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당시 고교야구의 인기는 지금의 프로야구를 능가하는 수준으로 경기후 승리팀 교가를 틀어주고 선수들이 도열해서 관중들과 함께 모교의 교가를 부르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승리의 기쁨과 애교심을 함께 누리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고교야구의 인기와 관심이 떨어지고 지금은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일본은 고교야구의 인기가 프로야구 못지않고 지금도 승리팀 교가를 틀어주고 선수들이 도열해서 관중들과 함께 교가를 부르는 모습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이런 인기와 관심이 일본의 야구의 저력인것을 생각하면 우리도 고교야구에 대한 큰 관심과 지원이 뒷받침 되면 좋겠습니다.
@user-pf9uh4vf1k3 жыл бұрын
조계현 우승후인데도 피칭 모션! 저렇게 노력 했으니 훗날 팔색조 투수로2년연속 프로야구 다승왕을 했겠지!
@user-ck9gg8bu5o3 жыл бұрын
이 멤버들도 일본에서 세월만큼 뿔뿔이.. 수십년만에 서로 재회하며 추억의 회식담소. 단체로 고국, 잠실 야구장 재 방문. 재밌게 봤지요. 기억하는 중장년층 야구팬들 보면 뭉클함. 비가와서 결승전 하루 건너 뛴 기억이 정확한가 ? 처음부터 고국방문한 인솔 팀 단장님 인터뷰중 8년전 대구상고 장효조 기억하며 칭찬으로 언급한게 인상깊게 기억이 난다. 나는 당시 17세. 중계봤음. 16강인가 8강인가 서울운동장 경남고전은 직관. 양시철도. 잠실구장 4강전 충암고라고 왜 생각날까 ? 다른팀인가 ? 내 기억으론 야무진 타선으로 기억되는 충암고같은데~ 센터와 우중간 가르는 팬스앞 떨어지는 타구 충암고 중견수 몸을날려 시도했지만 빠지는타구 스포츠뉴스에 영상으로 나왔던 충암고 전력이면 재일동포에 근소하게라도 나도 전문가들도 승리 예상했던 의외의 충암고 패배가 무척 아쉬웠던 기억.
@user-ws9zo8fx2z3 жыл бұрын
장호익 조계현과 전설의 배터리로 군산상고 부흥기를 이끈..
@user-qw5mi3zh7k3 жыл бұрын
조계현 1학년 대통령배 영상있으면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계현선수가 1학년 대단한선수임
@user-cg8ty3zu6d3 жыл бұрын
재일동포팀은 국내고교 대회에참가는 몇번 안되지만 60년대부터 여름방학때 한국을 방문해 국내고교팀들과 수차례 경기를 가지므로 한국고교야구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중에 김성근 선수은 훗날 한국야구발전에 큰공로를 했다. 재일동포외에도 선교목적의 미국 빅토리아팀이 전국을 순회하며 국내 실업팀과 대학팀과 경기를 했다. 군상상고의 전성기는 70년초 김봉연 나창기 송상복 김일권같은 선수를 중심으로 우승하며 강호로 등장했다. 감봉연은 처음엔 투수였으나 타격에 재질을 보여 국가대표4번타자까지 했고 스마일투수라는 별칭을 가진 언더드로우의 송상복이 많은 인기를얻으며 활약했다.
@user-ro5wn1mo9e Жыл бұрын
宋相福선수도 군산에서 살고있어요 군산시의원도 역임했어요
@TalkativeStation3 жыл бұрын
작년에 한국에 갔을때 군산에 가봤지만 그 작은 타운에 야구 인구도 별로 없을텐데 이런 야구 명문고가 나왔다는게 정말 amazing! 대단하다고 느꼈다!
@chaecrimson15123 жыл бұрын
군산상고가 한창 일때 군산시민이 12만 명 정도였어요.
@TalkativeStation3 жыл бұрын
@@chaecrimson1512 와 그 인구에서... 정말 대단하네요. 지금은 좀 더 늘어났겠죠?
