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정말 눈물나도록 귀한영상 잘봤습니다 제가 저당시 인천고 야구선수 였습니다 저희는 부산고에게 4강에서 졌구요 혹시라도 인천고 영상도 있을까요 저희는 저때 대툥령배때 결승에서 서울고에게 4:1로 패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런 귀한 영상 올려주셔서감사드립니다 저때 박동희선수도 잘던졌지만 권영일이란 사이드투수도 있었지요
@user-mi8ox1lz3c3 жыл бұрын
인천고 당시 멤버 김경기, 최용철,주경업,주정혁, 최광천,탁명렬,김원근, 정재준 등 혹시 이 멤버에 님이 계시는지요? 인천고는 85년 대통령배 서울고에 1:4로 패해서 준우승했는데요 84년 부진을겪고 85년도에 기대를 했고 투타가 안정됬었조 2020년 봉횡기 결승에서 3:2서울고를 이기고 35년만에 설욕했습니다 당시 제가 준결승전 KBS- TV로 시청 했는데 아쉽게 0:5로 패했습니다 부산고 박동희의 구위에 눌려 산발8안타를 때렸냈습니다 대통렁배 대회에서는 8강전에서 부산고에 2:1승리한바 있었죠 김원근 선수의 솔로홈런이 있었구요(직접관람) MBC 라디오 중계 당시는 부산고 박동희투수가 투구 이닝 제한규정 에 의해 던질수 없었고 권영일 투수가 투구했죠 지금 투수의 투구수 제한 규정이 있듯이 85년도는 5인닝 제한이 있었습니다. 청룡기 1회전 전주고에 6:4승(야간경기) 직관 8강전에서 중앙고에 6:1승 기분좋게 4강에 진출했었죠 이후 청롱기는35년이 지났지만 아직4강에 진출하지 못한것으로 압니다, 4강전이었는데 KBS스포츠국에 직접 문의하시면 답을 얻을수 있는데 .... 저두 가끔식 70.80년대 고교야구 특히 인천고 경기영상물에 대하여 문의를하고 있는데 보관용이 있고 특히 페기처분된게 많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인천고 77회 졸업생입니다.
@Juanseo703 жыл бұрын
네 마찬가지로 인천고에도 당시 에이스 탁명렬을, 사이드암 2년생 장승철이 받쳐주었지요. 탁명렬은 선배 정은배처럼 인하대가 아닌 경희대로 진학했고 이후에는 프로가 아닌 실업행을 택했지요.
부산고 4번 이종택 준결까지 11타수 10안타 0.909치타가 저 경기서 4타수 무안타여서 0.667로 타격상 받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user-kv1lr4ge1u3 жыл бұрын
리포터는 농구선수 출신 김승규 님
@sanmicheal67543 жыл бұрын
농구? 어쩐지 키가 크더라...
@user-hj6ll8ne4s7 күн бұрын
당시 명지대 농구팀 감독
@user-dw2pp3sn4z6 ай бұрын
박형열 선수 투구폼 진짜 깔끔하고 두뇌피칭 장난없네요..ㄷㄷㄷ 박동희 선수는 역시나 직구가 날카롭네요 ㄷ
@user-sr5vt3ul8p3 жыл бұрын
동희형... 보고싶어여..ㅠㅠ
@user-wl1eo8tq1s3 жыл бұрын
저날 비도 조금 왔는데.
