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도에 롯데어린이 회원 가입하게 된 이유가 박동희 선수 때문이였는데 너무 보고 싶고 그립네요.
@fuadkim2 жыл бұрын
박동희형님. 프로야구 첫데뷔경기 기억이 새롭네요. 몇타자 연속으로 삼진을 잡고 그 다음날 대대적으로 신문1면을 장식했었죠. 당시 캐스터분이 광속구라 칭찬했었는데 그립네요. 롯데 내에선 레전드 선수셨는데...
@moses10042 жыл бұрын
1루쪽에서 직관함..신동수 7회까지인가 간신히 가까스로 무실점으로 막았으나 행운은 여기까지..박동희는 당시 대학생인 조계현보다 더 빠른 스피드로 초초고교급이었으며 고교생 타자들은 거의 볼을 건드리지 못함.문제는 고3 시절에서 스피드나 볼구질의 더 이상의 뚜렷한 발전이 없었다는 점...
@정성원-r8m4 жыл бұрын
박동희 선수가 고려대 1학년 재학시절. 1986년 여름인가, 고려대와 일본 긴끼대 간 친선경기가 동대문야구장에서 있었는 데. 직접 관람했음. 박동희 투수가 내던지는 강속구는 무시무시해서 내 눈에는 보이지 않음. 던지자 마자. 그냥 쿵 하고 포수 미트에 박혀 버림. 당시. 선발 진정필 고려대 투수를 잘도 공략하던 일본 긴끼대 타자들은 중반에 나온 박동희가 내 뿜는 강속구에 모조리 방망이 침묵. 어쩌다가 때려내도 방망이가 밀려서 2루수 땅볼. 고려대가 4대3 승리하였었음. 내가 야구팀 감독이라면 박동희 투수가 정말 탐이 났을 것임.
@keemyungkwankee51714 жыл бұрын
박동희 진정필 모두 그립네요 ㅠㅠ
@fcpark9544 жыл бұрын
지금은 고인이 되신 故박동희 선수 영상 잘봤습니다.
@화이쌤4 жыл бұрын
유수호캐스터님..목소리 너무 반갑네요^^
@형이야-k6h4 жыл бұрын
예전에 노모가 박동희 선수 공보고 "한국에 저렇게 빠른공을 던지는 선수가 있나?" 라고 했죠...
@사과아삭-s7j5 ай бұрын
하일성위원님 유수호캐스터 오륙도특급 박동희선수 그 시절 추억에 잠시 빠져봅니다
@장오마르3 жыл бұрын
박동희 선수의 넘버가 21번인데 그건 아버지 이름이 박두일씨이어서 프로에서도 21번을 달고 뛰었습니다
@차은강-d4j3 жыл бұрын
슈퍼베이비 박동희선수 정말 팬이었는데... 그립네요.ㅜㅜ
@튜브다-y9p8 ай бұрын
투구폼이 너무 유연하고, 편하게 던지는데 공끝이 살아있고 속도도 빠르네요. 신기함!~
@mcpark76463 жыл бұрын
귀한 영상
@pump6th3 жыл бұрын
7회까지는 캐스터가 하이라이트용으로 혼자 중계했군요,그 이후 자막처럼 정규방송시작하니까 하일성 합류 ㅋㅋ
@brk58104 жыл бұрын
유수호 아나운서는 저때나 지금이나 목소리가 차이가 없네요. 고 박동희 선수 아마때는 참 좋았는데, 변화구가 제대로 된게 없어서 프로에서는 꽃피지 못한게 정말 아쉽네요.
@transcontinental46643 жыл бұрын
박동희, 1년 선배. 바람 빠진 축구공 가지고 운동장 한 켠에서 노는데, 투수라 따로 운동하던 그가 " 줘봐" 하더니, 농구 골대 반대편에서 던져 림 안으로 넣었다. "컨트롤이 좋아야지" 라던 그 모습. 40년 전 기억. 투구 폼과 변화구가 정체되어 육체의 재능을 못 살린 것은 너무 안타깝다. 한 재능이 너무 뛰어나면 다른 재능을 고민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은 다 같아 보인다. 일부 예외가 최고의 인간이 되는 것이고. RIP!