@user-li2zw5xz5p Жыл бұрын
군산. 일제강점기에 폭발적으로 발전했다가, 오래 낙후된 도심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 곳. 1970년대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가, 1990년대 이후 인구는 줄고 젊은이들은 떠나가고 제조업체들도 떠나고 늙고 쇠퇴해가는 도시.
@TalkativeStation Жыл бұрын
@@user-li2zw5xz5p흠 너무 작고 젊은이들이 살기에는 뭐가 없긴 하더라구요.. 무엇보다 버스가 한시간씩 기다려야 오는게 너무 불편했음..
@user-li2zw5xz5p Жыл бұрын
@@TalkativeStation 네. 개인적으로 몇번 군산 여행 했었는데, 도시가 너무 낡고 딱히 갈 곳도 없고 생기를 잃었더라구요. 2000년대 초반에 윤락가에서 화재 나서 여성들이 애꿎게 죽어나갔던.... 와이프와 몇번 같이 군산 여행 갔었는 데, 와이프는 칙칙하고 낡고 좁고 쓰러져가는 군산이 너무 싫답니다.
@user-mk9rm1rp2c2 жыл бұрын
팔색조 조계현...참 대단했죠..
@user-xo4px5dk9u3 жыл бұрын
이 경기 정말 보고싶었는데 양시철선수 반갑네요
@user-nt9bp2ky2n3 жыл бұрын
캐스터양반 재일동포도 우리민족 입니다.
@sanmicheal67542 жыл бұрын
재중동포는요? 😆😚☺
@keemyungkwankee51713 жыл бұрын
이동석 선수 나중에 빙그레로 가서 해태 상대로 노히트도 기록했었는뎅...이 당시에는 안습 ㅠㅠ
@user-zs7eb5uc9r Жыл бұрын
노히트할때 상대투수가 선동열 ㅋㅋㅋㅋ
@user-sw6lm4dl7g3 жыл бұрын
재일동포팀이 봉황대기만 참가했는데 편파 판정을 많이 당해서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하죠. 여름에 어렵게 선수들을 모은건데.
@user-nn7lr6uo3w3 жыл бұрын
공감입니다 정도영 캐스터 멘트 저런사람이 공영방송 아나운서였다니
@user-sw6lm4dl7g3 жыл бұрын
@@user-nn7lr6uo3w 봉황대기가 여름방학에 열러서 재일동포도 참여했는데, 이 팀이 각 학교 선수들을 모은 팀이라 경기를 하면 할수록 잘하는데, 1차, 2차전에서 심판판정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죠. 당시에는 4강가면 대학진학이라는 혜택이 있어서 암묵적으로 따돌렸고 스포츠 신문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나왔죠. 캐스터만이라도 공정하게 진행했으면 하는데. 아쉽죠.
@user-pf9uh4vf1k3 жыл бұрын
저당시 조계현은 전라의 영웅이 아니라 한국 고교 야구의 영웅 이었다! 사실 고교 야구당시에는 선동렬 보다 더 스타였고 활약했었다! 박노준이 고교야구에서는 최고의 슈퍼스타였고 그다음이 조계현이었다!
