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기적적인 능력을 다른 사람을 위하거나 살리거나 병고침을 위해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감각에 따라 각자 자신의 것을 지키는것도 필요하지만 세상의 과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서로 영적으로 사랑하며 살때 이 지상에 하나님 나라가 진정으로 임할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 (요 13:34-35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레넥스4 ай бұрын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궁금함인데 다마스커스님은 따로 기도시간을 가지시나요?
@bible_mac4 ай бұрын
예수님의 12제자들도 3년간 예수님과 숙식을 함께하며 기적을 직관(?) 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도망가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부활은 다른 여느 기적들과는 달리 바울 역시도 하나님께서 '믿을 만한 증거'(행17:31)로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던 만큼 부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해주는' 기적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surgen124 ай бұрын
하실 수 있으니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충분조건은 아닐수 있지만 필요조건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hans_TV08304 ай бұрын
너무나도 영상을 잘 보며 배우고 추천해주신 책도 읽고 있습니다. 한가지 질문에 변증 해주실수 있을까요?? 무신론자들에게 (사실 무신론자는 없다라고 생각하는 편) 그럼에도 그들에게 영혼이 있다 없다를 물었을때 그들은 없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여기에 대해 어떠한 반박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Joshua091034 ай бұрын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대한성서공회, 1998, p 마 8:26-27.
@4561-v4x4 ай бұрын
정확히는 기억 안나는데 가룟유다가 향유를 부어줄 때 그 향유를 아껴야한다고 했던 에피소드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주변 기독교인들은 가룟유다가 돈을 위해 그런것이라고 유다에 초점을 맞추는데 저는 마음이 어땠는지를 떠나서 그 말 자체는 옳으니 예수님이 선하다면 똑같이 꾸짖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DamascusLiveTV4 ай бұрын
아녀, 예수님의 에피소드들을 보면 마음에 초점을 맞춰서 칭찬하거나 혼내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dost90234 ай бұрын
신의 아들이라는 말은 사실 히브리 세계에서 영웅적 인물에게 종종 쓰이던 말입니다. 동양에서 재능이 뛰어난 사람에게 천재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칭함과 유사합니다. 이를 그리스어 세계에서 (신약은 그리스어로 쓰였다) 오도했습니다. 한편으로 예수와 동시대 혹은예수와 같이 고대에 신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강조하거나 그 근거로 기적, 이능을 보인 장치 종교 지도자는 적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대 종교 일반적 특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맞서 싸우던 민족의 왕자가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고 "무서운 신의 분노"를 이끌어내 이스라엘 군대에 큰 타격을 주었다는 구약 구절도 이와 상통합니다
@김우영-d4d4 ай бұрын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치료하시기를 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돌을 금으로 만드는 거같은 하나님의 선과 긍휼하심과 상관없는 이적이 아니라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군중이 주려 힘들까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고 맹인의 눈을 뜨게하셨고 귀신들린 자를 온전케 하셨습니다.
@정민욱-y1r4 ай бұрын
영상과 아주 유관한 질문은 아니지만, 문득 이런 궁금증이 들어요. 예수님은 왜 부활하신 뒤 ‘승천’하셨을까? 왜 후대 인류에게는 직접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셔서 공연히 의심을 받는 걸까? 예전에 다메섹님이 토론하실 때, 하나님이 전인류에게 공개적으로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이유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신 걸로 기억합니다. 합당하다고 느껴졌구요.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좀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분은 어쨌든 이 땅 위를 밟고 서보셨던 ‘인간’이었고, 그런 인간의 모습으로 지금까지 쭉 인류와 함께 지내셨다면 구원을 완성해가는데 더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냥 하나님 주권이니까, 우리가 고민해봐야 알 수 없는 어떤 신묘한 이유라도 있어서 그렇게 하신 건지. 아니면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을지. 다메섹님 생각이 듣고싶어졌어요.