@rere58613 жыл бұрын
농구를 했으면 허재는 갖고 놀았겠네. 그러게 농구선수가 공 빠르다고 무작정 투수하면 박동희 같이 되는거야.
@액션박3 жыл бұрын
롯데자이언츠 최고 박동희,최동원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이먼-f9t4 жыл бұрын
광주상고 신 동수 선수도 대단했었군요. 그러니 고졸로 해태타이거즈도 들어갔을테죠?
@뱅커맨4 жыл бұрын
저위에 박동희선배는 고인이 되셨고 레프트를 보셨던 조재영 선배도 고인이 되셨습니다
@안재혁-h3c4 жыл бұрын
중계하던 하일성 씨도...
@alscjf10203 жыл бұрын
저 조재영이라는 사람 KBO 홈피에 이름이 등록 안돼있는걸 보니 프로엔 지명을 못받은거 같군요. 그나저나 조재영이라는 사람 언제 돌아가신 겁니까?
@무구마가3 жыл бұрын
@@alscjf1020 대학졸업하고 심장마비로 돌아가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5tu7fwm4 жыл бұрын
2:30 잔디가 무슨 졍글이냐...
@kenpark74273 жыл бұрын
던지는 폼이 감탄사가 절로 나오네요. 스로잉이 너무 빨라서 보면서 놀랬어요.
@쉐필드99 Жыл бұрын
박동희선수 고등학교시덜 폼이 굉장히 좋았네요
@Alex-v1i3t4 жыл бұрын
우리나라도 고교야구 인기가 일본 고시엔 못지않았는데
@rere58613 жыл бұрын
뻥치지마. 그리고 고시엔은 경기장 이름이지 원래 이름은 전일본고교야구대회야.
@오영학-y1s3 жыл бұрын
당시에 신동수투수도 굉장히 잘던졌네요.그래서 훗날 프로에 가서 해태왕조 건설에 한 몫을 했었지요^^
@dehwankim22693 жыл бұрын
근데 볼이 가벼워서 대성은 못함..
@rere58613 жыл бұрын
@@dehwankim2269 저당시 조계현 이강철 이광우 트리오에 기존 말뚝인 선퉁, 김정수, 문희수, 이상윤도 있는데 멀 어쩌지? 그래도 양현종 이전 타이거즈의 가장 쓸만한 왼손.
@salut37197 ай бұрын
@@rere5861 맞아요..충분히 한축을 해 낸 기여도 높은 훌륭한 투수였습니다.
@normaltv51502 жыл бұрын
신동수 선수 해태의 투수 5인방중 한명으로 알고있는데 역시 잘하네요
@EM-rg9vb4 жыл бұрын
신동수도 잘던지네. 박동희는 88올림픽때 시범종목이던 야구에서 한국 에이스로 그때 강속구는 잊혀지지 않네. 롯데 갈거라 해서 부러워 했었는데
@appetite42144 жыл бұрын
박동희 선수 최전성기는 고려대2학년. 비공인 158k미터 기록. 3학년부터 고려대와 국대 혹사로인해 부상등으로 구위가조금씩 딸어지더니, 프로3년차때 장티푸스로 6개월 공백 후로 구속이 140k후반대 95년부터 140k중반으로 갈수록 구위가 딸어지며97년 삼성 트레이드후 평범한 투수로 대학2학년때 애틀란타 스카웃 제의때 미국 갔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이정환-x7p3 жыл бұрын
하체를 이용하지 않고 상체에 너무 의존하는 투구폼이라 제구가 흔들리기 쉽고 무엇보다 시간이 갈수록 몸에 무리가 갔습니다. 잔부상이 늘면서 구속이 떨어졌고 별다른 변화구도 없어서 점점 구위로는 프로에서 버티기 힘들었죠.
@keyyc84884 жыл бұрын
박동희선수 그립네요..ㅠ
@NitroC_theArtist9 ай бұрын
지금까지 내가 롯데에서 가장 좋아하는 투수 박동희, 그와 별개로 저때 부산고 유격수 잘하네 숏스탑!!!
@뱅커맨4 жыл бұрын
소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85년도 청룡기 부산고 인천고 4강전은 볼수없을까요
@부산기능의학병원4 жыл бұрын
당시에는 거의 결승전만 중계했습니다. 참고로 91년 화랑대기 야구 대회 결승전은 아예 중계도 하지 않았죠. 그래서 박찬호 공주고 시절 동영상은 아예 없는 것으로 압니다.
