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水軍の優位要素; 1)艦砲 2)朝鮮板屋船の剛性、松材の間の接続オーク材釘 vs 日本船は鉄材釘 3)日本の水軍大砲なく、オランダ産の輸入大砲船体への直接取付け不可、アクセスして船に上がって白兵戦が基本戦術 vs 朝鮮水軍は長距離砲撃戦。 鳴梁海戦(13 vs 133)の勝利(33隻沈没、2,500〜8,000人死亡)した後,170kmを後退したことは実際、忠武公の日記にもゴグンサン列島まで後退記録いる。 武器消費完了,不利な戦力,長期滞在不可能な地形などを考慮した戦略的後退は当然の選択。 戦闘力の保全,補充して後に露梁海戦などが可能だった.
@user-qy6nw1cy7m4 жыл бұрын
네 다음 판타지 소설의 대가 ㅋㅋㅋ 작은 중형배인 세키부네에 고작 30명 정도 타고 있었는데 일본군 사망자가 2500명~8000명이라고?? ㅋㅋㅋ 그리고 무명 하급 일본장수들이 출전을 한 명량해전에 일본군의 수가 7200명 정도였는데 8000명 이상이 전사를 했다고?? ㅋㅋㅋ 뻥도 어느 정도 쳐야지 ㅋㅋㅋ
@user-he9nr5zs3c4 жыл бұрын
@@user-qy6nw1cy7m 왜 세키부네만 30척 침몰됐다고 보시나요? 안택선에는 150~200여명이 승선합니다. 침몰만 30여척, 반파상태로 도망간 배에서도 사망자 나오지 않았겠어요? 제장명 교수등의 주류 학자의 의견이 최하 2,500명입니다.
@user-rf5ow1zq4c4 жыл бұрын
니가 판타지소설의대가지 임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명하급장수같은 소리하네 ㅋㅋㅋㅋ그럼 그유명한일본장수들 뭐하고 있었나 놀았냐 ㅋㅋㅋㅋㅋㅋㅋ 해전에 패하고 났어 나중에 왔어 승리다 하는 왜구들 모습 보면 웃음만 나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결국 일본놈들의 정신승리지 ㅋㅋㅋ
@user-qy6nw1cy7m4 жыл бұрын
정O ㅋㅋㅋ 니가 말한 일본군 사망자가 2500명~8000명이 일본측 기록과 조선측 기록과 중국측 기록 어디에 나오는지 사료 근거를 다 가지고 오기 바람
@user-qy6nw1cy7m4 жыл бұрын
빤스런 이O ㅋㅋㅋ 도도, 구루시마, 와키자카등이 일본에서 몇만석인 장수인지 한번 찾아서 보기 바람 ㅋㅋㅋ 응 이들 전부 무명 하급 장수들이였음 ㅋㅋㅋ 하여간 임진왜란 정유재란때 무명 하급 일본장수들(고니시, 가토, 시마즈 빼고) 한테 탈탈 털린건 인정을 해야지 ㅋㅋㅋ 이런 중수들한테 조선인들이 무려 3분의 1이 학살을 당하고 일본으로 포로로 끌려갔었음 그리고 거지 노예국가 이씨 조선은 일본에 보복도 하지 못했음 ㅋㅋㅋ 당연히 정묘호란 병자호란도 후금 청나라한테 보복을 못했음 ㅋㅋㅋ 정신 승리 하지 말기 바람
At 鳴梁 Japanese Navy's 31 battle ships were destroyed and then the rest of Japanese Navy retreated. On the next day after this action, Yi, Soon Sin was concerned about enemy's additional attack but Japanese Navy did not show up anymore. So Yi decided to withdraw away from there because Korean Navy needed to rebuild and enhance its power. So he needed the place and time for rebuilding. That's the reason why Yi moved North after the victory of 鳴梁. Written by Choi, Master of Military Art.
@tm32556 ай бұрын
@streetslutpaiexactly. This is their typical propaganda that is spread by Korean. No one except K believes this story. What a poor they are…
도망자 이순신이 직접 쓴 일기(지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들어간 일기) 에도 작은 세키부네 수십척만 당파하고 바로 계속해서 도망쳤다라고 다 나옴 그리고 바로 서해안과 전라도 전역이 일본군들한테 초토하 당했음 참고로 영국+네덜란드는 스폐인 무적함대를 절대로 영국 본토에 입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안았음 바다에서 싸워 이겼지 하여간 매트릭스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하는데 말이지
@user-qy6nw1cy7m4 жыл бұрын
@Noah Lee 응 읽어봤음 도망자 이순신 지가 직접 쓴 일기(지 주관적인 견해와 생각이 많이 들어간 일기) 에도 명량해전 후에 바로 계속해서 북쪽을 도망쳤다라고 다 나오며 1년동안 거의 짱박혀 있었다라고 다 나옴 ㅋㅋㅋ 정신 승리를 하지 말기 바라며 현실 부정을 하지 말기 바람
@GGOOMAR4 жыл бұрын
@@user-qy6nw1cy7m 같은 정보를 보고 시각이 이렇게 다를수도 있구나 생각하게 되네요. 저는 충청도 지역까지 후퇴한건 아주 합리적인 판단이였다고 생각하는데 신기하네요.
@user-qy6nw1cy7m4 жыл бұрын
@@GGOOMAR 그래서 도망자 이순신 때문에 전라도 전역이 일본군들한테 초토화 당했음 ㅋㅋㅋ 그리고 명량해전에 참가한 일본 장수들은 전부 무명 하급 장수들이였으며 일본측은 수십척만 당파 당했다라고 하며 명량해전에 참전한 세키부네는 30명~40명이 탈수 있는 작은 전투배임 ㅋㅋㅋ
@user-tm1lg4rl5d3 жыл бұрын
일본인들의 역사는 fact가 나니고 fiction이니까 믿는 사람들이 문제죠.
