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3 이곳은 영등포라기라기보다는 한강대교를 용산에서 노량진방향으로 넘어 현 상도터널 입구 쯤 되는것 같습니다. 1946년 서울 전차노선 지도를 봐도 이 지점에 급우회전 노선 왼편에 야산이 있는 점 영등포 역주변은 이렇다할 산지형이 없이 한강뚝보다 낮은 평지라는 점 또 노량진 이후 영등포까지 급 우회전노선 구간이 없는 점등을 생각해 봤습니다. 사람들의 복장이 하복이고 그림자 크기로 봤을때 정오에 가까운데 그림자의 방향을 보면 전차가 향한 방향이 남남서방향으로 보입니다. 결정적으로 9:33 이미지의 강건너 야산의 흙이 벗겨진 산길의 모양과 산 오른쪽에 있는 송전탑같은 물체의 모양과 위치가 같아 보입니다.
@koreangeographic38602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seungwooham32042 жыл бұрын
저도 영등포 사는데 최근 재건축 되어서 아크로타워가 들어선 과거 언덕 있던 곳이 가장 높은 곳인데 말씀 하신게 정확 하신거 같습니다. 영등포는 저렇게 높은 곳이 없었습니다.
@seungwooham32042 жыл бұрын
생각해보니까 당시에 노량진이 영등포였습니다 지금이야 구역이 나눠졌지만 그래서 저때 당시에는 영등포라고 말해도 잘못된 거 같지는 않습니다.
@arabica72 жыл бұрын
@@seungwooham3204 저사진 찍을 당시(50년대중반)에 노량진동이 영등포구였기는 하지만 노량진이라는 명칭은 정조임금의 화성행차 의궤에도 나오는 서울에 입성하는 가장 중요한 나루(진)로 조선시대 서울 지도에도 그냥 노량진이라고 나오는 곳입니다. 또한 임금행차때 쉬어가는 행궁도 위치하고 있었는데 노량행궁이라고 했죠. 서울 한강에는 주요 나루와 포구가 있는데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이름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사용해 왔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광나루( 광진), 양화나루(양화진), 노량나루(노량진), 방화나루(방화진),마포나루, 영등포등 잘 아시겠지만 마포,영등포의 포(浦)자가 포구를 의미하는 지명이고 조선말기까지 영등포는 마포에 비교할 수 없는 작은 포구였습니다. 일정때 만든 경성지도에도 노량진리와 영등포리가 완전히 구분되어 있고 무려 영등포리와 노량진리 사이에 도림리, 신길리도 끼어 있습니다. 지금의 도림동과 신길동이죠. 노량진, 영등포 모두 시흥군에 속해 있었습니다. 시흥군에 속해 있지만 영등포와 노량진이 시흥이라 부르지 않았죠. 해방이후 서울 행정구역을 재편할때 노량진이 관악구 소속이었다가 전쟁끝나고 서울재건때 영등포구로 이후 다시 동작구로 재편되었죠. 구역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잘 나뉘어 있던 곳 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진의 위치를 크게봐서 영등포라고 하게 되면 후손들이 이 사진하나를 놓고 영등포 어디쯤일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위치를 구체화하고 특정화해서 고증을 해주는것은 과거를 살아보지 못한 후배(후손,후학)들에게 불필요한 시간소모와 논란을 덜어 주기 위함입니다. 명성황후 사진만해도 고증이 정확지 않아 학계에서 오랜기간 논란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 그래서 정확한 위치를 찾아본 것입니다^^
@seungwooham32042 жыл бұрын
@@arabica7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kdsun71272 жыл бұрын
극장 광고판을 그 당시에는 직접 그렸지요 50년대 중반에 태어났지만 이렇게 화려한 사진들은 처음 봅니다. 국민학교 하교길에 극장앞에서 광고판 그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 볼 때가 엇 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귀한 자료 감사드립니다.
@cSyaK69 Жыл бұрын
자료조사하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pkc-r5t2 жыл бұрын
어린시절 영등포역 앞에서 전차를 타고 한강수영장을 갔다 영등포역 앞에는 항상 기마경찰이 있었는데 그때는 말이 왜그렇게 컷는지 순사(경찰)가 무서웠고 한강백사장 모래는 너무 고왔고 한강물은 얼마나 맑았던지 그리고 물속에 있는 자갈들이 참 이뻤다 그때의 흑백사진을 꺼내보며 그시절을 그리워 해본다.. 세월 참...
@seungwooham32042 жыл бұрын
감수성...
@노혜미짱2 жыл бұрын
어르신 이번달 노령연금 받으셨나요?
@vornamenachname64542 жыл бұрын
@@노혜미짱 애쟈나너 ㅋㅋㅋㅋ여기서그게왜나오냐?
@rlaaudtjq2 жыл бұрын
@@노혜미짱 70~80대면 노령연금 없던 시절 아닌가요?
