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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의도
1894년 동학농민혁명, 1871년 신미양요, 1866년 병인양요, 1636년 병자호란.
그리고 1592년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조선왕조 200년 간의 평화가 깨졌다.
임진왜란으로 기억하는 420여 년 전의 참혹한 전쟁.
그것은 근세 최대의 국제전이었고 잔인한 상을 남긴 아픈 역사였다.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변화시킨 전대미문의 7년 전쟁.
땅속에 뿌리박혀 왜구를 막아냈던 읍성에서 그 흔적을 찾아본다.
■ 본편 내용
지난 2005년. 부산의 지하철역 개통을 앞두고 사전지표조사를 할 당시 수상한 유구가 발견됐던 것. 어린아이의 것부터 부녀자의 것까지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간직한 인골을 비롯해서 전쟁에 사용된 유물이 정신없이 쏟아져 동래성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무기체계와 전투방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 당시의 발굴은 왜군과의 전투방법까지 유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592년 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출병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린다. 일본이 30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야만 했던 이유. 그 중 하나는 바로 중국이라는 큰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총사령으로 한 선봉군 2만여명은 700척의 전함을 이끌고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치욕의 임진왜란 중심에 있었던 읍성.
왜군은 동로, 중로, 서로의 세가지 방향으로 나눠 북진했다. 28일 1군은 충주를 점령했고, 다음날 2군과 합류했다. 한양을 돌파한 고니시 부대는 순식간에 평양까지 함락시켰고 함경도역시 가토 부대에 의해 장악됐다. 전쟁에 국왕이 피난을 거듭하자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각지에서는 스스로 고장을 지키고 왜군을 몰아내기 위한 의병이 일어나기도 했다.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이를 계기로 왜군은 총퇴각하였고 노량해전을 끝으로 전후 7년간에 걸쳤던 왜란은 조선·명·일본 3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막을 내렸다. 전쟁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조선은 정치, 경제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임진왜란은 수많은 읍성을 불태웠고 동시에 자신들의 기지로서의 왜성을 남겼다. 임란 이후의 읍성에도 문제점이 제기되어 그 구조가 방어에 용이하도록 변하였다.
읍성들은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지만, 1910년 일제 강점기에 읍성철거령이 내려져 대부분의 읍성들이 헐렸다. 읍성의 복원에 앞서 전쟁에 맞서 마을을 지키려던 민중들의 아픔도 함께 복원돼야할 것이다.
[YTN 사이언스 기사원문] www.ytnscience.co.kr/progra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