@user-xh9kr1nh5c3 жыл бұрын
고등학교 동시대에 재학중 상대팀 부산고등학교 위기가 되면 외야에 있는 박동희 올라와서 불 끄고 내려가고 진짜 부러웠다. 10년이 지나 모교도 박동희급 선수가 나타났다 그 이름 김건덕 박동희.김건덕 그곳에서는 편한하시길
@user-do8fy2du4t3 жыл бұрын
85년도 청룡기 4강 tv중계 했었거든요 인천고 부산고 자료좀 있으면 꼭좀올려주십시요
@user-mi8ox1lz3c3 жыл бұрын
그날 제가 KBS-TV중계 시청했는데 인천고가 0:5로 패했지요 인천고 그해 4월에 있었던 대통령배대회 결승전에서 서울고에 4:1패배하여 준우승을 했는데... 멤버는 좋았죠 인천고.. 김경기,탁명렬,이상훈,최용철,주경업,최광천,김원근등 인천고 1회말 주자1,3루두고 5번 김원근이 친 타구가 홈런성이었는데 부산고 좌익수에 잡혀아웃 인천고는 부산고 박동희의 구위에 눌려 산발8안타를 치고 패배했습니다 지난 대통령배에서는 8강전에서 부산고에 2:1승리하였으나 청룡기에서는 부산고에 석패했습니다 대통령배대회에서는 박동희투수가 인닝투구에 규정에의거 던질수 없었구 귄영일 투수가 투구했었죠 당시는 투수에 대하여 5인닝 이상 투구하면 다음경기에 출전할수 없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2020년 현재는 투수에대하여 인닝이 아닌 투구수 제한을 규정하고 있죠 참고로 저는 인천고77회 졸업생입니다.
@Juanseo703 жыл бұрын
@@user-mi8ox1lz3c 제가 최계훈 투수 때문에 어려서부터 인천고 팬이었습니다. 85년도 중3 때인데 인천고 두 경기 직관하러 갔는데 하필 두 경기 다 인천고가 맥없이 졌지요. 그게 서울고와의 대통령배 결승 (1대4 패), 그 다음이 부산고와의 청룡기 준결승 (0대5 패)였습니다. 서울고와의 결승 때는 1회 1번 주경업이 안타를 치고 출루, 2회에는 5번 장타자 김원근이 좌중간 2루타를 친 후 후속 땅볼 때 득점해서 승리의 기대감이 컸으나 이후에는 박형렬과 이용호의 계투에 눌려 맥없이 주저앉더군요. 부산고 전에서도 말씀하신대로 1회 김원근이 친 공이 홈런성 타구였는데 아쉽게 잡히고 나서는 전혀 게임이 풀리지 않았어요. 그 경기에서도 박동희는 시종일관 150km 안팎의 강속구를 뿌렸지만 (직관하니 박동희의 직구 구위는 살벌하다 싶을 정도더군요) 인천고 타선이 전혀 공략을 못한 것도 아니고 에이스 탁명렬이 난타를 당한 것도 아닌데 점수차가 벌어지더군요... 85년 인천고는 이후 대회에서는 별성적을 거두지 못했죠. 봉황대기에서는 1회전에서 경남고를 맞아 사이드암 투수 김병주(요새 프로야구 심판위원장 하는 그분)에 말려 김경기가 홈런은 하나 쳤지만 완패를 당했고 황금사자기 대회는 아무 기억이 안 나네요...
박동희, 임수혁.. 둘다 훗날 롯데로 갔고… 그렇게 두분은 고인이되어 하늘에서 캐치볼하고 계시겠지 두분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nelson73863 жыл бұрын
3:07 심판의 넘치는 에너지!!!
@saige92493 жыл бұрын
서울고화이팅
@user-li2zw5xz5p3 жыл бұрын
부산고 시절 박동희 투구를 볼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강속구가 무시무시 하네요. 참 아깝고 안타까운 투수. 좀 만 더 관리 잘 했으면, 더욱 좋은 성적 냈을 텐데....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고로 갑작스럽게 타계해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koleanan10013 жыл бұрын
서울고 김동수가 훗날 명포수로서 안영명 참교육하신 그분 맞나요?
@user-sg9zg7yr5c3 жыл бұрын
맞습니다
@user-zh9tm5vx4w3 жыл бұрын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안영명선수가 얼굴로 다 막았습니다.
@user-zg1oz9wl2z3 жыл бұрын
빙그레 큰형 송진우한텐 ㅎㅎ
@user-zg1oz9wl2z3 жыл бұрын
국대때 일본은 노모 히데오 한국은 박동희 ....이후 노모 한국의 박이 메이져 들어간다는 소식듣고 처음 박동희인줄 알았다는
@jins868619 күн бұрын
7:50 진짜 아프겠다….