@김형규-k9y2 жыл бұрын
@@노혜미짱 싸가지 없는x
@김춘남-u9l Жыл бұрын
저시대에는 제가 어릴적 아기때였네요 귀중하고 소중한 사진자료 잘보관해주시고 이런영상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kwonesteban2572 жыл бұрын
감개무량합니다~~^^ 덕분에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갔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광-u1g2 жыл бұрын
1958.중학교 1학년 때 무악재를 넘어 진관사로 소풍을 가던 어린 시절이 어제 같습니다 마침 무악재확장공사를 하느라 핫바지입은 아저씨들이 정 곡굉이 삽으로 바위를 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재넘는 저 소도 침 질질흘리고 참 힘들었겠네요 옛날 모습~ 기억이 새롭고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arabica72 жыл бұрын
무악재넘어 소풍갔셨다면 종로구 서대문구소재 학교다니셨군요 ㅎ
@스타리2 жыл бұрын
아버님은 용산철도청에 일했고 시골에서 올라와 영등포시장 근처의 살앗던 네살 무렵. 어머니가 나중에 말씀하셧지요. 아버지가 네게 사탕 사주려고, 전차를 안타고, 걸어서 한강 다리를 건너곤 햇단다. 이제 천국에 계신 아버님, 제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user-1kljsh28l92 жыл бұрын
ㅠㅠㅠ아부지... 님도 이젠 그 사랑을 자식에게 아낌없이 주고 있겠네요..행복하세요
@관운장KOR2 жыл бұрын
시비거는 건 아닌데 천국은 없습니다. 죽으면 끝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엄청난 중력을 만들어 시공간을 이동할 수 있지만 천국이라는 곳은 가본 사람도 없어 과학적으로 입증도 할 수 없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의연해
@박정희-k1e Жыл бұрын
@@관운장KOR 에휴2...
@송어달-c5e Жыл бұрын
ㅠㅠㅠ 저희 부친도 작년97세로 작고하셨네요
@cSyaK69 Жыл бұрын
부럽다응
@blackblueswooleechi33652 жыл бұрын
목소리는 30대같은데 딱 저시절에 살아보신듯 정말로 실감나게 해설을 잘~하시네요! 그런데 목소리 목청이 듣는사람이 전혀부담도 없고 목소리톤도 높지도 낮지도 않게 참으로 듣기좋고 차분한 해설에 훌륭한 영상자료에 ... 지난 옜날을 회상하며 너무 잘 보았읍니다 감사합니다!
@kdchwin2 жыл бұрын
AI 음성이에요.
@자유민주-w4f2 жыл бұрын
@@kdchwin 어쩐지 여자랑 남자들 목소리가 여기저기 똑같더니. 유툽 올릴때 선택없던데...흐음
@hanbaedal2 жыл бұрын
전쟁후라고 보기엔 도시가 의외로 깔끔하고 사진의 상태와 화질이 너무 좋네요. 훌륭한 자료네요.
@yoon31712 жыл бұрын
주인장님이 직접 색채복원하신걸겁니다
@ddddddddddd5142 жыл бұрын
@@yoon3171 그러면 원래는 저 색깔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요??
@rong91922 жыл бұрын
@@ddddddddddd514 그렇죠... 그냥 보기좋게 이랬을꺼라고 색 넣은것
@aa-ez1uu2 жыл бұрын
@@rong9192 아뇨 그건 아니고 원본이 흑백이여도 건물의 데이터가 어느정도는 남아있어서 그걸 기반으로 칠한거죠
@jwhan90072 жыл бұрын
미세먼지 없는 하늘....깨끗해요.
@younggun4542 жыл бұрын
8:09 미륭상사 주유소, 오랜세월이 흘렀네요, 우리 큰아버님이 소유하셨던 주유소 를 지금 보게되니 반갑네요. 설날 세배드리러 가면.. 장농에서 꺼낸 빳빳한 새돈을 부채처럼 펴서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ㅎ 큰아버님의 아들... 이름이 박동선 형 이었습니다.
@당구의신-q5z2 жыл бұрын
로비스트 박동선??
@arabica72 жыл бұрын
미륭상사 주요한 지역마다 미륭 주유소였죠 갈월뿐만아니라 을지로,동대문등 이후 상선회사도 운영하던 재벌기업
@pparloc Жыл бұрын
젋은시절 워싱톤 디시에서 택시 운전할때 배우 트럼프등 유명인들 테운적 있었는데 박동선씨도 그중에 한분 호텔앞에서 흑인한분 (아마도 바디가드)과 박동선씨를 조지타운까지 데려다준 적 있습니다 동부에서
@hsc362 Жыл бұрын
75년도에 중학교 수학여행을 서울로 갔었는데 숙소 근처에 있던 화신백화점 안에 들어가서 구경했던 기억이 납니다. 백화점 겉모습은 그때랑 똑 같은거 같네요. 맞은편에 비슷한 백화점이 하나 더 있었던 걸로 기억납니다.
