌는 거라요. 안목이 이 세상은 다 이미지인데 이미지 넘어서 생명 자리가 있구나. 그게 부처님이 얘기하는 여래자리로구나. 소소영영한 자리로구나. 그렇잖아. 그럼 공부를 마치는 것이지. 그것 밖에 없어. 생각에 속지 않으면 공부를 마치는 거예요. 속지 않으려면은 생각 너머의 그 생명, 생각하는 자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지. 생각만 있는 것이 아니라. “11..시..로..구..나..”하는 그 자리가 있어서 11시가 있잖아요. 그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우니까 아는 것이 이제 힘을 못써. 아는 것이 이제 종노릇을 하게 돼. 여태까지는 아는 것이 주인 노릇을 했잖아요. 내 주인이었어. 우리는 아는 대로 살아야 되고 그렇게 갑갑하게 살아야 되었어. 그런데 이제 아는 것이 자리매김을 딱 했어. 아는 것이 이제 종이야 종. 그런데도 理卽頓悟(이즉돈오)나 事非頓除(사비돈제)라고 그래. 이치는 다 깨달으셨잖아요. 그렇죠? 아는 것으로부터 놓여났구나. “한.. 물..건..도.. 없..구..나..” 이것은 생명인데,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은 개념이야. 이치는 이제 깨달았죠. 頓悟(돈오)잖아. 事非頓除(사비돈제) 실제 생활에서는 그게 頓除(돈제)가 잘 안돼. 왜 그래요? 우리가 너무 아는 것에 중독되어 있던 시절이 커서 얼른 그게 頓除(돈제)가 안돼. 문득 다 벗어나지지를 않아. 그래서 이제 선가에서 向上一路(향상일로)를 얘기하는 거라요. 向上一路(향상일로). 그 낯선 것이, 이 분별은 낯익은 데, 이 생명 자리는 낯설어. 그러니 낯선 것이 낯익어 가고 낯익은 것이 낯설어 가는 것이 우리의 悟後工夫(오후공부)다. 그렇게 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보면 말이죠. 예전에는 欲界(욕계)의 六天(육천)이 있다고 그랬어. 예전 부파불교의 시대에. 그래서 도합 38천이 있대요. 이게 1차원 2차원 3차원 4차원 5차원... 이런 얘기일 거야. 차원이 다르면은 서로 세계가 다르죠. 欲界(욕계) 六天(육천)이 있대. 사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뭐 그런 세상이 있다는 거예요. 그거 다 이미지 아니에요? 그런 세상이 따로 있지 않지. 지옥과 천국이 따로 있지 않듯이 욕계 육천도 이미지에요. 우리 분별이 만들어낸 세상이라요. 그게 1차원 2차원 3차원... 이걸 거야. 차원이 서로 다르면은 우리가 만날 수도 없지. 그런데 모든 차원이 마음 앞에서는 실체가 없는 그냥 그림자잖아요. 그 이름이 분별이 만들어 놓은 것들이라요. 차원도 이름일 뿐이라요. 그러니까 이 공부는 아는 데서 출발해서 몰라. 그런데 모르는 데서 머물면 개념이지. “모..르..겠..어..” 이게 생명이야. “모..르..겠..어..” 이게 생명이니까 “알..겠..구..나..”도 생명이라요. 그러니 알고 모르는 것을 이제 넘어가 있어. 공부가 그러게 간단한 거라요. 어려울 수가 없지. 진리가 어찌 어려울 수가 있겠어요? 그냥 시간과 공간에 너무 묻혀서 살다가 보니까 시간과 공간에 꼼짝 못 하고 살았는데, 과거의 마음 가져올 수 있어요? 미래의 마음 가져올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아낼 수가 없어. 왜 그래요? 과거는 이미지니까. 미래도 이미지이잖아요. 현재다 하는 순간 그것 현재도 이미지이잖아요. 과거 현재 미래가 이미지야. 그 과거의 공간이 그 이미지 아니에요? 미래와 함께 온 공간도 이미지이고. 이미지야. 