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장군! 당장 국군과 함께 38선을 돌파하시오. 그런데 미군은 왜 38선을 늦게 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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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thing Box TV, [God of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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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ай бұрын

1950년 9월 29일.
선두에는 이승만 대통령, 그리고 그 다음으로 맥아더 장군이 서울로 입성했습니다.
불과 1달전 만해도 멸망을 걱정했던 대한민국.
그러나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고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했던 한반도의 운명.
감격적인 서울환도식이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붙잡고
지금 당장 38선을 돌파해줄 것을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답변을 망설이는 맥아더.
인천상륙작전조차 미국 정부의 반대를 뚫고 억지로 강행했던 맥아더.
그런데 또다시 UN의 지침을 어기고 38선을 마음대로 돌파하라고?
그는 미군의 사령관이기도 했지만 UN군 총사령관이었기에 고민은 깊어만 가는데...
마침내 1950년 10월 1일,
국군에 38선 돌파 명령을 내리는 이승만.
그런데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군은 조용했다.
그들은 10월 9일까지 UN의 승인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던 것.
여기서 날려버린 금쪽같은 8일.
그 8일과 함께 한반도 통일의 꿈도 사라지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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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38선#북진

Пікірлер: 150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컨텐츠 후반에 서울환도식 그날의 에피소드 결론이 나옵니다. 끝까지 시청 부탁드립니다. 1950년 9월 29일, 서울 탈환을 축하하는 환도식 행사.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의 다소 잔인한 부탁. 이날의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일화입니다. 맥아더는 이승만의 부탁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한반도의 운명이 바뀔 수 있었던 그날의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user-sy9kf9kc7l
@user-sy9kf9kc7l 5 ай бұрын
한마디로 X같지만 그래도 해줍니다!!
@user-fe7st6gv3z
@user-fe7st6gv3z 5 ай бұрын
최근 자료는 27일 미국 내부에서 북진 허락이 나고 그 후 맥아더에게 전달 되었다고 합니다. UN이야 도식적 절차고 미국이 마음먹기 나름이지만 한반도에서 당한 미군은 베트남에선 17도선에서 머뭇거려 베트남전 전쟁자체를 승리하기 불가능 해졌죠...중국 참전이 두려우니... 병사들 대마나 빨고 있는데 전쟁 되나요?
@user-fe7st6gv3z
@user-fe7st6gv3z 5 ай бұрын
@@user-ob1dg6vn5c 동의합니다...그러나 한반도에선 이길 전쟁을 날린거고 베트남은 시작부터 정당성이나 모든 상황이 늪인거였죠.... 17도선 못올라갈걸 왜해? 두 전쟁의 공통점은 한국,월남 정부가 과도하게 썩어있었다는 거죠... 미국이 밀어주는 분쟁지역 정부의 공통점이죠.
@user-fe7st6gv3z
@user-fe7st6gv3z 5 ай бұрын
@@user-ob1dg6vn5c 단순 지도자의 덕목도 민족주의자와 기회주의자 대결구도였죠! 국민들이 어느 정권에 마음을 주느냐? 민심의 선택은 어떠 했느냐입니다. 땅굴을 파던 그들의 선택이 승리를 이룬거죠. 압도적 힘의 우위 떠드는데는 한계가 존재하는거죠? 부패하고 짬짜미 해처먹고 지들끼리 자리주고 해먹은놈 돌려막고 폭발음인지 탄착군 형성 되었는 지도 모르는 정부에 민심이 어떤지? 힘은 쎈데 머리는 돌대가리 인증인지?
@user-km5xv9bk4f
@user-km5xv9bk4f 5 ай бұрын
난이분 컬리티가 좋은데 왜 안뜨는지 모르겠소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기 쉽게 정확한 사료에 기반하여 이토록 다양하게 다루는 채널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독자 여러분의 성원이 더욱 필요합니다.