@pparloc Жыл бұрын
아마도 신신백화점일 겁니다.
@아이큐430김똥또2 жыл бұрын
옛날 그 때 그 시절 영상 언제나 잼 있고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pionarlesmordo93102 жыл бұрын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실감나네요 전쟁으로 쑥대밭이 됐는데도 이렇게까지 발전한거보면 실로 대단합니다
@jasminelee49242 жыл бұрын
소중한 자료 너무 감사드립니다 흔적들 기록들 상상속으로만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던 건축들과 길거리 모습들 감동입니다
@조금만아파도눈물나요2 жыл бұрын
너무 재밌어요 사진 디테일 설명도 해주시고 사회 수업 듣는것 같네요
@인태정-x2p2 жыл бұрын
이 소중한 사진 자료를... 엄청납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추억속으로
@그때그사람-r4p2 жыл бұрын
흥미진진한 영상 재미있게 시청했습니다- 다음 영상을 기대하며 좋아요 꾸욱 누르고 갑니다♥
@user-ii1ri2dk5g Жыл бұрын
이후 50년도 되지않아 월드컵 개최와 4강 신화를 이루었구나. 참으로 대한민국은 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사진속의 모든분들 열심히 일하시며 가정을 돌보셨고 사회의 일원으로 또 한국의 민주화도 이루셨다..
@BABYLON-park2 жыл бұрын
오래전 추억 입니다, 영상 잘 보고 갑니다, 더욱더 좋은 추억을 부탁드립니다,
@taylorrekim59092 жыл бұрын
화신백화점에서 80년 교복샀었는데..무악재의 65년전 모습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레이너특공대2 жыл бұрын
언제나 흥미롭게 감상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영상에선 제 모교의 아주 까마득~한 선배님들을 먼 발치에서 보니 묘하네요. ㅎㅎㅎㅋㅋㅋ
@heonjuchoi22992 жыл бұрын
저는 57년생 입니다 넘 잘봤습니다 .
@docteursade22 жыл бұрын
대대로 서울 종로구 출신으로 아버지가 태어난 곳이 바로 국제극장 바로 뒤였고, 소생은 1952년 6.25사변이 끝난 다음해인 1954년 초등학교 (당시는 국민학교) 입학하고 역시 종로구 소재의 중,고둥학교 입학을 1960년에, 1969년 대학 공부를 마쳤으니 본 영상물 사진의 거의 모든 사진들이 기억이 생생하게 납니다. 그당시엔 웬만한 좋은 중,고등학교는 거의 종로구에 소재했었으니 등,하교는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다녔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도기억나며, 당시 이승만 대통령 생신날에는 밤에 남산에서 축하 불꽃놀이를 하여 어찌나 신기하고 아름다웠는지,,,,,,, 나라가 가난했기에 그 신기한 불꽃놀이는 약 5분 ~10분 정도였고 용산 미8군 사령부의 7월 4일 독립기념일 불꽃놀이는 30분을 넘게 터뜨려 그날이 얼마나 좋았었던지,,,,,,,, (아마도 한국의 불꽃놀이는 미군으로부터 재료를 조금 얻어와서 터뜨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런 나라를 당시 국민들이 엄청나게 발전시켜 놓았더니, 이제 김정은이 나라가 되자는 국민의 수가 약 50% 가 되고 있으니, 피를 토할 심정입니다. 소생의 댓글을 읽는 그 50%에 해당하는 젊은이들은 소생을 틀딱, 꼰대라고 희롱을 하겠지만, (꼰대라는 단어는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당시는 꼰대를 주로 아버지, 선생님 등을 비하하는 호칭으로 불렀으나 틀딱이란 단어는 없었기에 작년에 비로서 그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틀딱, 꼰대라고 희롱해도 소생은 슬픈 마음은 없습니다. 틀니를 하지도 않았고, 그 50%에 해당하는 젊은이들처람 무작정 반말과 욕지거리를 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사파 사상을 공부하는 동안, 소생은 잘 살기 위해 외국어 3개를 공부했고, 전 세계를 다니며 물건 하나라도 더 팔려고 과감하게 도전하며 살아왔으며, 지금까지도 한국 물품을 수입하면서 유럽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틀딱이라고 부르는 젊은이들이 오히려 처량하게 보일 뿐입니다. 화질도 매우 깨끗하고 서울의 옛 모습을 요모조모 보여주셔서 잠시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기회에 큰 감사를 드립니다. 하여,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좋아요" 와 "구독" 의 흔적을 남깁니다.
@Tygfsv2 жыл бұрын
대한민국의 애국자 이십니다. 건강하세요.