시간과 공간이 몰록 이미지일 뿐이면은 한 물건도 없잖아요. 그런데 한 물건도 없구나 하고 있으면 안 되지. “한 물건도 없구나.”는 개념이지. “한.. 물..건..도.. 없..구..나..”가 살아있는 자리 아니에요? 거기에 눈을 뜨면은 모든 이름을 이제 쓰고 부리면서 사는 것이지. 그러니까 알되 모르는 눈으로 아는 것이지. 모를 수 있는 눈으로 아는 세상을 사는 것이지. 그 얼마나 자유로워. 모를 수 있는 것이 딱 진리이고 알 수 있는 것은 이름인데, 이름의 부림을 받을 수 있을까? 그게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지. 해탈. 자유로울 때만 우리는 행복할 수 있거든요. 자유로울 때에만 행복할 수 있는 거거든. 지금 여기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어떻게 지금 여기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지금 여기뿐인데. (법문 동영상 33분 33초) 고칙 64 유마가 수보리에게 말하였다. “그대에게 보시하는 것은 福田(복전)이라 하지 않으며, 그대에게 공양하는 사람은 三惡道(삼악도)에 떨어지고, 부처를 헐뜯고 법을 비방하였으니, 여러 수행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 끝내 涅槃(열반)에 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가 만약 이와 같다면 음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고칙 65 문수가 하루는 善財(선재)를 약 캐러 가도록 시키며 말했다. “약이 아닌 것을 캐어 오너라.” 선재가 말하였다. “산속에는 약 아닌 것이 없습니다.” “약이 되는 것을 캐어 오너라.” 선재가 땅에서 풀한 줄기를 주워서는 문수에게 주었다. 문수는 받아들고 대중에게 말하였다. “이 약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또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고칙 66 문수가 말하였다. “만약 중생의 煩惱(번뇌)를 바르게 깨달아 알면, 그것이 곧 모든 부처의 境界(경계)입니다.
@오기남古月
@오기남古月 Жыл бұрын
[영원한 지금 23]_‘지금 여기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大道無門)’ 2023년 11월 12일 선재 박준수 선생님 법문 중에서 (1) 아무리 깜깜해도 깜깜한 줄 아는 자리가 있잖아요. 그 아는 자리는 깜깜한 것이 감출 수가 없어. 그게 이제 덕산스님이 용담선사를 만났을 때 밤새도록 얘기하고 방으로 자러 갈 때 촛불을 확 꺼버리니까 그때 덕산이 그 밝음을 보았다는 것 아니에요? 어둠 속에서도 감추어지지 않는 자리. 그 자리가 표현은 많이 하죠. 惺惺寂寂(성성적적)한 자리다. 성성하다는 것은 깨어있다는 얘기야. 그런데 적적하다는 거야. 적적하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자리죠. 성성적적하다. 선가귀감에서는 그것을 昭昭靈靈(소소영영)한 자리다 그래. 밝고 밝은 자리다. 표현은 어떻든 간에 그것은 표현일 뿐이고, 사실은 그 자리는 알 수가 없죠.그렇지만 그놈이 있어 가지고서 늘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밝음과 어둠은 오고 가죠. 그거는 오고 가잖아. 항상하지 않잖아요. 그렇지만 그것은 무상해. 그러나 언제나 그 성성적적한 자리가 있어. 밝음이 오면 밝음을 비춰내고 어둠이 오면 어둠을 비춰내는 그 자리. 그 뭐라고 말할 수는 없어. 