@user-rg3wh9fq3e
@user-rg3wh9fq3e 4 ай бұрын
솔직히 역사 X피셜이나 우원재라는 유튜버보다 더 객관적임
@takeable
@takeable 4 ай бұрын
역사에 관심 많은 20대 중반 군필 대학생입니다 아마 채널명 때문이 아닐까...생각을 해봅니다
@takeable
@takeable 4 ай бұрын
저도 역사적 사실을 다뤄낸 것과 지식 면에서는 이 채널이 수준 높다 생각하는데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덜 유명한 이유는... 널리 알려진 지식해적단 같은 채널과 비교하면 그쪽 채널 편집이 훨씬 트렌디하고, 또 채널명도 직관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5 ай бұрын
그런데 이승만의 그 말이 저 당시에는 진리였습니다. 북한은 인천 상륙작전 때문에 얼떨떨한 상황이었으니.............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미국 입장에서는 한반도의 반 정도만 지켜내면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태평양으로 확장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추가적인 손실이 얼마나 될지 가늠할 수 없는 북진통일보다는 전쟁 전 복귀만 해도 충분하다고 판단했죠 ㅠ 어차피 북진통일은 대한민국만의 희망이었을 뿐 미국 등 타국들에겐 남의 나라 전쟁인 만큼 우리의 염원까지 다 고려할 여유도 없었으니까요 ㅜ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당시 미국과 유엔의 목표는 전쟁 이전으로의 회귀, 즉 38선 원상복귀였지 절대 북진통일이 아니었습니다 ㅜㅜ 그래서 아무리 뛰어난들 결국 군인인 맥아더도 위에서 목표를 바꾸고 38선 돌파하라는 공식 명을 내려야 시행할 수 있던 거라 이승만의 북진 요구를 쉽게 수락하는 것이 불가능했죠
@ErichLudendorff739
@ErichLudendorff739 5 ай бұрын
미국 내 어떤 정보 기관도 제대로 된 정보를 맥아더에게 주지 못했다는 것이 놀랍네요 맥아더가 실수를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런 사정이 있었군요 조금 더 UN의 결정이 빨랐다면 역사가 바뀌었겠네요 ㄷㄷㄷ 너무 재미있어요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이승만 대통령이 바란 것은 유엔 결정이 떨어지건 말건 돌파였습니다. 실제로 국군은 10월 1일, 즉 UN 승인 없이 38선을 돌파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맥아더의 심정도 이해가 됩니다. 맥아더 자체가 미군 사령관이기도 하지만 UN군 사령관이었기에 그는 그때만은 맘대로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sungminhwang1700
@sungminhwang1700 5 ай бұрын
분명 단순 계산과 함께 상황 모두를 알 수 없는 IF 가정이라면 맞지만 그래도 무리라고 봅니다. 결국 유엔군의 보급상황과 진격로 문제, 정치적 문제가 고려되어야하였고 이전의 진격도 생각외로 빠르고 신속했으니깐요. 방어 이점은 있지만 여러 연구로보면 개마고원등 아직 중공군 도하지역도 많고 한국군 역량에 대한 컨테츠로보면 더한 참사가 생길수있지 않나 싶네요. 뭐가되든 북진이 아쉬운건 사실이고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기에 각국의 정치상황과 판단 모두 납득도 됩니다. 여리모로 전쟁이 아주 어려운것임을 다시한번 보게되네요.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다만 유엔의 원 목표인 38선까지만 정확히 딱 진격하고 멈추는 것이 군사적, 지형적으로 가능했을 것 같진 않습니다. 고랑포~양양 시변리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고랑포 이서 (임진강 이북 및 이서)의 개풍, 개성, 연안반도, 옹진반도 지역은 강과 바다로 격리되어 본토와 떨어진 월경지인데다 방어할 만한 산맥이나 하천,고지가 제대로 있지 않고 (예성강은 38선과 정확히 직각으로 흘러 방어선으로 불가능합니다) 38선 이북에 멸악산맥, 임진북예성남정맥, 장산곶이 다 있어 북한이 다 감제하고 내려다보는 구조인데 군사적으로 딱 저 지역만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봅니다. 그렇다고 북한이 자기들이 먹은 땅을 다른 땅을 받지도 않고서 바보같이 유엔의 목표대로 내줄 리도 없고요. 그리고 중부,동부전선에서도 38선에서 멈추고 끝내면 전쟁 후 임진강 중류와 한탄강, 영평천 유역이 다 북한이 먹게 되고 연천, 영평, 화천, 철의 삼각지대를 전부 북한이 쥐고 활용할 수 있게 되어 서울이 지금에 비해 훨씬 위험해졌을 것이며 안보,군사적 이유상 90년대 이전까진 서울을 수도로 유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nano04386
@nano04386 5 ай бұрын
트루먼과 맥아더가 소련 스탈린을 쳐다본 거 아닐까요? 소련의 엄청난 기갑전력과 만나는 날엔 감당이 안 될거임. 그 때는 소련도 핵보유국이고. 한마디로 스탈린의 메시지 : 동부전선에 비하면 손바닥 만한 곳인데 이제 장난은 여기까지^^
@user-rc7zp3gj6u
@user-rc7zp3gj6u 5 ай бұрын
아이고.. 우리 대한민국이 더 큰 땅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user-ks9gl2gx4n
@user-ks9gl2gx4n 5 ай бұрын
그래도 중공군의 개입을 막기 힘들었습니다. 개마고원이라는 험난지형을 순식간에 돌파한 정예병력이었고 전쟁경험도 풍부하여 매복작전에 미군이 당할. 수 없으니까요. 당시 중공군은 잘 훈련된최고의 전사들이었습니다.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중공군 병사들은 국공내전에서 경험을 쌓은 전사들이었던 데다가 지형지물을 잘 활용했습니다. 이른바 산악전입니다. 북한의 개마고원지대는 1500미터 이상의 산들이 겹겹히 늘어선 지형입니다. 이런 지형에서는 중공군 방식으로 싸워야만 했습니다.
@user-ks9gl2gx4n
@user-ks9gl2gx4n 5 ай бұрын
@@user-vg4ki4cx2g 그렇죠 당시 국군은 인원부족으로 훈련소에서 총쏘는 연습만 조금 하고 투입된 신병이 많았으니까요. 그러니 중공군 얘기만 들어도 겁먹고 탈영한 국군도 많았지요.
