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I remember the first time I smelled and heard the ddong-cha. Hearing them call out "ddong!!!". I must have been 7 or 8 and it must have been in the late 70s. My grandparents lived in Sindang-dong right next to Park Chung-hee's house (I found this part out later). I could see tubes on top of the tankers flap open and my toes would curl. My whole body from my nose to my toes would go stiff. My grandmother would take me to the local farmers market and then I saw what you refer to the honeyman yelling "ddong" navigate through the farmer's market. I had never seen anything like it. My grandparents lived well and had been all around the world, so my grandmother would lovingly and empathetically explain to my young naive mind why they had to do it. It didn't dawn on me that some places in the world did not have modern plumbing. I hated that smell but looking back I loved that part of Korea, it was so raw and real. There was a job for everything. It was also the first time I took bathes from bowling water in a big tub. The first time I slept on the floor with a rolled pillow. And the floor was above a furnace heated with firewood chopped by a high school student the day before. Though my grandmother visited me in America many times before, I had no idea this was the way my grandparents lived. It was very charming and being able to live like that with my grandparents in their hanok brought me closer to them. In those years of my youth I never wanted to leave Korea. I loved playing chinese checkers with my grandmother and having her tell me folktales of the dokgaebi, and the tigers of Korea. Just magical. Thanks for bringing back those memories.
@stereomachine3 ай бұрын
Thanks for sharing this story 🙂 it's incredible how much Korea changed.
@osoany3 ай бұрын
우리가 꼭 잊지 않고 기억해야할 일들을 대화로 남겨주신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Qcefer3 ай бұрын
This conversation brings back so many memories of my childhood! Our family of 4 lived in Suwon and visited Seoul one day. Bananas were so rare and expensive that the 4 of us shared 1 that my dad purchased for 3000 won back then! When we immigrated to the states bananas were 25 cents a pound! 😲 I alone probably ate more bananas than any monkey eats in it's lifetime! 😅 Great memories indeed! Thank you gentlemen 👍
@yongan72283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TheFrogOutsidetheWell3 ай бұрын
저도 감사합니다
@김건우-q4g4l3 ай бұрын
두분 어르신들 오랜 우정이 참 훌륭하십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애정 또한 신박하고 감사합니다 😅
@김광진-t1k8z3 ай бұрын
우리나라가 이제 선진국의 한켠을 차지하고 그 이상을 꿈꾸는데는 다 어르신들, 특히 외국에서 오셔서 많은걸 가르쳐주신 분들의 노력도 합쳐서인거지요. 진솔한 얘기들, 감사합니다.
@라라-h4x3 ай бұрын
저도 도둑을 맞은 일이 있었어요 90년대 후반에 빌라에 살때, 우리집 베란다 창문 옆으로 트럭이 주차해있었는데 트럭 타고 우리집 층을 올라왔지요. 베란다로 들어왔는데 베란다바닥에 짐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것들을 소리안나게 옮기느라 도둑이 고생했겠지요 ㅎ 어머니가 밤중에 깼는데 거실로 나왔다가 베란다에 뭔가 이상한 느낌? 이 들어서 여보 나와봐 했는데 도둑이 엄청난 속도로 도망갔지요. 저는 제방에서 자다가 아빠와 오빠의 엄청난 고함소리에 깼는데 도둑에 놀라기보다 그 고함소리에 너무놀라 심장이 아팠어요.
@kim-pi4yq3 ай бұрын
한국사람도 어려운 시절을 박사님 고생 하셨어요 중학교때 평화 봉사단 이라는 미국인들 처음 신기하게 봤어요 타국에서 수고 많으셨어요 미국 덕분에 이렇게 잘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독고다이-h2o3 ай бұрын
잘보고갑니다~건강하세요^^
@최용국-i1p3 ай бұрын
교수님 교수님 존경합니다
@k.joomihyun3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여김춘단-u4mАй бұрын
우리도 몰랐던 우리예기 너무 재미있네요
@punkpassion3 ай бұрын
와 저 43갈인데 변소라는단어를 들어본게 공중파 포함 25년은 지난것 같아요 ㅋㅋㅋㅋ아는데 그리운단어랄까 기억을 살려주셔서 감사해요 ㅋㅋ
@Mr2Reviews3 ай бұрын
Excuse my French but damn Professor, 0:37, you were a handsome young man!
@mino51943 ай бұрын
시간 가는줄 모르고 시청했어요. 너무 재밌었요. 선구자가 된다는 것의 가치를 사람들이 배웠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건강하세요 교수님🥰❤
@나그네-o3v3 ай бұрын
80년대 초 만해도 변소는 제법 있었습니다. 항상 보리차는 집에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추억입니다. 추억을 서로 공유하는 것으로도 즐겁습니다.