알 수가 없으니까. 원효가 깨달은 것도 거기서 깨달았지. 모르고 물을 마실 때는 아주 목말랐으니까 좋았거든. 그런데 자고 일어나서 보니까 해골바가지의 물이었어. 그러니까 그 생각나자마자 구역질이 났던 거예요. 그 원효가 깨달았던 것이 뭘까? 아 이 마음하고는 아무 관계 없이 분별이 문제로구나. 아 이 깨끗한 물이라고 생각할 때는 아무 일이 없었는데, 더러운 물이였다 하는 순간 구역질이 났어. 그러니까 그 마음은 늘 한결같은데 여여한데 분별이 그렇게 더럽다 깨끗하다 하는데 속아가지고 그렇다는 거야. 그래서 원효는 유학길을 그만 접었잖아. 더 알 필요가 뭐가 있을까? 그렇죠. 그것 깨닫자는 공부 아니에요? 이 세상 일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어떤 세상이 오더라도 알아차리는 자리, 그게 있어서 우리 일상이 이루어지는 거라요. 사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전부 생각이 만들어 낸 이미지일 뿐이거든. 그 이미지가 무슨 일을 하겠어요. 나도 이미지이고 너도 이미지이고 한 물건도 없는데 무슨 일을 하겠어? 그렇게만 볼 수 있다면은 문득 그것을 알아차리는 자리에 깨달을 수가 있지. 卽見如來(즉견여래) 해. 卽見如來(즉견여래). 언제나 그 자리는 여여해. 분별 너머에 있어서 알 수가 없어. 우리가 상상을 해봅시다. 우리가 영화관에 갔어. 깜깜한데 화면만 왔다갔다 하잖아요. 화면은 잡을 수가 없잖아. 잡을래야 잡을 수도 없어. 오고 가. 그렇지만 그 응시하고 있는 자리는 항상 화면 하고 아무 관계가 없었잖아. 그 자리가 바로 성성적적한 자리야. 별안간에 밝았던 자리가 어두워지면서 그 어둠을 응시하는 자리에 눈을 뜨는 거야. 그러니까 밝음과 어둠은 왔다 갔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고 응시하는 자리는 늘 성성적적하죠. 또 소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소리도 온갖 소리가 지나가. 온갖 소리가 지나가. 그런데 소리가 뚝 그쳤어. 고요해. 시끄럽다 고요하다는 것이 어떤 거예요? 내 분별이 만들어 낸 것 아니에요? 시끄럽다 조용하다 하는 것이 분별의 산물이지 시끄러운 것이 어디 따로 존재하겠어요? 그 소리를 응시한다면은 응시하는 자리가 있어. 그것 깨닫자는 거예요. 소리는 아무리 왔다 갔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고 깨닫는 자리는 늘 여여해. 그것을 성성적적하다 그래. 소소영영하다 그래. 그것을 이름 지어서 알 필요는 없지. 그것도 이름이니까. 그러니까 마찬가지에요. 향기나 맛이나 느낌이나 다 동일하지.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생각할 때만 문제가 되지. 생각할 때만 생각에 머물지 말라는 거야. 다른 때는 언제나 생각하지 않으면 主客合一(주객합일)이죠. 그런데 생각하지 않을 때는 몰라. 알 수가 없죠. 우리가 아는 것은 생각만 아니까. 이름만 알고 이미지만 알 수가 있지 그것 너머에는 알 수가 없으니까 단지 생각에 머물지만 않으면 거기가 바로 깨달음 자리이고 여래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문제라. 이 구조는 말이죠. “뜰.. 앞..의.. 잣..나..무..다..”하는 깨달음의 자리가 있고, “뜰 앞의 잣나무다.”하는 분별의 자리가 있어. 그것이 항상 뜰 앞의 잣나무는 세간과 출세간이 같이 있는 거예요. 조주가 얘기한 “뜰.. 앞..의.. 잣..나..무..다..”는 깨달음이고, “뜰 앞의 잣나무다.”는 분별이고, 그렇습니다.