@kdwni03
@kdwni03 4 ай бұрын
아니죠 그랬으면 진짜로승리했죠
@mk2043
@mk2043 5 ай бұрын
마음 아프지만 분단된 것이 남한에게는 축복일수있습니다 완전통일되었으면 미군을 한반도에 붙들어놓을 명분이 약하기에, 추후 중공을 통한 한반도 적화 침략에 속수무책일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통한 하나님의 도우심 한미상호방위협정!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상호방위협정의 비화에 대한 컨텐츠도 있습니다. kzbin.info/www/bejne/fmqxeaqnq6-sjpo (한미상호방위조약 비하인드 스토리.) 아마 미국과 가장 밀당을 잘했던 약소국 지도자가 이승만일 것입니다. 대놓고 미 대통령의 초청을 거절하고 미국 특사를 홈 그라운드로 불러 자신이 원하는 조건대로 조약을 체결했으니까요
@user-ix8dp9xs9i
@user-ix8dp9xs9i 4 ай бұрын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밑에 분들 말대로 38선 이남 전부 미수복 경기+강원도 지역만 먹었다면 딱 좋았을 것 같아요. 일단 38선 이남 영토는 당연히 수복한 명분이 있고 방어적인 이점을 위해서 현재 휴전선과 그어진 미수복 경기도나 강원도 주변의 고지와 산만 먹었다면 전쟁 일찍 끝내고 북한을 지리적으로 압박할 수준이고 중국도 북한이 진짜 밀린 것도 아니고 38선 근처에서 영토 줄었으니 딱히 개입할 명분거리도 없는 것 같고..
@war-history
@war-history 4 ай бұрын
결과론적으로 보면 님이 말이 맞습니다. 앞일을 알았다면 영토를 조금만 더 먹는 수순에서 깔끔하게 방어태세로 전환하여 안정화를 하는게 훨씬 나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맥아더가 그렇게 했다면 아마 한국민에게 온갖 욕을 다 먹고 이승만에게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미국정부도 한국의 완전한 통일을 명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냥 조금만 올라가다 말거라고 했다면 맥아더는 아마 그 이유로 잘렸을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한국민과 미국정부는 맥아더에게 감탄했고 이제 완전한 승리가 올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user-rt1xt6qm8u
@user-rt1xt6qm8u 5 ай бұрын
만물상자님 맥아더 38선 무리한 돌파가 아니였을까요?!
@user-sy9kf9kc7l
@user-sy9kf9kc7l 5 ай бұрын
그 무리한 돌파를 요청한게 이승만이었습니다!!
@namugomu7981
@namugomu7981 5 ай бұрын
​@@user-sy9kf9kc7l왜 무리지...북돼지 일가가 뒤질까봐?
@namugomu7981
@namugomu7981 5 ай бұрын
에초에 북돼지가 남한 동포를 대상으로 이념및 무력전쟁을 일으킨게 무리한게 아닐까가 우선 되야 하지 않을까?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물론 애초에 미국의 원 목표였던 38선까지의 회복만 이루고 전쟁을 끝냈다면 그 뒤로 이어지는 수많은 전투와 고지전으로 인한 인명,물자의 피해는 없었겠지만 지금에 비해 여러모로 많이 불리했을 겁니다. 지금 휴전선이 38선과 차이가 없어 보여도 우리 면적이 약 3,300km^2 더 늘어나고 군사적으로 여러 요충지들을 수복해서 서울 방어가 훨씬 수월해졌고 최단거리 자체는 북한과 가깝지만 그래도 서울을 수도로 유지할 수 있었던 걸 생각하면 충분히 전쟁을 통해 얻은 성과가 보람있고 큽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user-vg4ki4cx2g개성과 황해도 지형에 대해 하나도 모르시나 본데 개성 지역은 38선으로 잘리면 방어가 불가능합니다. 우리 쪽엔 감제고지 하나 없고 시내 자체가 38선 바로 앞이라 민통선 안에 갇히며 북쪽의 임진북예성남정맥이 다 북한 영토라 개성을 일방적으로 북한이 산 위에서 내려다보고 도발할 수 있는 구조라 위험합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user-vg4ki4cx2g실제 한국전쟁 전에도 개성은 툭하면 북한의 도발에 두들겨맞아 인구가 계속 줄어들었고 미군 장군들도 전쟁 발발하면 개성 바로 버리고 한강하구와 임진강하류로 후퇴해 방어선 세운다는 게 기본 방침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시 하루만에 개성 다 먹히고 바로 한강하구로 철수했죠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연평도와 백령도는 개성과 떨어진 황해도 남부 지역과 인접해 있어서 개성 먹는 거랑 상관 없답니다. 해주 지역을 포함한 황해도 남부를 먹어야 서해5도가 안전해지죠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user-vg4ki4cx2g개성 지형도 보시면 개성 북쪽에 남북으로 약 30km에 달하는 임진북예성남정맥이 자리하고 있어서 이 산들 대부분 먹고 최소 황해도 금천까지는 올라가야 남측에서 개성을 안전히 지키는 게 가능한 구조입니다. 개성 지형이 북한은 지키기 쉽지만 남쪽에서는 방어하기 매우 어렵고 더 위의 산들을 먹어야만 했죠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user-vg4ki4cx2g 개성 시내만 딸랑 먹으면 항상 북한 도발에 시달려야 하는데다 방어 부담이 더 커집니다 ㅜ 물론 종심 자체는 더 늘어나니 전쟁 발발시 서부전선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는 효과 정도는 있으니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에 비해 들어가는 비용과 병력부담이 넘 커집니다. 고대부터 전쟁사들 보시면 개성 위의 산들을 다 먹고 예성강과 금천,토산까지 전선이 올라가든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한강하구와 임진강하류에서 형성되었습니다. 38선처럼 시내만 남쪽, 산들은 북쪽으로 나뉜 경우는 38선 분단시절이 한국역사상 유일했죠