@user-vd2ro5hb5v4 жыл бұрын
一個人 豊臣秀吉 野望... 全 朝日良民 死亡 & 犧牲....No more 貪慾的 侵略戰爭...反對 軍國主義 ! Let's go to 韓日平和...
@kez49112 жыл бұрын
中世と現代を同じと考えてる事が気持ち悪い。
@user-vr8pl9mr5r2 жыл бұрын
文法がめちゃくちゃでも意味はわかる。漢字って凄いなぁ。
@user-uv5kc3no2r Жыл бұрын
쿠루시마 미치후사의 형 도쿠이 미치유키는 이미 1592년 당포해전에서 이순신에 의해 전사 그 복수를 노린 미치후사였으나 실패로 끝나고 전사 来島通総の兄 得居通幸はすでに1592年の唐浦海戦で李舜臣によって戦死 その復讐を狙った通総だったが失敗に終わり戦死
@user-uv5kc3no2r Жыл бұрын
그렇게 강하고 강한 세계적 수준의 일본군이(일본인 주장) 왜 1593년 부터 부산 주변에만 옹기종기 모여있었을까? 이순신의 조선수군에는 한번도 이기지 못한 일본군입니다만 무엇이 잘못? そんなに強くて強い世界的水準の日本軍が(日本人主張)なぜ1593年から釜山周辺にだけ集まっていたのだろうか 李舜臣の朝鮮水軍には一度も勝ったことがない日本軍ですが、何が間違い?
@user-su9tq9vm1p6 ай бұрын
일본의 youtube에까지 출장해 애국정신 발휘하는 흙수저 애국 아저씨는 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user-uv5kc3no2r6 ай бұрын
@@user-su9tq9vm1p 이 ㅅㄲ들 컨셉은 십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어 ㅋ
@user-hn8es4oq2f3 жыл бұрын
이상한 곳에서 고집을 부리네요....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고집은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나요? 이런 단순한 거짓말은..
@user-hn8es4oq2f3 жыл бұрын
@RisingSunCountry 1. 명량해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일본군은 영광군 일대를 점령했다. 2. 조선 수군이 몰살당함으로써 일본군은 서해를 통해 순식간에 북상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3. 이순신이 12척의 배로 일본군의 서해 북상을 저지함. 4. 세계사적으로 군대의 20%가 손실되면 재정비를 해야 하고, 50%면 부대 재편성을 해야 한다. 이를 보면 명량에서의 일본 수군 피해는 심각한수준. 서해로의 진입은 사실상 불가능. 여기에 어떤 왜곡이 있는건가요?
@user-hn8es4oq2f3 жыл бұрын
@RisingSunCountry 예 저 역시도 일본군이 이미 명량이전에 영광까지 들어간것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명량 이후 나흘만에 우수영을 점령하는등, 이미 명량 이전에 전라도 인근의 상황은, 12척의 조선 수군이 어떻게 해볼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칠천량의 패전이 조선에게는 크게 다가왔던것이지요. 이미 전라도의 운명은 사실상 후일을 기약해야하는 상황이었고, 이대로 서해로의 북상로로 왜군이 진입하게 된다면, 삽시간내에 조선이 일본의 수중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였음을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점으로 보았을때 명량의 해전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는것이지요. 실제로도 일본 수군은 서해로 진입을 하긴하였으나, 결국엔 잠시고 순천 이동으로 물러났지요. 게다가 조선의 수군의 배라도 한척 침몰시켰다거나... 그랬다면 모르겠지만. 사상자가 열댓명 정도이니 조선수군이 거의 멀쩡한 상태로 남아있었고, 남해안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 할 수있는 수군의 존재. 그거하나로도 이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뒤를 찌를지도 모르는 적의 존재는 성가시니까요. 실제로도 조선수군은 멀쩡히 잘 재건되어서 다시 영향력을 행사했고요. 수군의 중요성이야.. 실록이나 다른 사료들에도 왕창언급이 되니까요. 이후에 일본군의 진격속도가 전에 비해 느려지고, 수비로 전환 한것도 이러한 영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user-hn8es4oq2f3 жыл бұрын
@RisingSunCountry 결국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충실히 경기남부까지 북상했던 일본군은 명량해전 이전부터 서서히 남쪽으로 철군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명량해전의 패배와 조명연합군의 울산성 공격으로 히데요시의 명령이 현실에 막혀 정유년의 북상이 끝으로 더 이상 전선이동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충무공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의 명량대첩의 의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라남도에 주둔 중인 일본육군과 연계하여 그 지역을 지배하려던 일본수군의 작업을 차단했다는 것입니다. 우키타 부대가 장성과 해남에 주둔했다가 철수한 것을 보면 금방 알수 있죠. 또한 명량해전 당시 진도와 해남에 있었던 수많은 전라도 사람들의 목숨도 구했다는 점입니다. 조선수군이 패했다면 피난민 수만명의 목숨을 일본군에 의해서 좌지우지 할게 뻔하니까요. 또한 조선수군이 재건할 기틀을 마련하여 일본수군의 활동을 제약을 가해 향후에 있을 일본군의 북상을 사전에 방지했다는 점입니다. 정유재란 당시에 일본군이 북상을 포기하고 남하했을때, 명군의 존재때문에 그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큰 요인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미 명군의 개입은 각오하고 있었고, 남원성에서도 명군과 싸운 경험이 있으니 명군의 출현으로 일본군이 철수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제가 쓴 글은 아니지만, 상당히 적절하다고 생각되어 가져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