@docteursade22 жыл бұрын
@@Tygfsv / 감사합니다. 그리고 닉네임 자체가 Good Korea 이시니 그야말로 좋은 대한민국을 재건하고 발전하는데 큰 재목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자유민주-w4f2 жыл бұрын
@@docteursade2 혹시 종로면 경기 중동 경복등이겠네요 ^^;;
@docteursade22 жыл бұрын
@@자유민주-w4f / 왜요 ? 많이 있지요. 경기, 경복을 비롯하여 서울, 보성, 중앙, 휘문 등과 여학교로는 숙명, 창덕, 정신, 풍문, 진명, 배화 등등 명문 남녀 학교가 많았습니다. 왜 ? 당시는 대한민국의 중심지가 서울의 종로구였기 때문이지요. 지금의 명문 고등학교는 강남구, 서초구에 몰려 있고요.
@한중호-k4t2 жыл бұрын
50퍼센트가 빨갱이라는건 억측 입니다. 10도 안되요.
@jonathanlee87922 жыл бұрын
내가 태어난 해 서울 가슴 뭉클 하네요
@배승현-f9x2 жыл бұрын
옛.생각이.참감사합니다.그땐.최고멋진건물이었지요.
@John-hu3xm2 жыл бұрын
좋은 자료 넘 감사합니다
@booksbogo2 жыл бұрын
가슴어린 영상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제 채널 첫 화면에도 추천채널로 홍보해 두었습니다. 늘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메존일각고다이2 жыл бұрын
사진에는 복구가 비교적 빨리된 부분만 찍혀서 그렇지,60년대까지 흑석 3동(동작동 국립묘지 뒷산 근처)에는 예비군 시가전투장 처럼 반파되고 잡초가 무성한 집들이 상당부분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집에서 기르던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게 일과중 하나였습니다. 한강 인도교도 다리 자체는 빨리 복구 되었지만 60년대까지 6.25때 부서진 교각일부와 상판이 한강 한 가운데 방치되 있었습니다. 철교는 조금더 후에 치워진 걸로 기억합니다. 흑석동에 있는 유일한 공립학교인 은로국민학교를 다녔던 관계로 현충일만되면 동작동 국립묘지(현 현충원)에 쓰레기 잡초 뽑기에 동원되서 현충일날은 한번도 제대로 쉰기억이 없습니다. 덕분에(?) 몇번인가 한복입고 있는 미국 할머니(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두사람이 부축하고 참배온 것을 본일이 있습니다. 지금이야 대부분 잊쳐진 참상처럼 되버렸습니다만, 당시만해도 아직 젊은 부인이 흰색 소복을 입고 5-6살정도 된 아이와 함께 "금아지구.......일병 홍길동"이라고 씌어진 비석앞에서 통곡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전쟁의 상처에 딱지가 체 않기도전에 새로운 전쟁 "월남전 파병"과 그로 인한 동작동 국리립묘지는 또한번 성황(???)기를 맏는 것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친구들과 국립묘지에 놀러가면 한쪽에서 군인아저씨들이 정으로 새로운 비석을 만드느라 꿍꽝소리가 일상처럼 들려 왔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2-4명의 의장대가 태극기가 덮인 하얀상자를 가지고 구덩이가 파인 장지로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조총소리도 들었구요. 이 몇장의 사진이 지금은 잃어버렸다고 생각되던 수십년전의 기억을 다시 생각나게 하네요.
@dsmoon55002 жыл бұрын
서유견문록의 유길준이 세운 은로국민학교 졸업한 사람입니다, 국립묘지, 검은돌,연못시장,달마사. 많은 추억이 담긴 단어지요.
@guyoungtan Жыл бұрын
미국할머니x 오스트리아 할머니에요
@김수연-n4w2r Жыл бұрын
생생한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재미있어요😊 다른 기억나는 이야기가 더 있으시면 또 들려주세요~
우리 아버님이 59년에 서울 올라와 서울의 중심지인 경복궁 근방에 터를 잡고 우리들을 그곳에서 다 키우셨다고 하던데 ㆍ지금은 고인이 된 아버님이 그립네요
@황동열-g5n2 жыл бұрын
맨 마지막에 있는 사진과 같은 한강 보트가 뚝섬 영동대교 다리 밑에서도 있어서 제가 11살이던 1976년 외할머니 생신 때 가족들이 함께 탔던 기억납니다.
@김효란-e4n Жыл бұрын
이승만 대통령 80생신때 서울운동장에서 마스깨임에 참여하던 국민학생이였는데 감회가 깊네요 영상 감사합니다
@churchinthehometvisloveear282528 күн бұрын
귀한 영상입니다 🎉감사합니다
@red-beans-s3n2 жыл бұрын
담백한 목소리와 설명 듣기 좋습니다
@pparloc Жыл бұрын
아주옛날 거북당 아이스케잌 근처에서 살던시절 동내아이들과 홍재동까지 걸어같다온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지금사진으로 보니 무악재 고개길이 맛는거같습니다 60여년이 지나서야 기억속의 그 고개길 이름을 알게되었네 동부에서 71살 할아버지가. Thanks for the upload.👍👍👍
@cSyaK69 Жыл бұрын
71살이면 한창 때 아니노?