@sbj8728
@sbj8728 3 ай бұрын
이런 채널을 지금 발견했다니...정말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보물같은 채널이군요
@war-history
@war-history 3 ай бұрын
감사드립니다. 모두 언론에도 보도가 되었었고 사료에 나오는 내용 그대롭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이미 40년 이상을 알던 친구라는 사실은 저도 놀랬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이 맥아더 전용기를 타고 한국에 돌아온 사실.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이 새벽에 맥아더에게 전화해서 당장 한국을 구하라고 소리친 사실. 이 모든 것은 두 사람이 브로맨스를 과시했던 사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kzbin.info/www/bejne/a5zWeYGse7WDjNU (맥아더가 대한민국에 우호적이었던 이유)
@user-uk7du8vu9p
@user-uk7du8vu9p 4 ай бұрын
우선 재미있는 영상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몇마디 덧붙이자면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가로서 한국의 통일을 위해 당연한 요구를 한 것이나 군인 신분인 맥아더 원수는 명령없이 월권을 할 수는 없다는 한계였습니다,다만 군인도 상황에 따라 융통성이 필요하고 융통성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습니다, 만약 패튼장군이었다면 UN이고 뭐고 무시하고 맹렬하게 진격했을 텐데~
@war-history
@war-history 4 ай бұрын
듣고보니 패튼이었다면 UN군 사령관이라는 직함도 걷어버리고 충분히 돌진했을 가능성도 있었겠네요. 그런데 맥아더조차 UN군 사령관이라는 감투에서 자유롭질 못했는데 미국정부의 명령이면 추후 승인을 받는 방법이라도 있지만 UN은 한국전에 참전한 모든 나라의 외교관계까지 걸린 일이라 쉽진 않았을 것입니다.
@user-jm7oe8lw1h
@user-jm7oe8lw1h 5 ай бұрын
그래도 중공군 개입 했고 한국 군이 힘이 없는게 문제지
@user-xu1lh6vf7d
@user-xu1lh6vf7d 5 ай бұрын
😊좋네 요 영상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응원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kdwni03
@kdwni03 5 ай бұрын
저때 un군하고 같히 38선을넘었다면 아마전설로남았을듯해요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맥아더가 망설이자 이승만은 10월 1일에 UN승인이 아직 없는 상황에서 국군에게 북진을 명령합니다. 그러니까 이승만은 9월 29일 행사 끝나고 2일 후에 실제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런데 미군은 8일 후인 10월 9일에 38선을 돌파하기 시작합니다. 국군은 차량이 없어 도보로 이동하는 부대이고 미군은 모두 차량화된 부대였기에 미군이 빨리 38선을 돌파했다면 중공군이 압록강을 도하하기 전에 이미 미군이 압록강에 닿았을 것입니다.
@kdwni03
@kdwni03 5 ай бұрын
@@war-history 아~~~전설로남을수있었는데 그럼 인천상륙작전 전에 38선돌파까지 승인했어야했는데......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인천상륙작전 전에 38선 돌파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천상륙작전이 100%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일) 이전에 미국은 한국을 포기할 계획을 세웠을 정도로 어찌될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kdwni03
@kdwni03 5 ай бұрын
@@war-history 가능하지않을까요?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user-ob1dg6vn5c 맞습니다. 보병전술. 북한의 산악지형에서 미군은 중공군의 경보병 전술과 산악전 전술에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술에 대항하려면 중공군의 정확한 규모와 의도를 알아야만 가능했습니다.
@My_Style17
@My_Style17 5 ай бұрын
안타깝습니다. 북진통일을 이루워냈어야 했건만...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이 컨텐츠를 끝까지 보신다면 이런 잔인한 요구를 했던 이승만도 이해가 가고 그 요구를 거절했던 맥아더도 이해가 되기에 무척 답답함을 느끼실 것입니다.
@jina6120
@jina6120 4 ай бұрын
@@war-history한반도의 운명이었던 것이었나 봅니다
@user-hl5sx1ht7m
@user-hl5sx1ht7m 5 ай бұрын
2:26중간분 키가 어마어마하네
@user-xu1lh6vf7d
@user-xu1lh6vf7d 5 ай бұрын
😊
@user-sanaekochiya
@user-sanaekochiya 4 ай бұрын
단순히 UN군 총사령관이라 UN 승인이 필요하단 이유만으로 북진을 8일동안 미루지는 않았을거고, 맥아더의 용병 스타일과 연관이 있었다 봅니다.