@돼지고양이-p5w3 жыл бұрын
해태타이거즈 신동수투수 ㅋ 이분 정말 잘하셨는데 박동희투수가 언터쳐블이라 뭍히네
@해모수-s1s6 ай бұрын
박동희 투수 옛날 일본에서 한일 슈퍼게임 1차전 선발 투수로 나와서 구속 150 나오니 방송에서 (아마 일본이 제작해서 송출한것 같음) 150 숫자를 강조했던 기억이 납니다.
@야무영웅5 ай бұрын
그거 일본이 6경기중 2경기 올스타나오고 3차전부터 븅신들 나오는데 1차전선발예정 선동얼 갑자기 발삐엇다고 등판거부해서 박동희 등판해서 쳐맞 ㅋ
@itsnotexist3 ай бұрын
유수호 아저씨 목소리 엄청 젊으셔 ㅋㅋㅋ
@스퐁-o1r3 жыл бұрын
01:43 볼 실화냐
@귀여운필포든2 жыл бұрын
이때나 지금이나 심판은 항상 병ㅅ이구만 진짜 ㅋㅋㅋ
@victor-wt2qr3 жыл бұрын
단과전문 대일학원 보이네...! 서울역 동자동 에 있던 학원...! 재수시절 공부하기 싫을때 1호선 서울역에서 전철타고 동대문에서 내려서 고교야구 대학야구 실업야구 보던거 기억나네 예선전은 09시부터 3경기 야구 실컷보고 외야에서 혼자 도시락 까먹고 시간 맞춰 집으로 가고.....! 34년전 일이구나......!
@상승곡선-h6x7 ай бұрын
지금은 잘살고 있소?
@zhuan5050 Жыл бұрын
1:07 신동수 투수 (광주 상고 당시) 커브 예리함. 박동희 대 신동수 투수.
@일동반장4 жыл бұрын
92년 봉황대기도 보고 싶습니다~ 그때 배명고 야구부 대단했는데 ㅎㅎ
@Alex-v1i3t4 жыл бұрын
김동주가 투타에서 엄청나게 활약했죠
@일동반장4 жыл бұрын
민영규 전 김동주 선수보다 당시 투수 였던 이경필 선수랑 노장진?노상진? 선수가 기억에 남아요~~
@Alex-v1i3t4 жыл бұрын
@@일동반장 노상진선수죠 노장진은 공주고 박찬호 1년후배죠 노상진선수도 기억나네요
@일동반장4 жыл бұрын
민영규 노상진 선수는 한화에서도 바로 은퇴한가로 알고 있어요~
@summit8848-l1f4 жыл бұрын
노장진입니다 선린상고와의 결승전을 4대0 노히트노런승
@Khoon-u6i3 жыл бұрын
내맘의 에이스 박동희 ㅠㅠ
@ramoncota45062 жыл бұрын
박동희... 프로입단하기 이전부터 최동원,선동렬을 분명히 능가할 투수라고 많은 이들이 이야기 했었는데, 아마시절 혹사 때문이라는 말도 있지만 , 최동원,선동렬도 혹사 당한건 더하면 더했지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결국엔 박동희 스스로 다소 자만했던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강력한 직구 외에는 변화구 제구도 안되고 ... 결국엔 자기개발에 다소 게을렀던건 아닌었는지.... 어쨌든 나도 박동희 팬이었지만 참 아쉬움이 많이 남는 선수다.
@yjavert93504 жыл бұрын
부산고 유격수 엄청 잘하는데?
@정성현-p3w4 жыл бұрын
부산고선수들은 부유해네요 전부야구장갑끼고 나오는데 광주상고선수들은 목장갑끼고 나오는 선수들도 있네요ㅋㅋ
@leopardleopard66644 жыл бұрын
부산고가 지방고 중 서울대 가장 많이 간 명문이라 80 90년대 야구부 지원 빵빵했음 그러나 고교평준화 후 가장 폭망한 학교가 되어 요즘 예전만큼 지원 안되는거로 앎
'부산고가지방고중서울대가장많이간'이란 대목에서 빵터짐! 특히 경남고동문이 젤 많이 빵터짐!