@pparloc Жыл бұрын
@@cSyaK69 하모 인생은 60부터라고 아직까지 11호 자가용이 튼튼해 18홀 정도는 가볍게 도니까.
@cSyaK69 Жыл бұрын
@@pparloc 엥간히 해라.
@pparloc Жыл бұрын
@@cSyaK69 이보게 아름다운 댓글판 더럽히지말고 병원에 가보시게.
@이준범-d4j2 жыл бұрын
그때 그 시절 어머니 건강 조심하시고 행복하세요
@김복현-z3d2 жыл бұрын
좋은 영상 잘봤습니다 감사드려요🙏👍
@koreangeographic38602 жыл бұрын
시청과 댓글 감사합니다^^
@민규리-j8j Жыл бұрын
서울방송국사진은 50년대라고 믿기지않을정도로 현대적이네요
@kimjeongjoonful2 жыл бұрын
좋은 영상자료입니다.~~ 👍
@-2-2752 жыл бұрын
♥ 고맙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날마다 좋은날 되세요~
@-2-2752 жыл бұрын
※ 영등포구 본동 ▶ 관악구 본동 ▶ 동작구 본동 ▶ 동작구 노량진동으로 변경됨
@leadersjs89042 жыл бұрын
한강 얼음채취 보니깐.. 지구 온난화가 얼마나 극심한게 새삼 깨닫게 됩니다.
@danielcrone95532 жыл бұрын
이런 자료와 정보들은 어떻게 얻는지요..? 감탄하고 갑니다.
@Cd-10042 жыл бұрын
월남전에 푼돈 받고 전쟁에 참전하신 분들에게 삼가 고인의 멍복을 빌며 감사합니다 월남전 참전으로 그때 당시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50억달러 받았는데 어마어마하죠 그 돈으로 한강다리가 세워진것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대한민국 국민만 자랑스럽습니다
@hyblidblackbox88472 жыл бұрын
아직도 생각난다.... 여름이면 이때 한강에서 수영하던 기억이 난다... 그 유명한 뚝섬 유원지에서... ㅋㅋ;; 지금은 꿈도 못꿀일이지만.....
@92BAR2 жыл бұрын
해외다니면서 느낀게 일단 한강이 너무 멋있다는거 ㅎ 근데 이게 수영할 정도로 깨끗해진다면 대대손손 먹고살만한 관광자원도 될듯 ^^
@tador5907 Жыл бұрын
한강대교가 세워진 시점이 1917년이라니 일제 강점기에 건설되었군요. 너무 일찍 남쪽 노량진에 연결되서 그런지 올림픽대로와는 직접 연결이 안되더라구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FGDJJGFJG2 жыл бұрын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kumahachi23882 жыл бұрын
이 당시 사진들 보면 정말 신기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너무 아프다. 하지만 아름답기도 하다.
덕수국민학교 다닐때 내 나와바리는 국제극장까지,,. 건너 크라운제과,덕수제과, 금강,에스콰이아, 교육회관, 상업은행, 광화탕, 새문안유치원... 4년전에 잠깐 갔을때 보니 흔적도 없고.. 신문로 관사촌, 당시 서울고등학교는꽤 넓어 내 놀이터, 조금 더 가서 광화문 지하도 지나 화신,신신백화점까지 가면 매우 멀리 갔단 기억.. ㅋㅋ 그때 친구들 지금 60대 중반,, 아 .쏜살같은 세월.
@오두환-k2z2 жыл бұрын
말씀 하시는 것을 보니 덕수 56회~57회 정도 되시나 봅니다. 반갑습니다. 그 나와바리에 성공회도 들어가면 좋겠고 광화문 네거리 근처에 숭문사라는 서점도 기억 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새문안교회 정문 바로 옆에는 2층짜리 오래된 중국풍 긴 기와지붕 건물이 있었는데 1층에는 공갈빵 같은 중국빵을 파는 가게가 두군데나 있었지요. 옆반 선생님과 연애하던 담임선생님 심부름으로 중국빵 셔틀을 하던 기억하며 학교운동장 언덕 아래 뜀틀 같은 운동기구를 보관하던 방공호가 있던 기억. 또 그 너머 남산으로 옮기기 전 옛 중앙방송국이 있던 것도 생각납니다. 이때가 1950년대 후반이니 60년도 더 된 아련한 추억들입니다.