@user-ie5ry2tv9h
@user-ie5ry2tv9h 4 ай бұрын
서울 포위 및 38선 차단하여 북한군의 퇴로를 끊고 강력한 별동대 평양으로 바로 진격 시켰으면 어땠을까? 국제 정치적 상황과 방어목적의 UN군의 국제법적 지위로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KM-vm3wy
@KM-vm3wy 3 ай бұрын
너무너무 아쉽기는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마음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담대한 사람이었어도 무려 40개국 가까이 제끼고 단독으로 결정하기 곤란했겠지..... 그렇지만 유엔이 결국 승인할 거라고 예상하거나, 먼저 조치 후에 나중에 설득하면 본인인의 위치, 미국의 지위를 고려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예상을 못 한 게 너무 아쉽다ㅠㅠ
@war-history
@war-history 3 ай бұрын
이승만 대통령의 예지력이 굉장하긴 했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기 전에 일본 내막기라는 책을 통해 일본의 야망을 경고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승만 대통령이 당장 38선으로 올라가라고 얘기한 것은 중공군의 참전을 예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맥아더 입장에서는 인천상륙작전도 억지로 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더구나 서울을 UN관할로 두라는 트루먼 정부 지시까지 어긴 상황이었습니다. kzbin.info/www/bejne/a5zWeYGse7WDjNU (맥아더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은 40년지기였다) 거기다 UN군 사령관이라는 감투까지.... 맥아더의 입장이 이해가 됩니다.
@takeable
@takeable 4 ай бұрын
청천강 전투에 이어 이 영상까지 정말 잘 봤습니다. 저는 군필이지만, 지금까지 국군이 주력이고 미군이 지원 느낌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되는 상황이었다기에 놀랐습니다. 국군 사단들은 공적만 자랑해서 그런 줄 알았으니까요.
@takeable
@takeable 4 ай бұрын
역사에 관심 많은 20대 중반 군필 대학생입니다 지금의 구독자 수 달성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고,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주제넘은 말씀일 수 있으나 역사적 사실을 깊게 다루고, 영상의 내용은 퀄리티가 좋은데 잘 안 뜨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1. 채널명 2. 편집 스타일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takeable
@takeable 4 ай бұрын
여타 채널과 비교했을 때, 역사적 사실을 풀어낸 것과 지식적인 면에서는 이 채널이 수준 높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덜 유명한 이유는... 널리 알려진 지식해적단 같은 채널과 비교하면 그쪽 채널 편집이 훨씬 트렌디하고, 또 채널명도 직관적인 것 같습니다.
@takeable
@takeable 4 ай бұрын
전 쇼츠를 통해 풀 영상이 궁금해서 들어왔지만, 아무래도 채널명 먼저 봤으면 갸우뚱했을 것 같습니다 만물상자 + 전쟁의 신이라 하면 이 채널이 뭘 다루는지 직관적으로 와닿지가 않아서요.
@takeable
@takeable 4 ай бұрын
물론 현재 채널명도 고심해서 지으셨겠지만, 유튜브의 주 시청층인 10~30대에게 어필하기에 좀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요즘 20대한테 알려진 ‘유후의 피아노래’ 같은 짧고 직관적인 그런 채널명이 좋은 것 같아요. 그 채널은 이름만 봐도 ‘얘는 뭐 하는 애구나!’ 하는 게 딱 꽂히거든요. 채널 이름이 기억에도 잘 남고요.
@takeable
@takeable 4 ай бұрын
또 시청시간을 늘리려면 연속으로 한국전쟁 1부 2부 3부 등등으로 기획하면 좋은 것 같습니다. 또 채널명이 중요한 게, 검색할 때랑 주변에 소개할 때 중요합니다. 저같은 사람들은 영상 보다가 다음 영상으로 다음 부작 영상이 안 뜨면 채널명 + 북한산전투 2부 이런식으로 검색을 많이 합니다. 지인이나 친구한테 채널 소개해줄 때도 어...그 전쟁사 잘하는 집 있는데, 채널명 뭐였더라? 하고 생각이 안 날 때도 많고요.
@user-uc9tl1ek9i
@user-uc9tl1ek9i 5 ай бұрын
맥아더는 군의 인간인데 명령없이 북진이라는게 과연 가능했을까요?? 기다리는게 군인으로서 순리 아니였을까요??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09:53 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맥아더가 단순하게 미군만 지휘하는 미군 사령관이었다면 아마 그의 성격상 바로 북진했을 것입니다. 맥아더가 미국 정부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한 것은 이미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일례로 미국정부는 서울을 한국 정부에 바로 인계하지 말고 UN에 관할에 두라고 지시했음에도 맥아더는 자신의 뜻대로 한국정부에 바로 인계했습니다. 결국 트루먼 정부는 사후에 승인하는 방식으로 이를 허락했습니다. 맥아더는 UN군 사령관 겸, 미군 사령관 겸, 한국군 사령관 이기도 했습니다. UN군 사령관이 UN의 권위를 마음대로 깼다면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user-dq6tf9ms6q
@user-dq6tf9ms6q 5 ай бұрын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중국을 자극할 위험도 있고 너무 욕심 안부리고 침략의 댓가다 하고 평양 원산 라인정도만 먹고 더 위쪽은 걍 중국과의 완층지대로 해서 중국과 쇼부쳤더라면 ㅎㅎ
@war-history
@war-history 5 ай бұрын
평양-원산라인이 정말 중요합니다. 중국 자극문제도 있지만 청천강 이북부터는 엄청난 산지가 펼쳐지기 때문에 미군에게 불리해집니다. 지금 생각하면 절대 통일은 불가능했고 평양-원산라인에서 휴전을 하는 것이 한국에겐 최상이었습니다.