@@user-bn4ho4tn8k 이광우,정대현,정명원,이승호,차우찬 박종철,원종현,조종슈,김우근,김성한,김상현,이진영,신경현,이대수,문규현,등 프로,국가대표에서 맹 활약한 좋은 투수,타자들도 군산상고 출신이죠
@unglee78513 жыл бұрын
저때 내 기억으로는 제일동포선수단에서 투수를 처음부터 1명밖에 데려오지 않아서 기대도 안했는데 결승전까지 갔던 경기였던거 같아요
@user-su9uy5pz6z3 жыл бұрын
저선수들 이름 지금도 생생하다. 저당시 군산상고는 5개 대회 우승이 목표 ~ 구수갑이가 일본가서 조계현 연일 완투로 어깨 고장~~ 사실상 선수 생명끝, 구수갑이 가을 대회에서 우승 이동석 조기 교체(강판아님)로 조계현도 매경기 7~8 회 던짐, 조계현 혹사로, 교교야구 투수 이닝 제한이 도임됨
@user-sf8sh6eq3g Жыл бұрын
趙啓顯선수의 말씀에 의하면 혹사는 고1때부터 혹사가 되었다는 이야기을 하더군요
@user-rz3br8tf1h3 жыл бұрын
4:25초에 나오는 타자분은 일반목장갑을 끼고 타석에 올라왔네요~
@user-zt4iy2su5j3 жыл бұрын
우와 조계현 대단했구나
@user-xo4px5dk9u3 жыл бұрын
군산상고 말고도 한일 고교대항에서도 거의 던지다시피했죠 그렇게 혹사하고도 프로에서도 활약한게 경이로울 정도죠
@hschoi55733 жыл бұрын
사실 봉황대기 결승전은 1981년 경북고 對 선린상고의 경기가 지금까지 전설로 남아있지요. 박노준 선수가 홈에서 부상 당하는...... 귀한 영상을 부탁드려 봅니다.
@user-cg8ty3zu6d3 жыл бұрын
양시철선수도 대단하지만 1973년 배재고의 이광은 투수는 전설적인 선수였다. 청룡기대회에서 5경기 59이닝 223타자 공697개 투구 32피안타 7실점. 방어율 1.07을 기록했다. 연장전을 4차례(12회,13회,20회,15회)를 치른 역대급 역투로 전설로 남았다 . 중앙고와 경기는 0:0
당시의 고교야구를 위해 노력했던 장훈씨에게도 고마움을 표합니다. 프로야구가 어떠한 동기로 창설이 되었던 밑거름이 되어 주었던 분이 고국의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가장 노력해 준분이죠. 재일동포를 위안해 주었던 분. 건강하세요.
@user-fj3wh7kn8c3 жыл бұрын
ㅍㅎㅎ 5게임 완투인데 별거 아니란다 저시절 선수들이 얼마나 노예처럼 혹사 당했는지 알겠다 ㅠㅠ
@bighole91363 жыл бұрын
역대 한국 투수 중에 투심을 가장 잘 던졌던 선수
@moon20783 жыл бұрын
해태 시절 조계현은 진짜 공도 느린데 왜 이렇게 못치는지 짜증나서 보기도 싫었던 선수였는데 두산에 오고 나서는 진짜 너무 좋아했던 선수.....은퇴가 훨씬 빨랐던 그 시절 30대 중후반에 두산에서 선발진 이끌면서 직구라고 볼 수 있는 공은 하나도 안던지면서 그냥 몽땅 변화구로 이리저리 던지면서 그 느린 공으로 버티는거 보면 ㅋㅋㅋ두산 우승에도 공헌하고 .....우리팀 선수지만 상대 타자들이 저렇게 느린 공을 못치는거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고 ㅋㅋㅋ 코치 생활하면서 보니까 카리스마로 끌고 가는 스타일이 아니라 유하게 선수들 잘 다독이면서 운영하는 스타일이던데, 투구 스타일은 싸움닭이라는 소리 들을 정도로 공격적이었던것도 참 재밌고 ㅎ
@user-uj9rh4gw9c5 ай бұрын
어렵게 찿아주신 재일동포팀 에게 감사드립니다!!!
@user-gg4jp8de4p3 жыл бұрын
이번에는 제대로 올라왔군요. 이렇게 제대로 좀 봅시다.