@rere58613 жыл бұрын
@@leopardleopard6664 경북고와 광주일고에 비하면 조빱이지. 왜냐면 갱남고나 마산고 진주고랑 나눠 갔거덩.
@권오준-i4h7 ай бұрын
부산고 이종택 선수 대선수가 될줄 알았는데 아쉬운 선수였죠
@옹달샘-j7t3 жыл бұрын
해운동 횟집 운영하다 몇년전 교통사고로 하늘나라로 박동희ㅡ.
@남우태-g3w4 жыл бұрын
저시대 150이면 지금의 160넘는 경우인데 저걸 고등학생들이 친다는거 거의 불가능합니다. 저시대 프로에서도 선발.중간통털어도 150던지는투수 한두명 있을까? 선동열 제외하면 없다고보면 되죠.그만큼 한국야구의 수준이 낮았다는 방증이지요. 근데 저시대에 평균 150을 던지는 투수가 나왔으니 얼마나 기대가 컷을까요? 근데 그놈의 혹사는 어딜가나 문제가 됬지요
@dehwankim22693 жыл бұрын
최동원도 프로에서 전성기보다 두수 정도 떨어진 상태에서 150넘게 던졌는데요? 80년대에 시속 150이면 지금 속도계로는 165에서 170 정도 찍히는데.. 저때 시속 140이 지금 속도계로 155정도 찍힌다는 사실은 모르셨나요?
당시 아디다스 수입사가 제우교역이라는 부산 기반 회사였지. 저 때 유명 스포츠브랜드는 대부분 울 나라 부산에서 OEM으로 만들었다,
@soridaizin79 Жыл бұрын
@@rere5861 나이키도 부산 기업에서 OEM으로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그 회사에서 만든 독자브랜드가 르카프였죠
@상승곡선-h6x7 ай бұрын
@@soridaizin79 화승
@박용진-f5u6 ай бұрын
과거엔 지금 선수들에 비해 체격이 휠씬 적고 깡 말랐네요.
@jinseoksohn9175 ай бұрын
운동량에 비해 먹는게 부실했습니다..그리고 쌀의 품질도 떨어져서 점심 먹은지 얼마 안되서 금방 배가 꺼짐
@참말꾼4 жыл бұрын
고교야구가 예전처럼 3만관중이 운집하는 열기가 되살아 났으면 합니다.
@rere58613 жыл бұрын
고교야구 선수 다합쳐도 3000명도 안되는데 무슨 3만 관중?
@장똘뱅이-d8q2 жыл бұрын
코루나먼저ㅜㅜ
@smilebird-fs5ou5 ай бұрын
박동희 그립다 😊
@철골철근콘크리트6 ай бұрын
사람좋고 재능있는 국보급이될수있는 선수였는데 술을 너무좋아해서 그렇게되지못했지만은 참 사람좋았음
@jinseoksohn9175 ай бұрын
유수호 아나운서는 배구 중계도 하고 야구 중계도 했군요
@disastermoon124 жыл бұрын
그라운드 상태가 ㄷㄷㄷ 내야수비 가능한가
@동훈서-r7q3 жыл бұрын
키와 몸들이 하나같이 좋네요 지금 선수들은 작은거 갔네요
@loj87314 жыл бұрын
언터처블 박동희. 당시 여름방학이라 결승전 직관했었는데....
@zhuan5050 Жыл бұрын
2:23 당시 서울 동대문 야구장...잔디 보소 ㅋ ... 길게 자라고, 흙도 있고.
@koleanan10014 жыл бұрын
박동희가 프로선수 초반기에 혹사만 안당했으면 더 잘나갔을거란 아쉬움이 듭니다. 롯데가 92년 한국시리즈 우승한 이유는 강모씨가 박동희를 혹사시켰기 때문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됩니다.
@edwardkoo23914 жыл бұрын
강모씨는 빙그레 김모씨와 함께 프로야구 초창기 혹사의 대명사지요... 최동원 선수도 그래서 코리안시리즈 우승한 뒤 갑자기 구위가 떨어진거구요.