@user-sanaekochiya
@user-sanaekochiya 4 ай бұрын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이 성공한뒤 김일성에겐 4개 사단밖에 없었을만큼 빈손이었고, 북한군 대부분은 낙동강 전선에 몰려갔으니까 퇴로를 끊어서 군사력을 공백상태로 만들면 태평양전때 필리핀을 점령해 일본의 패색을 확정한것처럼 김일성도 패배를 인정하고 포기할것이다.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전쟁은 정치의 연장을 가장 완벽하게 실천한 장군이었던 것입니다.
@war-history
@war-history 4 ай бұрын
인천상륙작전은 오늘날에도 가장 적은 손실로 가장 큰 성과를 거뒀다고 인정받는 작전입니다. 만약 낙동강에서부터 서울까지 반격하며 올라왔다면 엄청난 희생도 희생이겠지만 1달이 걸려도 못 올라왔을 것입니다. 인천에서 서울로 진격하는데도 2주가까이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user-sanaekochiya
@user-sanaekochiya 4 ай бұрын
@@war-history 미드웨이 해전에서 역전승한 미국은 세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첫째가 해군안. 바로 대만으로 진격해서 장제스 국민당군과 합세해서 일본육군 주력을 궤멸하고 바로 도쿄를 점령하는것. 둘째가 맥아더의 육군안. 일본군의 거점인 라바울과 필리핀을 점거한뒤 일본열도로 밀고 올라가는 것. 마지막이 압도적인 해공군력으로 본토를 봉쇄하고 폭격으로 고사시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역시 필리핀,라바울 점령처럼 서울을 탈환하면 낙동강 전선에 올인한 북한군은 돌아갈수 없어 와해될것을 염두에 둔겁니다. 실제로 맥아더 장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돌아올수 없는 북한군들이 지리산 등 후방에 흩어져 파르티잔이 됐구요. 중공군의 사전개입 시기가 절묘하지 않았으면 김일성도 백두산으로 숨어들거나 만주로 들어갈수밖엔 없었을 것입니다.
@jina6120
@jina6120 4 ай бұрын
단순계산으로는 10월17일까지 국군과 미군이 압록강까지 점령 할 수 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되려면 중공이 10월18일에 진격을 시작 해야한다는 전제가 깔려야 합니다. 평양이 점령 되어 간다는 소식을 듣고도 한참 뒤이니, 그때까지 중공이 가만히 있었을지, 서둘러 진격을 했을지가 의문이죠. 그래도 재미있는 의견 콘텐츠 감사합니다
@war-history
@war-history 4 ай бұрын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 부분은 사료로 나온 사실이라 말씀드립니다만 중공군 참전도 우여곡절이 참 많았습니다. 우선 김일성이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써서 도와달라고 한 날짜가 10월 1일입니다. 마오쩌둥 빼고는 모두가 반대했음에도 마오쩌둥은 10월 5일에 참전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참전을 다시 취소했습니다. 그 이유는 소련이 공군지원을 해준다고 해놓고 그것을 취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1950년 10월 14일 중앙정치국 긴급회의를 다시 열었고 이 때 참전이 결정됩니다. 결국 미국이 북진을 했다면 중공군은 반드시 10월 18일에 압록강을 건널 운명이었습니다.
@jina6120
@jina6120 4 ай бұрын
@@war-history 역시 근거가 있으신 설명이셨군요. 이렇게 짧게 요약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시다니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진짜 전쟁의 신이신거 같습니다!!