@오기남古月
@오기남古月 Жыл бұрын
[영원한 지금 23]_‘지금 여기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大道無門)’ 2023년 11월 12일 선재 박준수 선생님 법문 중에서(3) 그러니까 그렇게 보니까 한 물건도 없어. 한 물건도 없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전부다 이미지야. 이름일 뿐이야. 세상 만물은 한 물건도 없어. “한.. 물..건..도.. 없..다..” 이것뿐이지. “한 물건도 없다,”는 어떻게 존재할 수가 있어요? 달마가 혜가가 “제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니까 “그 아픈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러잖아요. 그런데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랬잖아요.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까, “내가 너를 자유롭게 했느니라.” 했잖아. 그 아픈 마음 가져올 수 있어요? 멀리 보면은 옛날에 선생님한테 매 맞던 그 아픔 가져올 수 있어요? 기억 속에만 있는 것이지. 어제의 아픔도 가져올 수가 없어. 시간과 함께 흘러가 버렸지. 내일의 아픔도 가져올 수가 있을까? 가져올 수가 없지. 시간과 공간의 것들이니까 그 아픔을 가져올 수가 없어. 그 아픔을 찾아봐도 없어. 어제의 아픔은 과거와 함께 흘러갔고 내일의 아픔은 아직 오지 않았고 오늘의 아픔은 찾을 수가 없어. 왜 찾을 수가 없어요? “아픔이 어디 있을까?” 했을 때 아픔은 사라졌어. 왜 사라졌을까? 아픔은 생각의 산물이니까. 애기들 보면 그래. 애기들이 넘어졌을 때 피가 나. 애기들은 울지도 않고 넘어졌다가 부스스 일어나다가 피를 보면 울기 시작하거든. 그 생각이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생각이 아픔을 만들어 내고 그러는 거예요. 칼에 베었을 때도 보니까, 칼에 베었을 때는 몰라. 피를 보니까 큰일났구나 하지. 그러니까 과거의 아픔도 미래의 아픔도 실체가 없어. 그러니까 현재의 아픔도 잡아낼 수가 없지. 그 생각의 산물이에요. 아프다가도 “지금 몇시나?” “11시로구나.” 할 때는 아픔이 사라졌어. 그때는 “11시로구나” 하는 시간만 있지. 마찬가지로 과거의 몸 가져올 수 있어요? 20살 때 몸 가져올 수 있어요? 미래의 몸도 가져올 수가 없잖아. 현재의 몸도 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떻게 몸을 가져올 수가 있어? 이미 시간과 더불어 흘러가 버렸는데. 미래의 몸은 아직 시간과 더불어 오지 않았는데. 잡아낼 수가 없어. 그러니까 몸과 마음이 나로 알고 있었는데 몸도 잡아낼 수가 없고 마음도 잡아낼 수가 없어. 물록 몸과 마음으로부터 놓여난 거라. 그게 지금 여기야. 지금 여기는 몸도 이름일 뿐이고 마음도 이름일 뿐이야. 그냥 지금 여기, 지..금..여..기.. 몸도 넘어가고 분별도 넘어간 자리. 그것뿐이라. 그거.
@오기남古月
@오기남古月 Жыл бұрын
[영원한 지금 23]_‘지금 여기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大道無門)’ 2023년 11월 12일 선재 박준수 선생님 법문 중에서(2) 그러니까 제가 이 얘기를 하는 것은 “~구나”는 깨달음이고 “~이다”는 분별의 세상이다. 저는 그렇게 설명을 가끔 합니다. “~구나”는 깨달음이지. “지금 10시 40분이구나!”는 하나의 覺(각)이죠. 깨달음이지. “11시 40분이다,”는 12시하고는 다르지. “11시구나”나 “12시구나”나 달라요? 이름을 안 따라가니까 그것은 그냥 항상 여여해. 그러니까 뭐 선악이나 아름답고 추한 것이나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나 전부 다 우리가 어떤 기준을 세워서 나눠보는 우리 분별의 문제이지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것들이라요. 그러니까 금강경에서도 應無所住而生其心(응무소주이생기심) 생각에 머물지 말라고만 하셨잖아요. 