@leopardleopard66644 жыл бұрын
대학때 혹사로 몸이 상한 상태에서 계약금 실랑이로 팀에 늦게 합류 훈련도 부족했는데 시즌 개막 맞춰 급 페이스를 올린게 화근 데뷔전 화려하게 장식하고 몇 경기 무리한게 고질적 부상 재벌하는 계기가 됨 롯데 전력 나아진 91년에만 데뷔했어도 신인때 어느 정도 관리 받으며 프로에 적응했을텐데
@박용준-c8i3 жыл бұрын
염종석이도 92년후에 망가짐..ㅠ 혹사ㅠㅠㅠㅠ
@koleanan10013 жыл бұрын
@@박용준-c8i 염종석이 박찬호와 동갑이라서 그런지 혹사가 너무 아쉽습니다.
@rere58613 жыл бұрын
아니, 쓸만한 공을 던져야 혹사라도 하지. 다 포수 뒤 너머 홈런볼만 던졌는데 뭐.
@얘가쉐프4 жыл бұрын
5:25슈퍼맨 날아감
@양비홍2 жыл бұрын
대단한 투수전 라디오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에클레시아-e8i2 жыл бұрын
우리 사촌형 광주상고 다녔는데 서울로 응원도 못가고 집에서 신동수,김남국 응원했는데 아마1986년 인것 같은데요
@케이케이-o5b4 жыл бұрын
98년 대통령배 영상 읍나요
@추추공3 жыл бұрын
끝난게임 이지요 . 연장전에 들어가서 중계가 끊어지고 케이블로 넘어갔는데 당시 케이블 가입자가 얼마 없어서 찾기가 힘들겁니다
@몽키스패너즈4 жыл бұрын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 실업야구 시절에는 고교야구도 인기가 좋았다고는 들었는데 이때만 해도 관중 참 많네요
@mishaj13624 жыл бұрын
실업야구보다 되려 고교야구가 더 핫했습니다. ^^
@kingqueen47594 жыл бұрын
프로야구이전에 고교야구는 국민스포츠였음
@salut37194 жыл бұрын
고교야구'도'가 아니라 고교야구가 전체스포츠 1위였슴다. 복싱이나 월드컵 같은거 빼고..
@rere58613 жыл бұрын
그 때 노래방이 있었냐 피씨방이 있었냐 스크린골프가 있었냐 집집마다 차가 있었냐 100채널 넘는 유선방송이 있었냐. 효창구장의 투견도 만원사례였다.
@아폴로파더2 жыл бұрын
@@salut3719 축구 월드컵 본선 진출 허구한날 좌절되던 시기라 게다가 4년에 한번씩 해서 봄여름가을로 하는 고교야구가 70년대초반부터80년대초반까지 국민스포츠.
@구름이-j6s4 жыл бұрын
동대문 야구장 리모델링 해서 유지했어도 되었을건데
@마실고고4 жыл бұрын
저긴 잠실같은데~
@Alex-v1i3t3 жыл бұрын
잠실아니라 동대문 맞구요 저 자리에 DDP 말고 거지같은 고척돔말고 도쿄돔을 능가하는 돔구장을 지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rere58613 жыл бұрын
@@Alex-v1i3t 위정자들이 야구장 따위 지어줄까?
@허리케인-d6t4 жыл бұрын
신동수가 고딩 ~~ 저게 언제영상?
@정의사도-b3m Жыл бұрын
박동희 선수 정말안타깝네요
@jacob.j37404 жыл бұрын
와 당시 부산고 킷 스폰서 무려 아디다스 ㄷㄷㄷ
@조조-k1g3w4 жыл бұрын
저 당시는 부모님들 재력이 유니폼을 결정하쥬~~
@호호호-k1s3 жыл бұрын
@@조조-k1g3w 일단 부산고 동문이 빵빵함.
@dehwankim22693 жыл бұрын
@@조조-k1g3w 저당시는 가난한 애들이 주로 운동을 했던 시절임..지금은 돈이 있어야 야구함..
@rere58613 жыл бұрын
신발은 슈퍼카미트. 컨버스와 디아도라 합성. 실제 부산의 대양고무가 당시 두 브랜드 하청업체였음.