@talih36103 жыл бұрын
초등학생 시절 본방사수 했던 기억이 납니다🤔그때 조계현 코치님의 피칭은 정말 눈부시다는 말밖에 달리 할말이 없네여🧐해태~기아에서 선수&코치생활을 했던 백인호 코치님의 깔끔한 수비와 화끈한 공격이 인상적이었더랬습니다😅구심의 프로텍터도 프로야구도 같은 형태였지만 지금보니우스꽝스럽네여🤣아쉬운건 조계현 선수의 지나친 혹사와 그때는 못느꼈는데 편파방송과 판정이 지금은 확연하게 느껴지네여🤔같은 민족이고 🇯🇵 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는데 관중들도 그렇고 당시의 교과서 파동으로 반일감정이 있었다지만 성숙한 응원문화가 자꾸만 아쉬움이 남습니다🧐
@user-ro5wn1mo9e3 жыл бұрын
吳仁植선수도 원광대에 진학해서 한국화장품에 입단했지요
@user-ro5wn1mo9e3 жыл бұрын
吳仁植선수가 의리있는친구여 이친구 의리때문에 군산상고에 지도자로써 수명이 짭지요
@user-jv3id6jn3o3 жыл бұрын
혹시 조계현투수의선배였던 김용남투수시절때 김용남투수의공을 받았던 당시 군산상고의포수는 누구였는지???갑자기생각이 안나네요
@user-dj5bs8vr3g2 жыл бұрын
@@user-jv3id6jn3o 김용남 배터리는 신주현감독님 입니다. 제 중학교 감독님이셨는데 그때 김종윤.신주현. 두분은 중앙대 진학 하셨어요.
@@Roksac705 맞아요 충암 초.중.고 12년을 다닌 사람 입니다. 반갑네요. 저때 7회 까지 그대로 막았으면 콜드승 이었는데.
@user-jy2nh1hk8f2 жыл бұрын
재일동포팀이 고교야구대회에서 결승에 오른적인 몇번 있지만 한번도 우승한적이 없었는데, 그 이유중 하나는 재일동포팀이 우승까지 하는걸 바라지 않는 보이지 않는 작용이 있었다고 함.
@wumao73123 жыл бұрын
엇그제 같은데..............벌써 40년이~
@user-yf6qj6cx7p2 жыл бұрын
벌써 훅지나갔네요 조계현은단장그만두고 풍문으로들으니 교수가되었다하더군요
@minister82075 ай бұрын
군산상고 4번타자 오석환선수는 나중에 프로야구 심판이 되셧었습니다.
@user-co9pq4qf4s3 жыл бұрын
현장에서 봤는데..우익수 뒤에서. 재일동포 중견수가 엄청난 캣치를 했던거 같은데.
@firenickel17003 жыл бұрын
5경기 완투.. 6경기선발...관중 5만...
@gghhhkk241 Жыл бұрын
저 시절 그냥 이기는게 목표였지! 선수가 아프던 말던 운동 인프라가 부족했던 시절.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차츰 좋아짐
@euy15183 жыл бұрын
당시 재일동포를 일본으로 생각했었던듯
@user-ht5eh5yw1t Жыл бұрын
못배워서 그런거임
@onlyway11596 ай бұрын
15:11 학부모 찬스.. 당시에 선출 아버지면 타자나 투수로 1번 타격, 1이닝 투수 기회를 주는 재밌는 규칙이 있었지요
@koei88kr6 ай бұрын
1:39 이때는 잠실야구장 주변이 허화벌판이었네
@lirico41552 жыл бұрын
어렵게 모아서 그래도 고국이라고 찾아와서 참가했는데 편파판정에 일방적응원에 많이 서운했다고 합니다 그때 제가 대학생 형들한테 왜 싫어하냐고 했더니 한국말 못하는 얘들은 일본인이라고 하면서 쟤들 가정교육 잘 못받았다고 욕 하더라구요
@user-bz5xf2kr1s2 жыл бұрын
전경기 완투 슬프네
@won63593 жыл бұрын
조계현과 같은 2학년 내야수였던 한경수 고장량은 동국대 원광대에서도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끝내 프로에 입단하지 않고 실업팀에서 남아서 아쉬었죠... 특히 한경수는 동국대 4학년때 대학리그 26게임에서 18개 홈런으로 괴력의 사나이로 불렸는데 88년 1차지명을 받았지만 무슨 사정인지 자세히 모르겠스나 입단하지 않아서 아쉬었네요..