@user-ig1bk1cx3m3 жыл бұрын
박동희 강속구 기억 나네요
@user-co1gs3it8h3 жыл бұрын
고등학교때 운동회 마지막 주자로 박동희와 달려본 1인
@user-rb6vw7op1v3 жыл бұрын
박형렬 임형석 캬
@hyungjoonchun9503 жыл бұрын
임형석 92년 서울 홈런왕. 비운의 스타
@user-vf4en4wh7h3 жыл бұрын
아~~부산고
@user-vt8wj8xl1z2 жыл бұрын
1987년 청룡기 결승전 경기 좀 올려주세요
@sparky97523 жыл бұрын
이석재 지금도 화이팅, 심정환 지금도 화이팅
@yschoi66863 жыл бұрын
이긴 애도 아니고 져서 울거 같은 애 붙잡고 어른이란 게 뭐하는건지
@user-li2zw5xz5p3 жыл бұрын
서울고 박형열. 투구폼도 좋고 다양한 구질. 참 좋은 투수였는 데. 서울고 졸업후에 갑자기 성장을 멈춤. OB로 가지 않고 대학을 갔으면, 더 좋지 않았을 까 ...
@user-zs7eb5uc9r2 жыл бұрын
같은 생각입니다 1년후배였는데 참 아까운 놈이었습니다. 형렬이와 호흡을 맞췄던 김동수는 한양대가서 엘지 삼성 현대에서 두루 뛰며 정말 프로에서 대성했고 장수했지요. 형렬이보다 더 뛰어난 선수가 될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vietnambeak174711 ай бұрын
인터뷰 어린학생이 지금은 50대ㄷㄷㄷ
@user-ke7xc8eh3t5 ай бұрын
진짜 날것 그대로 방송하네 잔인하게 결승에서 분패한 패전투수에게 대놓고 직접 왜졌냐고 물어보다니 ㅋㅋㅋ 그래도 박동희 선수 대답에 반드시 꺾고 말겠다는 의지가 확고하게 나타나는게 왜 저선수가 훌륭한 선수일수밖에 없는지 잘보여주네요 편히 쉬시면서 야구 후배들 지켜봐주세요 명복을 빕니다
@user-cu3ng4ug5p3 жыл бұрын
관중 많았나
@korea214 Жыл бұрын
박형렬이면 오비베어스 같은데... 아닌가? 오비는 박상열인데... 박형렬도 있었나?
@jcpohuy82803 жыл бұрын
9회말 부산고 2번째 아웃은 세잎 아닌가...?
@user-zg1oz9wl2z3 жыл бұрын
당시 황당한 볼 판정 많았습니다. 수도권팀 유리하게 선언. 관중수 티켓수입과 연관있었지요. 결승전땐 지방이라도 단체로 올라오니 덜한편.
@YSKo-ww8sl8 ай бұрын
느리게 보니깐 의외로 동타임이라..아웃줘도 될거 같아요
@europa3183 жыл бұрын
서울 박형렬 김동수는 명 배터리 부산은 박동희의 팀
@l7201073 жыл бұрын
이규항 아나운서 하일성 해설 참 그립습닏ㆍ
@user-mz1bj3gf5h Жыл бұрын
0:36 신바람 이박사?
@user-tl3dk6th5m3 жыл бұрын
박형열은 어디에???
@MrZugul3 жыл бұрын
서울고 유니폼이 이상하넹.... 아래위 줄무늬도 아니고..
@user-oz6wu2bj4b2 жыл бұрын
88올림픽 박동희.김동수 배터리~ 노모.후루타 배터리~~~
@user-sz8yo2iz7q3 жыл бұрын
당시에 김동수 22번(포수의 등번호?^^).박동희,박형렬 모두21번 혹시 박철순투수의 영향(?)ㅋ
@vanechkapark2 жыл бұрын
고 박동희 선수의 경우 부친의 함차입니다. 박두일씨였는데, 둘일해서 21번을 달았습니다.