@user-sp4xh9wi4i
@user-sp4xh9wi4i 4 ай бұрын
맥아더 장군의 가장큰 실책은 개인적으로 보면 원산상륙작전이라고보고 약3주간 시간을 버린 완전히 그리고 생각보다 서울탄환이 너무 오래걸린게 너무 큰실책 최소 9.22까지 서울탄환해야 정상적인데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린 9.29 게다가 원래 정해진 맥아더라인선까지 진출후 UN군 및 미군은 방어선중축하고 나머지는 한국군 양도해야 모택동이 맥아더한테 청천강 돌파한다면 우리 참전하겟다고 30번이상 경고햇는데 불구하고 그냥 뭐지 이 Yellow monkey 인식및 사고한거 아닌가 그냥 독일제국과 일본제국을 격파시켜 굴복시켯으니 완전히 발 아래 생각한듯 대략 10년정도 국공내전을 거쳐 실전경험만큼 무시할 수가 없는데 이것을 가장 크게 간과한듯 특히 기후 및 지형와 함께 모택동의 매우 개인적인 성적취향인 0순위 나이 12~18살 소년남자 소아동성애취향과 다음 1순위 반드시 애낳은 나이 33~46살 연령대의 유부녀 취향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특히 무엇보다 6 25전쟁 당시 중공군 참전및 파견은 모택동정권 입장에서는 그렇게 큰 손해가 아닌 0순위로 항일무장투쟁하던 조선족 및 만주군벌, 장개석 지지 대만잔당, 독립투쟁 소수민족들 구성 그 다음이 한족들 모택동정권 입장에서 오히려 미제국의 총칼에 사라지는것이 장기적인 정권입장에서 매우 큰 안정성에 기여 만약 살아 숨쉰다면 어차피 반대하고 무장투쟁할테니
@jina6120
@jina6120 4 ай бұрын
한번 보기 시작하면 계속 빨려드는 컨텐츠 만물상자
@war-history
@war-history 4 ай бұрын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맥아더와 이승만은 정말로 절친이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40년 지기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서로 얼굴을 붉힌 것은 아마도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너무나 잔인한 이승만의 요구였습니다. 이제 막 간신히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냈는데 지금 당장 38선을 넘어 북진하라니... 맥아더는 미군만의 장군이 아니라 미군, 영국군, 프랑스군, 캐나다군, 터키군 등 유엔군의 장군이었습니다. 아무리 맥아더라도 UN 승인까지 무시해버리고 진격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jtk6911
@jtk6911 4 ай бұрын
결국 아이젠하워에 역전당하게 되는 맥아더
@kriskwon575
@kriskwon575 2 ай бұрын
이게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다. 쏘련이 동구권을 먹을 때 연합군과 합의해서 그랬냐? 그냥 스탈린이 내달렸지. 그후에 냉전이 시작되었고.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나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진격속도를 가장 우선 시 했다. 그때 바로 38선을 돌파하고 압록강에서 중공군과 대치했고 나중에 승인받았으면 한반도 통일은 그걸로 끝. 아쉽다.
@war-history
@war-history 2 ай бұрын
트루먼 정부 자체가 유럽만 중시하는 인물로 가득 차 있었고 미래를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둔 후에도 미국 정부는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고 합니다. 그때까지도 미국의 목표는 통일이 아니라 남한만의 회복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대부분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내용입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아시아가 지금처럼 중요한 지역이 될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kzbin.info/www/bejne/nmmliGRvpqqKjrc (73년 전 맥아더의 경고. 대만이 뚫리면 미국은 아시아 전체를 잃을 것이다.)
@user-kz1sv1lv8e
@user-kz1sv1lv8e Ай бұрын
625때면 롬멜 모델은 없을거고 미국이 나치독일 과학자들 데려가서 쓴거처럼 만슈타인 구데리안같은 유능했던 독일군 지휘관들 끌고와서 국군 지휘관으로 한반도에서 썻으면 좋았을거 같은데 어차피 당시 서방이나 나치나 빨갱이는 공공의적이였고 2차대전 2회차 하는 느낌으로 ㅎㅋ
@war-history
@war-history Ай бұрын
6.25전쟁 초반 미군도 1달이 넘게 북한군에게 정신없이 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원인은 물론 북한군의 T-34/85 전차 였습니다. 이상하게도 당시 미군은 소련제 T-34/85 전차의 위력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구데리안과 만슈타인이 그때에도 살아 있었으니 만일 이들에게 자문을 구했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user-sy9kf9kc7l
@user-sy9kf9kc7l 5 ай бұрын
솔직히 말해서 맥아더가 38도선을 넘을수 있는 권한은 없었습니다!왜냐하면 그 권한은 UN에 있으며 38도선을 넘으려면 UN에서 바꿔줘야 하는데 이승만의 억지 요구로 인해서 어쩔 수없이 넘어갔고,결국 중국군을 막지 못한 책임까지 더해서 해임하게 된 것입니다!!우리는 과거 이승만과 맥아더가 사이가 좋은 것으로 알지만 실제론 사이가 껄끄러운 것입니다!!맥아더는 솔직히 38도선 이남에 책임이 있는거지 절대 이북까지 책임을 질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user-sy9kf9kc7l
@user-sy9kf9kc7l 5 ай бұрын
