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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의도
지배자와 피 지배자, 백성과 통치자가 공존했던 곳, 읍성.
읍성은 민중의 삶과 애환이 깊이 서려있는 곳이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시설이자 아픈 역사가 담긴 곳.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훼손되고 허물어져버린 우리의 역사.
이제, 사라진 읍성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
선돌 하나하나가 역사의 조각이 되어 그동안 잊혀졌던 역사를 바로 세운다.
■ 본편 내용
읍성은 과거 고을을 지키기 위해 쌓았던 성곽을 말한다. 크고 중요한 고을에는 그만큼 관아들이 많았기 때문에 높고 넓은 읍성을 쌓는 등 고을의 위치와 크기에 따라 성의 높이와 넓이가 달랐다. 그리고 읍성을 중심으로 지방만의 고유한 문화, 예술, 행정이 펼쳐졌다.
읍성 축조는 조선시대 전기만 하더라도 토축과 석축이 병행하여 이루어졌다. 토축의 경우에는 안쪽은 흙, 바깥쪽은 돌로 쌓기도 했지만 안팎을 모두 돌로 쌓은 석성도 많았다. 그러다가 세종 20년에 축성에 대한 새로운 도본, 축성신도를 반포하여 성곽을 모두 석재로 쌓도록 했다. 흙으로 이뤄진 내벽의 경사면 역시 석재를 이용해서 계단을 만들도록 하였다. 또, 세종은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벽을 높이면서 옹성이나 치성, 해자 등의 중요 방어시설을 설치하도록 했다.
토성은 물론이고 석성도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부실하게 공사하는 경우에는 쌓자마자 무너지기도 했다. 세종 때에 여러 곳에 읍성을 쌓으면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자 축성 결과에 따른 상벌을 제도화시켰다. 성벽에는 공사구간을 나누어 책임자의 관직과 동원된 장정들의 고을 이름을 새겨 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했던 것이다.
읍성은 곧 관아가 있는 곳을 의미했다. 그래서 읍성을 점령한다는 것은 곧 관아를 점령하고 통치에 반발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읍성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항쟁, 전투가 일어나기도 했다.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기도 했고, 동학농민운동의 주요 전투를 치러내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조선왕조의 수도였던 한양 도성을 비롯해서 행정구역 중 절반 정도에 읍성을 쌓았다. 이렇게 많았던 읍성은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 철거됐다. 읍성을 없애는 것은 곧 통치의 거점을 없애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일본은 1910년 강제 합병을 하면서 성벽처리위원회를 조직하고 계획적으로 읍성을 철거했다.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읍성 복원, 보존, 정비 사업을 통해 단순히 유적지 복원이 아닌 그 안에 숨겨진 역사를 읽어내야 할 때다.
[YTN 사이언스 기사원문] www.ytnscience.co.kr/progra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