@zeus-qz8tj6 ай бұрын
예전에는 고딩들도 아저씨 같네 ㅎ😂 점점 애기들로 바뀜 ㅎ
@마포왕자3 жыл бұрын
동희형 보고싶네 ㅠㅠ
@moonchangminmcrp4 жыл бұрын
요즘 고교선수들보면 눈밑 보호테이프. 팔꿈치.발목보호대까지는 이해가지만 건강목걸이 등 불필요하게 많이 착용하는 모습이 고등학생처럼 안보이고 그저 프로선수 흉내내는것 처럼 보입니다
@rere58613 жыл бұрын
야구만 잘하니까 틀딱은 오지랍 고만 뻗어라. 남이사 조방망이에 다마를 박던.
@kim4766aass4 жыл бұрын
전문 캐스터 90년대
@mishaj13624 жыл бұрын
세상에.. 그래도 봉황대기면 당대 가장 큰 대회였는데.. 대통령배-청룡기-봉황기-황금사자기.. 그 중 봉황기 대회가 가장 전국적으로 큰 대회인데. 그 결승전 뒷부분 자료가 유실되었다니.. 덜덜..
@rere58613 жыл бұрын
최초의 영화 아리랑은 아예 통으로 유실되서 없어.
@chaosgogogo3 жыл бұрын
선수 개개인 다 쎄보이네요 ㄷㄷㄷㄷ겉멋만 든 지금 선수들하고 눈빛부터 다름
@user-lf8rf1uk3m4 жыл бұрын
최동원 박동희 롯데팬들한테는 아픈 손가락~
@황순일-d6d3 жыл бұрын
불운의 에이스 신동수..
@cc-xn3mf3 жыл бұрын
혹시 박동희 선수 영면하고 계신곳 어딘지 아시는분 있나요?
@상승곡선-h6x7 ай бұрын
부산 반송 실로암 공원묘지 납골당
@딱피디-y9r3 жыл бұрын
프로선수 출신이 거의 안보이네요..박동희랑 해태 신동수투수 빼고 타자는 거의 전멸같은데..
@도고산-m6x10 күн бұрын
그 이후 박동희 투수는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 동아대의 치열한 스카우트 갱쟁속에 결국 고려대로 진학을 결정한다.
@광영김-d7w2 ай бұрын
해태 신동수 투수가 그시절엔 상고 타자 였어군😊
@투더리-k1b2 жыл бұрын
동대문 야구장은 남겨서 야구의 성지로 만들었어야...
@훈-y1eАй бұрын
극공감, 한국 고교야구, 아마야구,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 코리안시리즈의 역사를 품은 곳을 서울시가 날려버렸죠.
@최정준-v7e4 жыл бұрын
고등학생맞나요?
@jwl37867 ай бұрын
우익수 이종택 당시 타격천재로 불렸지..광주상고 포수 기영록은 예선에서 도루저지 끝내줬죠..신동수 좌완 고교랭킹 1위인데 결승에서 박동희에 가려.
@junisung86074 жыл бұрын
와~~~고교야구 관중봐
@아침누리-w9r3 жыл бұрын
아니...고3 애들이 30먹은 아재들이여???? ㅋㅋㅋㅋㅋㅋ
@sanrie-TV3 жыл бұрын
저시대엔 정말 고교야구 인기 많았는데... 요즘은 볼게 너무 많아져서,,,,아쉽....
@dehwankim22693 жыл бұрын
저때는 농구, 배구 인기도 최전성기였고 프로 축구도 지금 보다는 훨씬 인기가 좋았던 시절임...저때가 볼게 많았죠..저때는 라디오도 좋은 프로가 많았던 시절인데 지금은 정말 볼게 없음..국뽕 유튜브는 뇌가 없는 애들이 보는거고 ㅋㅋ
@hmk41014 жыл бұрын
중고등학교 시절 주로 라디오로 중계 많이들었는더 라디오가 휠 박진감 있었지요
@정의맨-f6f3 ай бұрын
고인이 되신 김재영 아나운서 중계는 긴장감 최고였지요. "숏 오버 렙트 앞에 안타~아. 세칸란나 서드 돌아 그대로 홈이~인. 한점 선취하는 선린상업고등학교. 떠나갈듯한 서울운동장야구장. 3만 관중입니다." 이렇게 풍규명 어르신과 중계하던 멘트가 생각나네요
@황순일-d6d3 жыл бұрын
하일성 어디서 뭐하다 7회에 중계에 합류했냐 ㅋ
@아리송-t9f3 жыл бұрын
비쥬얼 보소 30대라해도 믿을듯
@고기집스님3 ай бұрын
진짜 스트라익 판정 부터 심판들 자질이 개판이구만
@정성원-r8m4 жыл бұрын
저때 고등학교 야구 선수들은 훈련과 연습을 지독하게 해서 몸들이 다들 날씬합니다. 얼굴도 햇볕에 타고 얼굴도 홀쭉하고.... 흡사 지금의 북한군 모습 처럼.... 지금 고등학교 야구 선수들은 잘 먹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많이 해서인 지, 다들 근육량도 많고 특히 다리들이 튼실하던데.... 박동희 투수도 야리야리하니 날씬하고, 내려품는 강속구에 광주상고 타자들이 제대로 공략 못 하네요. 참으로 안타까운 선수. 박동희. 좀만 더 다듬고 훈련 했으면 선동열 최동원 못지 않은 투수가 되었을 텐데....