생각에 머물지 말라. 그게 실체가 없는 것이다. 생각에 머물지 않으면 그게 해탈이지. 우리는 생각에 잡혀서 사니까. 그러면 아 이제 모름에 눈을 떴어. 아 우리가 아는 것은 생각일 뿐이로구나. 참말로 생각하는 놈은 모르는구나. 생각하는 놈은 몰라. 생각을 알 수가 있는데. 그러니까 알고 모름이 둘이 아니잖아요. 생각하는 놈 하고 생각하고 나눌 수가 없어. 그러니까 모르는 마음으로 아는 세상을 사는 거예요. 그렇게 간단해. 모르는 마음으로 아는 세상을 사는 거야. 그러면 이제 어때요? 아 이 모르는 자리가 있구나. 아는 자리가 전부 다가 아니로구나. 그 모르는 자리가 있어서 일상이 이루어지는구나. 이렇게만 보면은 어때요? 아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놓여나지. 아는 것뿐이라고 우리는 여태까지 보고 살았으니까 아는 것에 부림을 받고 살았는데, 아 이거 알고 보니까 아는 것은 그냥 이미지야 이름일 뿐이야. 그 모르는 자리에 눈을 떴어. 그러면 아는 이름에 휘둘릴까? 이름으로부터 이제 자유롭죠. 그런데 우리 세간은 알면서 살잖아요. 알고 모르는 세상 아니에요? 알고 모르는 데서 놓여나 있어. 그러면 알고 모르는 것에서 벗어나 있으니까, 알고 모르는 자리가 굴레거든, 그것을 진실하다고 아니까 굴레죠. 벗어나 있으니까 자유로운 거지. 그게 해탈이지. 그러니까 우리 모를 수 있는 마음으로 아는 세상을 살아가야지 자유로워요. 모를 수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은 아는데 묶여 가지고 항상 갈등을 하죠. 우리 공부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 공부의 뜻은 깨달음에 있을까요? 진리에 있을까? 그렇게도 말할 수는 있지만 저는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 공부의 뜻은 세간에 있다. 진리를 터득하고 깨달아서 이 세간살이가 마찬가지면은 그 진리를 알아서 뭐해요? 진리도 하나의 아는 세상이지. 진리라는 것도. 진리는 알 수가 없는 자리기 때문에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만 진리를 알려고 해. 알아야지 시원해. 알아야지 이 공부가 끝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끝날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것은 확인될 수가 없는 거야. 확인될 수가 없는 것을 확인하려고 하니까 공부가 끝이 안나지. 아 우리가 아는 세상은 전부 이미지이구나 이름일 뿐이구나 이렇게 볼 수만 있다면 바로 모름에 눈을 뜨는 거예요. 왜 그래? 아는 세상만으로는 세상이 굴러가지 않으니까. 이미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아 아는 것의 너머에 어떤 생명자리가 있구나 소소영영한 자리가 있구나 이렇게 하니까 그것을 발견하니까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우리 공부의 뜻은 세간을 잘 사는 데 있습니다. 세간을 잘 살 수가 없다면 그 진리를 알아서 뭐하겠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진리를 알고자 하고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것은 세간에 뜻이 있는 것입니다. 세간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 그러니까 苦集滅道(고집멸도)를 왜 설해? 苦(고)를 문제 삼는 것 아니에요? 세간은 苦海(고해)이니까. 이 고해를 열반으로 바꾸는 길은 진리를 터득해야만 고해가 열반으로 바뀌니까 이 공부의 뜻은 세간에 있는 것이지. 진리를 알아서 고해가 바뀌지 않으면 그 진리를 어디다 쓰겠어요? 그렇게 보니까 천국과 지옥이 전부 분별의 산물이야. 거기에는 한 물건도 없어. 그냥 분별이 만들어 놓은 내가 해석한 것이라요. 원효가 깨끗한 물이다 더러운 물이다 하는 것이 그렇게 분별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이 시끄러워졌다가 좋았다가 그런 거야.