@kyongpark34295 ай бұрын
한글학회, 봉사실 ,당주동,구세군, 사직공원, 덕수국민학교 ...어쩌면 어릴적 같이 놀던 친구중에 한분 같군요😊😊😊
@johnkim93062 жыл бұрын
7:16 도성박물관이 원래 이대부속병원건물이었군요... 신기방기
@나는나다-u8b2 жыл бұрын
돌아가신 아버지가 당시 경복고 나오셨는데 그 거리와 학생들 사진 보니 참 세월이 허망하네요
일본이 지은 건물들은 땡삼이가 반일노래 부르며 때려부숨. 내겐 중앙박물관이 었을뿐인데ㅠ 그때 돈1억들여 부숴 원망많이 했었음. 정작 중은 마카오는 스페인 식민지100년 이라 스페인 건물도시라 1년 5천만관광온다니. 칭다오는 독일 100년 렌트라 진짜 이쁜 독일도시 ㅡ이런거 봄 6.25 중인민군에 분단된건데 ㅡ백년전을 더 난리니ㅡ 6.25에 사망자 실종자 숫자가 어마어마한데ㅡ
@호시센세2 жыл бұрын
지금의 모습이 남아있는 건축물들은 참으로 희한하네요 ~^^
@kidultvideo15042 жыл бұрын
국제극장과 소방서 망루를 보니 그립습니다. 삼청동천을 따라 수도육군병원에서 기상나팔소리에 매일 깬 기억이 납니다.
@kyongpark34295 ай бұрын
당시 시계가 흔치 않았던 시절 12시에 뚜우~ 하면서 소방서 망루에서~ 😊😊😊
@beegees68132 жыл бұрын
국제극장 옆으로는 아카데미 극장.그리고 시네마극장도 ㅎㅎ 그옆으로 조금옆이 바로소방서와 국회의사당 다음으로 덕수궁 돌담이네요 61~62년돈가 북한과 남한의 비교전시회를 하던생각이 나네요 ㅎㅎ
@kyongpark34295 ай бұрын
소방서는 국제극장 건너편,옆에는 동아일보,당시 12시 되면 뚜우~😊😊😊 싸이렌 으로 시간 알려주고...
@한율-g4i2 жыл бұрын
ㅎ...효자동도 나오네요. 옥인동이라고도 불렀는데 제가 옥인동 특무대 앞에서 살았거든요. 저는 59년생이지만 60년대나 저때나 정경이 비슷하네요 ㅎㅎ 광화문까지 자전거타고 나가서 삼청동으로 한바퀴 뱅 돌아서 놀러 다니기도 했는데요. 여름엔 제2한강교 아래까지 가서 헤엄치고 놀기도 했어요.동부이촌동과 서부이촌동 사이쯤 되네요. 저시절에 비록 먹고 사는 건 풍족하지가 않았지만 사람들 인심은 꽤 좋았던 거 같아요. 그시절로 다시 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립긴 합니다.
@lksn612 жыл бұрын
자전거가 있었다니 부자셨네요, 저는 낭만적인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자주 나는데요
@라온버디-h9z2 жыл бұрын
나랑동갑..
@비젼비젼-x9l Жыл бұрын
뚝섬백사장은 70년대 후반 까지 있었습니다 ~ ^^
@kangpro41122 жыл бұрын
정말 많이 발전했다 미국과 소련 우연찮게 어부지리 많이 얻었네 소련에게 우연찮게 불곰 사업하면 무기를 받아 그뒤에 최근에 와서 방산 산업이 빛을 바라네 정말 자원 돈 국력 아무것도 없었는데
@vincero6712 жыл бұрын
1965년쯤 서울역에서 염천교 쪽으로 길가에 팥죽 떡 닭창자탕 파는 노점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
@저울질-s2o2 жыл бұрын
염천교위쪽엔시장이있었씀니다ㅡ그시장이,용산으로이전했죠나도그당시북아현동쪽ㆍ에살았는대ᆢ
@토배기전2 жыл бұрын
화신백화점에 교복사러갔던 기억이 있네요!
@lksn612 жыл бұрын
맞아요. 70년대만 해도 화신백화점 등 몇몇곳에만 교복을 팔았지요, 저도 학교가 종로에 있어 화신으로 교복사러 갔었네요. 선생님 말씀에 아득한 옛추억이 되살아 납니다
@kwonpark84592 жыл бұрын
학교에서 약도까지 나눠줬습니다.