@@djcjfisjsq 아니!!이걸 제대로 보고 쓰는거요?통일이 그냥 쉽게 되는 줄 알았어요?본래 UN군의 목적은 38도선의 회복 및 유지이지 절대 한반도 통일이 아닙니다!!그리고,그 승인이 쉽게 이뤄지는줄 아십니까?맥아더가 이승만의 요청에 왜 표정이 굳었는지 아시냐고요?이승만이 아무리 요구해도 상황을 가지고 설득을 했어야 했습니다!!또,이승만의 태도도 문제가 있습니다!!아무리 통일을 외친들 한국군의 전력이 통일을 할 전력이 아니고,UN군의 목적도 38도선의 유지가 목적이라는 것을 안다면 맥아더에게 그런 말을 할 처지가 되냐는 것이죠!!결과는 모두들이 아시다시피 휴전선에서 휴전을 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분단상태가 내려온 것입니다!!이승만은 그때 북진운운할때가 아니라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djcjfisjsq 네 맞습니다. 철원과 김화 지역은 서울로 향하는 주요 3개 통로와 춘천/원주로 내려가는 영서내륙 통로가 동시에 나뉘는 곳이라 북한이 중부전선에서 서울 침공을 위해 반드시 찾아야 할 지역입니다. 그리고 지형도 보시면 철원은 강원도 내륙에서 황해도 동부(신계,토산,금천,평산)을 거쳐 사리원과 평양으로 향하는 통로가 시작되는 관문이자 길목이라 군사적으로 북한에게 그 중요도가 매우 높았고 어떻게든 도로 찾으려고 발악했습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djcjfisjsq 서울 남침을 위한 가장 주공이 되는 곳은 6.25때나 지금이나 무조건 연천,포천 축선입니다. 개성-문산 축선은 최단거리 자체는 가장 짧지만 한강하구와 임진강 하류 장벽이 커서 대규모 병력과 기갑부대의 진격에 부적절해 연천/포천 축선 다음으로 중요한 조공이 됩니다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그리고 서부전선이 38선으로 올라가봐야 어차피 한강하구,임진강하류 이북과 38선 사이에서 우리가 방어선으로 활용할 만한 지형물이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이라 재남침시 북한군이 한강하구/임진강까지 남하하는데 약간의 시간지연을 시키는 장점 외엔 유리해질 점이 없죠. 개성 시내는 38선 코앞이라 민통선 안에 다 갇히는데다 북쪽의 임진북예성남정맥이 다 북한 땅이라 항상 감제당하는 구조고 북한이 시내 내려다보고 도발할 수 있어 버려진 땅으로 전락하죠 ㅜ 연백평야와 옹진반도도 지형도 보시면 낮은 구릉 외엔 높은 산이나 하천이 전무하고 대부분 평야인데다 멸악산맥, 장산곶이 전부 북한에게 있어 우리는 방어하기 거의 불가능하지만 북한은 육상 전선이 길어도 방어가 수월했죠 ㅠ
@user-hl4cz9ti8j
@user-hl4cz9ti8j 5 ай бұрын
중부전선이 38선으로 잘리면 임진강 중류와 한탄강, 영평천이 다 북한이 쥐게 되고 그 이남으로 북한군이 상시 내려와 있게 되어 서울 방어가 매우 힘들어지고 서울을 수도로 유지하기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임진강/한탄강 아래로 북한군이 내려온다는 것 자체가 방어에 어마어마한 부담이 됩니다
@user-uu3ve9vf9h
@user-uu3ve9vf9h 4 ай бұрын
맥아더가 늙어서 맥이빠졌네..
@twokongs3162
@twokongs3162 4 ай бұрын
맥아더를 욕하다니 ㆍㆍ남의 나라전쟁에 목숨바쳐 싸워준 사람에게 뭐하는 짓일까
@war-history
@war-history 4 ай бұрын
이 컨텐츠는 맥아더를 비판하는 컨텐츠가 아닙니다. 오로지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다룰 뿐입니다. UN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은 단순한 미군의 장군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한국의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6.25전쟁은 단순히 북한과 남한의 대결이 아니었습니다. 이 컨텐츠를 통해 그 엄연한 사실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war-history
@war-history 4 ай бұрын
kzbin.info/www/bejne/a5zWeYGse7WDjNU (맥아더가 대한민국에 우호적이었던 이유 | 맥아더 이승만 두 사람의 약속 1부.) kzbin.info/www/bejne/ipPcXnWwoq2fpLc (맥아더와 이승만의 약속 2부) 이 두 영상을 강력추천합니다.
@user-is7tf4lu9b
@user-is7tf4lu9b 3 ай бұрын
이번편은 뇌피셜과 비약이 심하네요 즉각 38선 넘었으면 북진 통일을 했을거라고 하질않나 9월하순 이미 중공군은 압록강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음요 그리고 그저 북진생각 밖에 없던 이승만에게 예지력이라니요 좀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war-history
@war-history 3 ай бұрын
사실 이것은 뇌피셜은 아닙니다. 언론에도 보도가 된 적이 있는 내용입니다. 이 컨텐츠는 중공군 개입 과정을 자세히 알아야 취지가 이해가 될 것입니다. kzbin.info/www/bejne/oqu9Z6d-opWlaMU (6.25전쟁 때문에 날아가버린 대만침공의 꿈) 위 컨텐츠에 따로 챕터로 "참전을 망설인 이유, 소련의 공군 지원 약속 파기가 있습니다." 마오쩌둥은 참전을 보류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스탈린이 공군지원을 해준다고 해놓고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공군이 1950년 10월 18일에야 압록강을 건넌 것은 바로 이러한 헤프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 컨텐츠를 보시면 어느 정도 이해가 좀 될 것입니다.
@user-zf3ez3ho9q
@user-zf3ez3ho9q 2 ай бұрын
이승만은 끝까지 휴전을 반대하면서 지금 당장 피를 더 흘리더라도 마침내 통일을 하지 않는다면, 후에 훨씬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먼 훗날 이승만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지요. 북한 고난의 행군 때에 2-300만명이 굶어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때 인민군에게 틈을 주지 않고 마구 몰아붙이는 것이 옳은 일이었습니다.
@irnavy0613
@irnavy0613 5 ай бұрын
안타까운 일이었죠. 단독 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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