@nadohanmadi274 ай бұрын
저도 궁금해요
@DamascusLiveTV4 ай бұрын
이제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그 날이 인류의 마지막일테니까요. 루이스의 표현에 따르면, 극작가가 무대에 오르면 무대는 끝난 것이지요. 왜 쭉 같이 있지 않았느냐라는 말에는 제가 명확히 답할 순 없겠지만, 일단 2천년 간 살아계셨다면 그것 자체가 기적일테고, 영상의 제 논지로 넘어갑니다. 😊
@archetypa40754 ай бұрын
성경이 말씀하는 바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1. 성경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승천하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영광을 얻으신 것으로 증거합니다. 그래서 조직신학에서는 이것을 " 그리스도의 승귀 " 로 일컫습니다. 반면에 십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계셨던 건 " 그리스도의 비하 " 라고 일컫죠. 성경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 만유의 왕 " 으로 위임되신 것으로 증거합니다. 그래서 승천하신 후로는 보혜사 성령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다스리시고 구원을 이루십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역사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시는 겁니다. 2 . 누가복음 16 장 31 절에도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통해 교훈하시길 " 모세와 선지자들의 가르침 ( 구약성경 ) 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자가 살아 돌아와서 권하더라도 듣지 않을 것이다 " 고 하셨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성경의 가르침을 기초로 교회를 세우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silmoon466Ай бұрын
복음서 내의 기적들은 전부 "신성(神性) 증명"의 뉘앙스가 전혀 없어요. 당장에 광야에서의 첫번째 유혹 "당신이 신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를 예수님이 "사람이 빵만 먹으면 다니?" 라고 정면으로 반박하는 장면만 봐도 증명 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걸 볼 수가 있죠
@jaeyongsoosan4 ай бұрын
요한계시록에 적그리스도가 이적을 일으킬거라고 합니다. 재밌을듯
@짱코씨4 ай бұрын
안녕하십니까 다마쿠스tv 즐겨보는 불교도 이고 컨텐츠에 대한 추천입니다 요즘 검은신화 오공이라는 겜이 반응이 핫합니다 요약하면 오공의 행동은 이미 깨우쳐서 투전불승(부처) 에 올랐지만 자유(욕망,색)에 미쳐서 화과산으로 돌아갑니다 이건 석가모니께서 보리쌍수 아래에서 있다가 천마한테 항복한다는 개연성 같습니다. 다마쿠스님도 게임중에 기독교적 세계관과 구원론 그리고 좋은점 아쉬운점등 리뷰하시면 재미있을것 같습니다
@DamascusLiveTV4 ай бұрын
해보고 싶지만 플스도 게임용 pc도 없습니다 ㅠ.ㅠ
@최언약-t3r4 ай бұрын
예수는 철학자나 사상가가 아니고 교주도 아닙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이십니다.. 언변으로 보여주시지않고 능력으로 보여주십니다... 자신을 과시한적은 없지만 다름을 보여주십니다... 그저 뛰어난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란것은 차별화되어야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기적입니다~
@JL_life4 ай бұрын
세례/침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답은 좀 더 분명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스스로가 하나님이심을 아주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가 아닌 내가 하나님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질문에 대한 답 [눅7:19-22]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는 이사야서 말씀으로 대답하신 것입니다 [사35:4-6]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위의 5-6절의 이적들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대답하신 이적들입니다 5절은 “그때에” 로 시작합니다. 이런 이적들이 일어나는 때가 언제인지 4절에 나옵니다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하나님이 오사” “하나님이 오사” 하나님이 오신 그때에 이런 이적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스스로가 하나님이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를 말씀하신 수준이 아닙니다 이사야서 말씀을 따라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 로써의 삶을 살던 세례/침례 요한에겐 이 예수님의 대답이 “내가 곧 너가 기다리는 하나님이다” 라는 대답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말씀을 믿지 않으며 따르지 않던 자들에겐 그저 많은 기적을 행하고 권능이 많은 “선지자 정도“ 로 이해됐을 것입니다 말씀은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하기에 댓글 달아봅니다
@크로닉-z6d4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DamascusLiveTV4 ай бұрын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한 적은 없습니다. 말씀하신대로 하나님 나라가 임함은 곧 하나님이 오심과 거의 동일한 표현입니다. 다만 예수께서 기적의 '신비함'을 근거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저 말을 전달한 이유는 예언의 성취를 말하고자 함이지, 이런 기적을 베푸는 내 능력이 뛰어나니 곧 나는 곧 신이다 가 아니니까요.
@nadohanmadi274 ай бұрын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굳이 하나님으로 신격화 하기위해 부활강조, 삼위일체를 부각시려는 가르침에 따르고 싶지않습니다 각자의 믿고싶은대로 믿는것이 신앙이니까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30여년 인간으로 나서 사시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가르침을 바르게 가르치시고 행하셨음으로 충분히 하나님의 아들로 동역자로 인간이상의 신성한 이미지로 창조자 하나님과 같은 위치로는 아니지만 갈릴리 멋지청년 예수 그 자체를 좋아하고 숭배 합니다
@평생배움4 ай бұрын
너희는 기적을 보고도 너희들이 꿈꾸는 하나님 나라와 너희들이 원하는 왕을 삼아 세우기 위한 너희 속에서 나오는 본래 악하고 더러운 욕망에서 비롯된 목적 달성의 수단이나 표징으로만 이해하고 활용하려고 할 뿐이란 것과 그처럼 구원은 너희의 능력 밖에서 일어나는 차원의 일이란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기적을 나타내신 것이죠. 실제로 우리는 기적을 보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며 여전히 기적을 우리의 목적 달성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나 표징으로 이해하고 활용하려고만 하잖아요? 그러니까 너희에게 보여 준 숱한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기적 너머에 있는 진실이 뭔지 알려 주려고 오신 주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된다는 약속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믿어야 된단 말이죠. 헛다리 짚는 신앙 생활은 이제 그만하시고, 성경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하시고 가감없이 전하다 가신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 영상을 찾아들으시기를 추천합니다.
@Servi_Ban4 ай бұрын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누구로부터 이루어지는가, 하나님이 바라시고 구약에 예언된 그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드러내시는 것이 이적이기도 하다 생각됩니다. 바울의 기적은 바울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 것이라 기적만을 놓고 같은 평가를 하는 것은 좀 아쉬운 견해인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