@윤장인-l4p2 жыл бұрын
내나이70 난 면목동이 고향 그땐 전부 논밭이고 버스도 하루 두번 흙먼지 일으키고 다녔음 종로 사시는 고모네 가면 창경원 구경시켜 주고 전차타고 화신 백화점 구경 시켜주면서 나보고 촌뜨기라 했음 일주에 한번씩 생선 싣고 고기 싣고 동네에 장사꾼이 오면 그날은 고기먹는날 신앙촌 아줌마가 빨간 내복 팔러오고
@unknown-tw1fn2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조상님들 사랑합니다
@고래언덕2 жыл бұрын
오늘 57년 58년 형님들이랑 술마시러 가는데 이분들 태어났을때 사진들이네요 ㅎㅎ
@김복현-z3d2 жыл бұрын
좋아요👍👍👍
@koreangeographic38602 жыл бұрын
첫댓글 감사합니다ㅎㅎㅎ
@강재우-l7y2 жыл бұрын
서울 영등포구 도림천 부근에 삼강하드아이스크림 공장이 있었는데, 테마박물관 같은데 가면 삼강아이스케키라고 써 있는 통도있던데 삼강에서는 하드만 나온걸로 아는데, 혹시 삼강하드아이스크림이 나오기전에 삼강에서 나온 아이스케키를 그당시에 먹어보셨거나 보신분 계시면 빨리 답글 부탁드려요
@오두환-k2z2 жыл бұрын
삼강하드가 나오기 전에는 소기업에서 만드는 요즘 비비빅처럼 나무 막대 달린 아이스케익이 일반적이었습니다.(아주 드물게 만드는 방법이 달랐던 달걀 모양을 가진 일명 달걀아이스케키도 있었지만 대중적이지는 않았지요) 빵집에서 만들어 팔기도 했으나 주로 아이스케키통을 짊어진 소년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팔았었죠. 그러다가 삼강하드가 막대기 없이 포장지에 싸인 아이스케키 형태로 출시되면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더랬죠. 제 기억에 삼강하드는 삼성 고 이병철 회장의 친형님이었던 이병각 씨가 설립한 회사의 제품이었는데 삼강하드가 아이스케키 시장을 석권하고 기존의 중소기업 형태의 아이스케키집들이 다 망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삼성이 아이스케키까지 팔아서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부정적 여론이 일어 결국 롯데에 회사를 팔았다고 들었습니다. ps. 당시 부르던 이름은 삼강 하드아이스크림이 아니고 삼강하드 아이스케키 혹은 그냥 삼강하드라고 했습니다.
@윤장인-l4p2 жыл бұрын
네 삶은 팥이 통째로 들어간 막대케키 지금 비비빅 같이 생긴
@cxosunxxn2 жыл бұрын
세계 어딜다녀도 한강같이 큰강이 있는 대도시는 찾기 거의 어렵죠...서울은 여기저기 산도 많고 하늘만 맑으면 진짜 최고
@깜냥리즈-m4v2 жыл бұрын
많은데요. 몬트리올, 항저우, 잭슨빌, 뉴욕, 우한, 창사, 푸저우, 난징 등, 큰 강과 산이 어우러진 도시로 국한하셔야죠. 사실 한강이 제방 공사만 안 했으면 강폭이 큰 편은 아니네요. 잠실보와 고양보만 철거하면 강폭 넓지 않아요.
@uzumate9976 Жыл бұрын
@@깜냥리즈-m4v 미국에 있는 강들 한강 5~6 배 더큰 강들 많있습니다.
@physik802 Жыл бұрын
북쪽에 대동강도 있습네다 동무.
@uzumate9976 Жыл бұрын
@@physik802 평남 6.25 전쟁이전에 있던 비단공장 어떻게 됐어? 동무가 강제적으로 뺏어 갔니? 우리 할아버지 비단공장이였는데
@blanc1971 Жыл бұрын
수심이 개천수준이라 큰배가 못다님. 겨울에는 바닥이 드러남.
@정데이빗-x2p8 ай бұрын
요즘 1958수사반장을 보면서 저 시절에 태어나지도 못했지만 참 저때는 그래도 사람들끼리 부대끼며 정감을 나누고 했겠구나 싶었습니다. 지금은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 1~2미터 문만 열어도 서로 쌩까는 시대이니, 참 너무 상막하고 매정하고 낮선 이시대에 살기 힘드네요 ㅠㅠ
@junerahm61282 жыл бұрын
ㅎㅎ 어떻게 이런 귀한 자료를 ...감사합니다 ...내가 나이가 60이라 60년대 초반 기억은 다 나는데 저때 정말 좋은 시절이였다 순박한 사람들 여유로운 도시의 거리 깨끗한 공기 뭐든 넓직 넓직하고 한가하고 ...한강에서 강수욕도 하고 모래찜질도 하고 한강물이 놀랍게도 파랫다 세종로 한가운데를 갓쓴 할아버지들이 한가롭게 걸어다녀도 전혀 문제가 없는 교통상황 그냥 벌판 비슷 ..다시는 오지않을 정말 좋은 시절
@Uzi_9mm2 жыл бұрын
예전에 80이 다 되어가시는 저희 이모에게 지금보다 옛날이 좋았냐고 여쭤보니 몇 마디 하십니다. 사기꾼 천지에 유괴에 납치에.. 게다가 저 당시 여자의 인권은 바닥중에 바닥이라 공장에서 고생 엄청하셨다고 하네요.(60~70년대도 마찬가지) 주 6~7일을 매일같이 16시간 가량 근무하고 밥 먹는 시간 잠깐 쪼개서 화장실에서 쪽잠자고.. 명절이나 되어야 고향에 가는데 버스며 기차며 사람들은 꽉꽉 채워져있고.. 그 10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아저씨들 담배피는 거 겨우 참아가면서 가셨다네요. 뭐 세상만사 모든 것은 케바케입니다..ㅎ
@자유민주-w4f2 жыл бұрын
@@Uzi_9mm 그때 취직할때가 없어 독일 간호사 광부도 5만이 모였었는데 무슨. 사기꾼 유괴 납치 실종은 무슨. 사람수도 적을때고 순수했는데
@Uzi_9mm2 жыл бұрын
@@자유민주-w4f 그럼 부산 형제복지원은..? 님이 말한 저 네 개가 다 들어가 있는 사건인데.