@CrazyBoyWolf3 жыл бұрын
고장량 선수는 실업팀 농협에 입단하더니 그대로 직원으로 계속 근무중이네요. 지금은 직급 꽤 높음
@@user-xo4px5dk9u 네 1년 선배인 백인호도 동국대 시절 그리 잘했는데도 불구하고 프로에서 단명한거 보면 옳은 선택인지도요.. 백재우도 해태에 86년 지명 당했지만 아마에만 남아서 한경수 고장량처럼 활동하신거 같은데 의외로 프로 입단하지 않은 케이스가 있더군요
@user-ci9ct3jv5e4 ай бұрын
満員ですね。またこのように盛り上がると良いですね
@user-gz4bk4cn9h17 күн бұрын
8회말 3루수 수비미스,... 슬라이드후 일어났을때 태그했어야 양손, 양발 베이스 떨어진 순간..
@user-nt9bp2ky2n3 жыл бұрын
이시절 고교야구는 인기가 요즘 코리안시리즈와 비견할만하다.
@gghhhkk241 Жыл бұрын
더 인기 있엇음~~~~프로야구가 창단되면서 인기하락
@user-rp5gm9xb5i3 жыл бұрын
올릴거면 몇년도 무슨경기인지도 설명에 올려야지
@user-cu3ng4ug5p3 жыл бұрын
그라운드의 이방인 성공했나
@user-su7vq5ww9j2 жыл бұрын
5경기를 완투시켰다는건 감독이 투수한테 원한이 있지않고서는...............
@user-pt3yo7xs1v3 жыл бұрын
타국 경기구나
@user-nd2ff2jv5g3 жыл бұрын
주심도 다오심
@Regango3 жыл бұрын
서울사투리 캐스터 그립네요
@user-fc1yk9oi8g3 жыл бұрын
해설하시는분 정말 수준이....편파중계 말씀이나 연투에 관한 말씀은... 정말 저당시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네요...
@user-ws9zo8fx2z3 жыл бұрын
안타깝다 랩트 뒤뒤 캐스터가 아니네
@user-ws9zo8fx2z3 жыл бұрын
아닌가??맞나 ㅎ
@loj87313 жыл бұрын
동대문 야구장인데 내야에 잔디가 있었네요.....
@user-ro5bh9ks1f2 жыл бұрын
잠실입니다..
@user-yt1xr3gr8k3 жыл бұрын
김의명 선수도 있ㅇㅓ는데 ..
@user-xo4px5dk9u3 жыл бұрын
김의명은 저선수들보다 몇년 선배죠
@user-bn4ho4tn8k3 жыл бұрын
1981년 PL학원릐 김의명 3루수도 잘했고 투수에 4번타자. 당시 한일고교야구대회에서 한국이 3연승 김정수의 역회전볼 당시대단 1차전승리 2차전은 이재홍투수와 조계현 3차전은 기억이 가눌가물^^
@user-cu3ng4ug5p3 жыл бұрын
대학야구는 재일동포 없었나
@user-cg8ty3zu6d3 жыл бұрын
대학야구에는 없었고 미국기독 대학생들로 이루어진선교 야구단 빅토리아팀이 매년 방항해 대학,실업팀과 경기를 가졌음. 60년대 중후반에는 실업리그에 육군,해병대팀도 있었음. 농협,상업은행,제일은행등 금융팀과 군팀간의 선발팀 경기도 있었음.
@user-cu3ng4ug5p3 жыл бұрын
@@user-cg8ty3zu6d 전적은 어느정도
@user-cg8ty3zu6d3 жыл бұрын
@@user-cu3ng4ug5p 빅토리아팀은 방한해 서 매해 약10전 정도 경기를 치뤄 처음엔 8승 정도 했으나 나중엔 5승정도의 승률이였고 무승부 경기는 승패를 가리지 않고 무승부로 처리했음.