@user-sz8yo2iz7q2 жыл бұрын
@@vanechkapark 아 그랬군요!^^예전부터 보면 11,21번은 수준급 투수들의 고유 번호로 봐와서요.프로,아마 모두 그랬으니깐요
@vanechkapark2 жыл бұрын
@@user-sz8yo2iz7q 최동원 선수의 경우 에이스라는 의미로 원래 1번을 달다가 덩치가 커지면서 허전한 느낌이 들어 1을 하나 더해서 11번을 달았다고 합니다.
@loj87312 жыл бұрын
일본야구의 영향이기도 합니다. 일본 고교야구대회는 선발투수가 무조건 등번호 1번, 선발포수가 2번, 백업 포수가 12번, 22번. 선발유격수가 6번, 백업유격수가 16번을 달아야 하죠. 우리나라 고교야구는 그런 규정은 없었지만, 1번, 11번, 21번은 투수들이 선호하고, 2번, 12번, 22번은 포수들이 선호하는 번호죠.
@user-nf5bo4kd3c3 жыл бұрын
이런 역사적인 구장을 없애고 이상한 건물 지어서 치적이나 자랑하고..ㅜㅜ
@user-zs7eb5uc9r2 жыл бұрын
그자리에 돔구장 지엇어야 했죠. 고척돔 생각하면 열받죠 멍청한 5세후니
@benjaminhill28363 жыл бұрын
윤장술, 박승암, 김차곤 좀 안나오나? 경원중 1회 출신들....
@user-wj4se1ph4t3 жыл бұрын
혹시 저희 아버지 아시나요...? 박승암 선수 입니더
@tokebicho36272 жыл бұрын
꼰대스대스까 대스까라무스까
@user-ps9ik5qh9n3 жыл бұрын
박형열은 처음듣는 이름인데 저는
@user-xo4px5dk9u3 жыл бұрын
서울고 에이스로 고등학교때는 잘 나가는 투수로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고졸신인으로 OB에 입단했는데 프로에서 피지못했죠
@user-ey2ro3ot6q3 жыл бұрын
패해서 낙담하고 있는 선수에게 아무런 동의없이 불쑥 찾아가 인터뷰 하는 저 80년대 아나운서 클라쓰~모지리네
@johnny03203 жыл бұрын
아나운서 아니고 농구선수출신 스포츠전문 리포터 였습니다
@rere58612 жыл бұрын
아무런 동의도 없이 탕크 몰고 온 놈이 대통령하고 아무런 동의도 없이 광주에서 발포명령 내린 시대에 뭔 개소리야?
@EverJedi2 ай бұрын
박형렬이는 ob입단 후 그냥 사라졌지요
@user-rz3fg1xj3g3 жыл бұрын
우리말도 있는데 자꾸 영어를 쓰는게 거슬리네. 무사 주자 2. 3루 우익수 등등
@user-li2zw5xz5p3 жыл бұрын
1991년 한일 프로야구 경기에서, 한국 선발 박동희 강속구가 일본 선발 구와다 마스미 직구를 압도했었지요. 한국 박동희 강속구는 빨랐지만, 투구 폼이 크고 매끄럽지 못하고, 변화구 미숙, 타자 대처 미숙 등으로 일본 타자들에게 난타 당했음. 박동희 강속구를 일본 타자들은 잘도 받아치더라. 일본 선발 구와다 마스미 는 직구는 박동희에 비해 느렸지만, 투구폼이 부드럽고 교과서 적이었며, 변화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콘트롤이 자로 잰듯 정확했으며, 타자와의 승부는 능수 능란 해서 한국 타자들을 가지고 놀았음.
@chuyan353 жыл бұрын
박동희의 150KM 강속구를 가볍게 2루타로 만들었던 일본 포수 후루타가 말하길... 볼은 빠르지만 회전수가 없어 눈에 잘 보였다고!
@user-is2ry4lo8r3 жыл бұрын
인터뷰 진짜 촌스럽다
@ubermensch24283 жыл бұрын
시작부터 재수 없게 조선일보가?
@samjo95213 жыл бұрын
청룡기 야구대회가 방가일보 주최라서 어쩔 수가 없네요. 85년이면 전대갈과 그 일당들 한창 빨아주던 시절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