@오기남古月
@오기남古月 Жыл бұрын
[영원한 지금 23]_‘지금 여기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大道無門)’ 2023년 11월 12일 선재 박준수 선생님 법문 중에서. (4) 우리가 이거 체험한다 경험한다 하잖아요. 그것을 한 번 더 얘기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분명히 내가 있어서 대상을 경험하는 거죠. 그렇죠. 경험하는 것은 그런 거야. 내가 무슨 일을 경험하는 것 아니에요? 主(주)와 客(객)으로 나눠서 보는 것이지. 체험은 어떨까? 경험한다는 것과 체험하는 것이 다를까? 거기에도 체험하는 자가 있잖아요. 우리가 얼른 보면 체험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체험을 알아차리는 자리가 있잖아요. 우리가 뜨거운 물을 뜨거운지 찬지 모르니까 무심결에 손을 넣으면 “앗! 뜨거워!” 하잖아요. 그거 체험이지. 그래서 “앗! 뜨거워!”에서 깨달을 수가 있지. “앗.. 뜨..거..워..” 거기는 아무 생각도 없이 “앗.. 뜨..거..워..”이지. 그것뿐이지. 뭐 그것을 체험이라면 우리 체험이지. 거기에 체험하는 자가 빠져있는 것이 우리가 얘기하는 깨달음이지. 체험하는 자가 있으면 벌써 주와 객으로 나눠진 거예요. 경험자가 있으면 경험하는 놈하고 경험의 대상이 따로 있는 거예요. 우리가 그러니까 나도 경험하는 자도 사라지고 경험하는 대상도 사라진 자리가 어딜까? 잠잘 때에요. 잠잘 때. 잠잘 때는 체험자가 없잖아요. 잠자는 것 체험하는 사람 있어요? 체험자도 없고 체험하는 대상도 없는 것이 잠잘 때야. 그러니까 제일 우리가 쉬는 자리지. 우리가 아무런 노력도 필요가 없는 자리지. 그러니까 과거의 마음도 가져올 수 없고 미래의 몸도 가져올 수 없고, 과거의 몸도 미래의 몸도 가져올 수 없어. 그러니 현재의 몸도 잡아낼 수가 없어. 그렇게 보면은 몰록 시간과 공간에서부터 벗어나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이 실체가 없다고 보면은 거기서 “아이고 한 물건도 없구나.” 그럴 수가 있잖아요. “이 세상은 한 물건도 없구나. 다 이미지로구나.” 그러면 “한..물..건..도..없..구..나..” 이것은 도대체 뭐야? “한..물..건..도..없..구..나..” 이것은 뭐야? 그것을 발견하게 되잖아요. “한..물..건..도..없..구..나..”를 발견하는 거야. 그것을 깨닫는 거예요. 달마어록에 나오잖아요. “이뭣고” “이뭣고”하고 질문을 갖고 살아. 그런데 “이..뭣..고..” “이..뭣..고..”가 끝 아닐까? 거기서 “이뭣고” “이뭣고”하고 알면은 그것은 아니지. 뭐다 하면은 그것도 하나의 이미지이지. 답이지. “이뭣고” “이뭣고” 아는 데서 출발을 했어요. 그런데 몰라. 아는 데서 출발해서 모르겠어. 그러니까 모르겠어. 모르니까 “뭘까” “뭘까”하잖아요. “뭘..까..” “뭘..까..”는 살아있는 자리 아니에요? 아는 것도 죽은 자리고 모르는 것도 죽은 자리인데,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뭘..까..” “뭘..까..” 하는 것이 살아있는 자리 아닐까? 그것은 이미지가 아니지. “뭘..까..” “뭘..까..” 하는 자리가. 스님들이 “무” “무” 하시잖아요. 그게 평생 ‘無(무)’자 화두를 가지고 살아. 그 “있다”에서 출발해서 “있다”는 이제 넘어갔어. 이제 “없다”야. “없다”를 쥐고 “없다” “없다” 하다 보면. 그만 “없..다..”가 우리가 찾는 자리죠. 없는 놈이 “없..다..”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것은 살아있는 자리잖아요. 개념 너머잖아요. “없다” “있다”에서 넘어가서 “없다”에 머물러. 그 머물면 안되지. 그러니 “없다가 뭘까?” 하고 “없다” “없다” 해보니까 “없..다..”잖아요. 그 달마어록에 마지막에 나오잖아. “이뭣고” “이뭣고” 하면서 거기서 답을 기다리면 어긋난다 하잖아요. “이..뭣..고..”가 마지막이야. “이..뭣..고..”가 살아있는 자리에요. “있다”도 개념이고 “없다”도 개념인데, “없다”에서 “없..다..”는 살아있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살아있으니까 “있..다..”도 살아나잖아요. “있..다..”도 살아나고 “없..다..”도 살아나. 개념이 아니잖아요. 생명이잖아요. 그렇게 쉬운 거야. 그렇게 있고 없고를 넘어 섰어 이제. 거기서 “있..다..”가 생명이고 “없..다..”가 살아있는 자리를 깨달았어. 그거 진짜거든요. 그게 진짜잖아. 그러니 이제 가짜인 아는 것으로부터 놓여나죠. 진짜를 알았는데 왜 분별에 속아서 살겠어? 실재하는 것은 “있..구..나..” 이게 실재죠. “없..구..나..” 이게 살아있는 자리죠. 그런데 우리는 개념에 묶여 가지고 개념한테 꼼짝 못하고 살았는데, 아 이놈들은 가만히 보니까 실체가 없는 거야. “있..구..나..” 이게 살아있는 자리이고, “없..구..나..” 이게 살아있는 자리야. 그러니까 있다 없다에서 놓여나죠. 그게 해탈이지. 그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지.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죠.