@user-cu3ng4ug5p3 жыл бұрын
@@user-cg8ty3zu6d 아 그렇습니까 네네 알겠습니다
@user-nn7lr6uo3w3 жыл бұрын
이양반들 동영상 처음영상과 다르게 정도영캐스트 멘트 삭제 또 조작햇네 나뿐인간들 처음동영상에서 정도영캐스트 일방적 편파방송한다고 대놓고 말한부분 삭제햇구만
@koleanan10012 жыл бұрын
아무래도 정도영씨가 kbs 아나운서들 사이에선 실력과 무관하게 신망이 높기 때문에 그런듯 합니다.
@user-cu3ng4ug5p3 жыл бұрын
대학야구는 인기많았나
@kes77043 жыл бұрын
대학야구는 인기 없었음. 그 당시 언론에 아마추어 야구는 거의 고교야구임
@Since_NineteenSixtyFour7 ай бұрын
고교야구 >>>>넘사>>>> 실업야구 >>거의넘사>> 대학야구 대학야구는 재학생.졸업생들 극소수 말곤 돈 내고 가는 사람 자체가 없었음. 대졸자도 적던 시절 "나와는 무관한" 실업야구는 그래도 국가대표들도 있고 하니 보러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고교야구는 평일도 오후 두 시면 외야까지 꽉 참. 인식 자체가 우리학교는 아니지만 "나와는 밀접"
@user-ft4be9eu7d3 жыл бұрын
천안북일 재일동포전~ 82년 북일고 경북고 북일고 부산고전 볼수 없나요?
@Juanseo703 жыл бұрын
83년 청룡기 4강전 말하나요? 천안북일-부산, 포철공-군산상. 박동희를 앞세운 부산이 유리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부산고 타선이 2년생 김길선과 진정필의 천안북일 마운드에 무려 13개나 스트럭아웃을 먹으면서 부산 1-6 완패. 포철공 대 군산상은 쇼킹했죠. 박상범의 인천고를 12-3 7회 콜드, 대구성광고에 15-3 6회 콜드로 이기고 올라온 포철공이 군산상 조계현을 초토화시키면서 13-4로 대역전승을 거두었죠.
@user-ft4be9eu7d3 жыл бұрын
82년 북일고 안성수 활약을 말합니다
@SS-qf3di2 жыл бұрын
그 유명한 이스턴빠따 등장하네. 스쳐도 안타
@user-nn7lr6uo3w3 жыл бұрын
정도영 캐스터 편파방송 부끄럽죠 당신의 중계수준
@koleanan10012 жыл бұрын
그랬던 정도영이 이규항, 유수호를 밀어내고 kbs 야구중계 1타 캐스터였다는게 이해가 안갑니다. 그양반의 중계스타일을 그대로 답습한 김현태도 평이 안좋고요.
@daejinchoi8533 жыл бұрын
토토파(군산의 학생깡페) 대 군산상고 야구부 군산시청 앞에서 패싸움 이게 당시 상황
@arkadas-kc8dt9 ай бұрын
우승 군산상고 준우승 재일동포 3위 부산상고 4위 광주일고
@user-nd2ff2jv5g3 жыл бұрын
아나운서 편파해설 동포도 대한민국사람 우리동포도
@user-eb3ws4zz9r3 жыл бұрын
저당시 군산상고가 아니었으면 사상최초로 봉황대기 우승을 재일동포에 넘겨줄 판
@hano14613 жыл бұрын
그걸 문제라고 보는시각이 문제
@kim-xp4eq Жыл бұрын
초반 해설자의 관중5만명이란게 당시 고교야구 인기를 실감하네요~~~ 관중이 빼곡하고 서서관람하는사람도 엄청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