@Uzi_9mm2 жыл бұрын
@@자유민주-w4f 아재요. 말 좀 해보이소.
@Amen_Corner5468 Жыл бұрын
겨울에 저 한강 철교 위쪽에 한겨울에 스케이트 장 개장 하면 아침 부터 추운지 모르고 스케이트 타러 다니던 생각이 난다 ㅎㅎㅎ
@전각카는곧국가다 Жыл бұрын
70년초반 까지는 1한강교 근처에 놀이배 엄청 많았음~~그리고 인도교 옆 현 서빙고쪽 백사장에 군군의날 전투기 시범 폭격도 있었고 당시 나는 초등학교때 흑석동에서 본기억...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서울시내에서 전투기 폭격시범~~ㅋ
@신호강-n7p2 жыл бұрын
한강인도교는 졸업앨범 사진 촬영 인기장소 였습니다
@tudorkim71342 жыл бұрын
차분하니 좋네요.. 추천쿵!
@bboo0602 жыл бұрын
용인시 옛날 모습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감사합니다
@Managuer-02 жыл бұрын
용인시는 1979년 5월 용인읍으로 승격한 후, 1996년 3월 용인시로 승격돼서 뭐 볼게 있었을까요? 그 당시 그냥 시골풍경 였을텐데...
@최경철-c3fАй бұрын
내가 59년생인대 굉장히 오래된 사진들이군요,,
@쿠미-s8f2 жыл бұрын
한강에 백사장.. 좋네요...
@ysa4473 Жыл бұрын
5:26 삼청동천이 1957년 복개? 내가 저 부근에 있던 풍문여고를 다녔는데 저 지점에 개천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건 한반도 한국이 아닌 것 같음 5:35 저런 버스 차종도 한반도에는 없지 않았나 싶네 6:26 화신백화점은 내 고딩 시절에도 있긴 했는데 저 옆 건물이 고려상가인가 고려당인가? 고려당은 건너편 옛날 종로서점 건물에 있었는데 말이죠. 거기서 친구가 연유버터빵을 사먹자고 해서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죠. 그런데 이 빵을 파리바게트에서 아직도 만든다는 것.
@kyongpark34295 ай бұрын
나는 양정 다녔는데 기억으론 풍문 하고 자매학교 아녔나요~ ?😊😊😊
@otatryu29432 жыл бұрын
같은 공간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 사진과 유물이라는 타임머신으로 둘러보는 뜻깊은 여행. 🌈🌈🌈
제가 태어난 해입니다 ^ ^ 학교다닐때 안국동에서 학교 친구들과 화신백화점 까지 걸어 가서 집에 가는 버스를 탔었어요。정말로 오랜만에 화신백화점 모습을 보니 학창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감사합니다(^^)
@준제김-j1q2 жыл бұрын
제가 태어나기 전 시대입니다.
@윤수미-k9d3 ай бұрын
1958년생. 입니다. 초등2학년서울가서. 전차 타봤어요.
@레이튼-p9uАй бұрын
전 55년 생인데 국민학교 5학년인지 6학인지 잘기억이 안나는데 처음 서울로 수학여행 왔어요 신세계 였어요 촌아이가
@별빛하늘-y5l2 жыл бұрын
그래도 저시절에 살아보진 않았지만 현대보다 각박하지도 않고.. 인간의 정들이 살아있고.. 서로 어우러져서 맘은 더 편했으리라 생각됩니다..
@rlaaudtjq2 жыл бұрын
1976년까지 군사독재 시절오 북한보다 GDP가 적었으니, 저 무렵은 밥 굶지않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었을 힘든 시절이었을 듯.
@blackblueswooleechi33652 жыл бұрын
그럼요 지금은 아파트 에리베이터 에서 실수로 옷깃만 건드려도 째프리며 벌레보듯이 쳐다보고 주차장 문제로 이웃과 적이되고 등등 하지만! ...저당시에는 옆집에서 아이가 울면 지금처럼 시끄럽다며 항의하는게 아니라 서로 달려가서 안아주고 달래고! 아랫집에 어르신이 아프면 서로 달려가서 걱정해주고 ... 정말 이랬지요! 당시 생활들이 어렵고 삶은 힘들었지만 사람들의 사는맛 행복지수는 지금보다 훨씬 좋왔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