@오기남古月
@오기남古月 Жыл бұрын
『영원한 지금』 p172-174 51. 명명백백(明明白白) 이렇게 분명한데, 다시 찾을 일이 어디 있는가? 부처는 반야심경에서 “모양(色)이 마음(空)이고 마음이 모양이다.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의식(識)도 이와 같아서 마음(空)과 둘이 아니다(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라고 밝혔다. 이를 두고서, 어디서 마음(空)을 따로 찾을 것인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수상행식(受想行識)이 바로 마음(空)이다. 그래서 “마음뿐이다.”라고 하지 않는가? 파도에서 물을 본 사람에게는 파도마다 물이듯이, 노랑, 파랑, 빨강에서 빛을 본 사람에게는 색깔마다 빛이듯이, 색에서 공을 본 사람에게는 색마다 공이요, 마음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마음(空)을 따로 찾는가? 마음뿐인데 헤맬 일이 어디 있는가? 명명백백하게 이미 드러났는데, 아직도 찾으려 하고 알려고 한다면, 찾는 일이 헤매는 일이요, 알려는 일이 헤매는 일이 아닌가? 마음뿐인데 거기에 과거 현재 미래가 어디 있고, 동서남북 상하좌우가 어디 있는가? 마음뿐인데 거기에 내가 어디 있고, 네가 어디 있는가? 그래도 우리는 견문각지 어묵동정 행주좌와의 일상을 살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너 없는 나의 지금 여기 일이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찾던 불이(不二)의 본래면목 아니던가? 지금 여기 일일 뿐이다.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의 십팔계(十八界)가 모두 지금 여기 일이다. 파도에서 물을 보면 모든 파도가 물이듯이, 색깔에서 빛을 보면 모든 색깔이 빛이듯이, 색에서 공을 본 사람에게는 일체가 공이요, 마음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여기 일이다. 그 외에 어디에서 나를 찾을 것인가? 견문각지 어묵동정 행주좌와가 어디 일인가? 모두 너 없는 나의 지금 여기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여기 일이라 하여도, 시공간 중에서 지금 여기를 찾지 말 것이다. 지금 여기는 무상(無相), 무주(無住), 무념(無念)의 자리다. 나는 누구인가? 뜻을 따르지 말고, 소리를 따르지 않은 채 반야심경을 읽어 보자. 반야심경 한 자 한 자가 우리가 찾는 지금 여기 일인 나 아닌가? 금강경 한 자 한 자가 그렇고, 법화경 한 자 한 자가 그렇고, 화엄경 한 자 한 자가 그렇다.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이 모두 지금 여기 일이요, 동서남북, 상하좌우, 내외원근의 일이 모두 지금 여기 일이요, 삼라만상이 모두 지금 여기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가 지금 여기 일이요, “내.. 나..이.. 70..입..니..다..”가 지금 여기 일이요, “서..울.. 가..는.. 길..이.. 어..디..입..니..까..”가 지금 여기 일이다.
@성법행
@성법행 Жыл бұры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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