@pariszidane4 жыл бұрын
박동희 여리여리하네!! 그리고 저 신동수가 해태 신동수 인가요?
@Alex-v1i3t4 жыл бұрын
해태 신동수입니다
@강철-b8w4 жыл бұрын
신동수 1993년 말에 한대화, 허문회(롯데 감독)와 함께 LG로 넘어가죠. 대신 해태로 온 선수가 김상훈, 이병훈.
@박성준-h7u3 жыл бұрын
우리때는 박동희는 선동열급이였음
@rere58613 жыл бұрын
우리 때는 선동렬이 놀란 라이언급이었다.
@상승곡선-h6x7 ай бұрын
우리때는 장효조가 세상에서 젤 잘 치는 선수인줄 알았다
@한숨맨4 жыл бұрын
요즘은 야구중계가 재미가 없지, 예전에는 라디오를 들어도 재미가 넘쳤는데. 애들이 야구중게를 잡담하듯이 하니 재미가 없다.
@you_04264 жыл бұрын
운동만해서그런지 다즐 까맣게탔네
@urscjogvkmvyh4 жыл бұрын
약장수, 사키꾼 스타일 ㅋㅋㅋ
@grandslam56354 жыл бұрын
박동희 형님 저때 내가 중학생인데 81년 선동열보다 확실히 우위였는데 어쩌다가ㅜㅜ 별 실력도 없는것들이 감독이네 투코네 하며 자기 고유 폼과 멘탈을 무너뜨린게 틀림없다. 저때 왜 관중이 많냐하면 지금 고교야구보다 훨씬 잘했거든. 140 중반 이상 찍고 계약금 많이 받는 돈의 시절은 아니였거든.
@gulsuzer48023 жыл бұрын
프로 때 투구폼은 일본인 투수코치가 잡은 걸로 알고 있어요. 속도가 좀 줄더라도 제구력을 잡는 쪽으로 투구폼을 바꿨다고 아마 하일성씨 같은데 해설중에 그런 얘기를 했죠. 그런데 투구폼 바꿨어도 150이상 던졌으니 그리고 롯데 담당하던 기자 형이 그러는데 박동희가 마음이 좀 여린 편이었다고 하더군요.
@김병욱-o3v3 жыл бұрын
'선동열보다확실히우위'라는 대목에 빵터짐!
@rere58613 жыл бұрын
넌 중딩 때 허구연 민훈기를 능가하는 야구 존문가였구나.
@아니아니그기아이고3 жыл бұрын
술이 망친 대표선수.. 그래서 롯팬은 선수가 술마셨다면 극대노!! 잘나갈 선수가 술로 망가지는 건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깐.
@Na_ma23 жыл бұрын
애들이 못먹고 야구했나? 죄다 비쩍 말랐노ㅋㅋ
@최민광-i1k4 жыл бұрын
90년 초등학교 2학년때 슈퍼베이비 박동희 아 시절이 많이 흘렀네요.. 소백산맥 라이벌 선동렬 박동희 시절도 잠시나마 있었는데, 열혈 베이스볼 키즈시절 첫 영웅
@rere58613 жыл бұрын
박동희는 선동렬의 라이벌이 아니라 걍 고대 후배 꼬꼬마였다. 소백산맥 라이벌? 지나가는 소가 웃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