@라라-h4x3 ай бұрын
저는 초가지붕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학생일땐 남아 있었다고 해요. 초가지붕이 원래는 2년인가 정도로 바꿔줘야 한다고 해요. 시간이 지나면 썩고 냄새가 엄청 난다고 하더라구요. 어머니 주변에 초가지붕이 남아있었는데 주변집들에서 제발좀 바꾸라고 원성을해도 그집도 지붕바꿀돈이 없어서 사과만 하고..그땐 많이들 가난했다고 해요.
@seongirumАй бұрын
변소. 간만에 들어보네요 ㅎㅎㅎ😅
@김개동-r9x3 ай бұрын
미스터 브루스 스노우 선생님.. 두상이 참 잘 생기셨군요...
@dongkwon12423 ай бұрын
2편이 있을것 같은데요. 😄 두분 대화에 지나간 추억이 새록새록... 감사합니다!
@TheFrogOutsidetheWell3 ай бұрын
네, 바로! 제2편 준비중이요.
@dongkwon12423 ай бұрын
👍
@dongkwon12423 ай бұрын
👍 "타미매트" 라면, 돗자리? 아니면 다다미를 뜻하시나요? 마당에서 빨래 말릴때 옷가지를 많이들 잃어버리곤 했죠. 너무나 가난했던 시절... 그래도 많이 생각나고, 그립습니다. 😄 오늘 귀한 친구분을 만나셨네요. 저도 오래된 소꼽친구들이 정말로 보고 싶습니다. 오늘 영상 감사합니다!
@stereomachine3 ай бұрын
I'd be interested in hearing about the LDS church and Korea in the early years in another video. When I first moved to the US one of my closest friends was LDS, and they introduced me to a lot of things about the church. Since then I've become interested in its history.
@waikikiwhisky3 ай бұрын
10:15 사진의 모습은 물을 나르는 용도로 더 많이 사용 했죠...물지게라고 부릅니다 화장실 청소 할 때 똥을 퍼 담는 통은 '똥장군'이라고 항아리를 옆으로 눕힌 모습으로 항아리 중간에 입구를 만들고 지게 위에 얹어 다녔습니다
@ilbvgddsdesgjr3 ай бұрын
저는 78년생인데 제가 고등학교 졸업할때 까지 산골자기 높은 동네 빈곤층에서는 옛날변소가 있었어요 그후로 개발이 점차되서 산을 깍고 아파트가 새워졌죠 그때 우물물들은 정말 달고 맛있었어요 지금생수물과 비교도 안됬죠
@TheFrogOutsidetheWell3 ай бұрын
아이고! 댓글을 감사합니다.
@chaisepomme40703 ай бұрын
It was the late 60s and I was about four or five years old. We lived in Seoul in a one storey house my father had bought upon getting married to my mother a few years earlier. I remember the junkman, his cart, and those noisy scissors, but I don’t remember the candy. We had a shing-mo (housemaid) from the rural countryside to watch the house against burglars. The houses in my neighborhood were walled in by tall fences made of cement bricks and a locked wooden gate, but the thieves could still break in by scaling the wall and would steal anything from cutlery to ???? Unless there was a shing-mo in the house. Our shing-mo was a housemaid and a babysitter for me and my sister. And yes, there was a big gae chaun nearby with a foot bridge to the other side. One summer day there was some kind of commotion on the other side and the foot bridge was full of people. My sister and I along with the housemaid were on the footbridge and suddenly my little sister pushed her off and the poor housemaid fell into the gaechaun and floated a little downstream before climbing out. And boy, did she get mad at my sister. Our byeonsoh was an indoor outhouse which you had to squat over and i remember being really afraid of falling in or being grabbed by monsters that lived underneath. I don’t remember the honeypot men. I do remember a man coming into the bathroom with a long thick hose and everything got suctioned into a truck with a tank. Thank you, Professor for the memories!
@서울유감3 ай бұрын
Bruce Snow씨가 청운동 살았으면 나랑 마주쳤을 수 있겠네요. 내가 청운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1.21 사태 때 자하문 무장공비 총격전 당시 총격 소리도 들었을테고 ㅎㅎ
@taehunlee-rj2cn3 ай бұрын
사람의 마음은 굳이 신체의 크기에 비례하진 않아요. 대체적으로 선진국의 대인배가 오픈 마인드로 대화가 가능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심지어 북한의 청소년급 처녀가 꽤 시장판에서 중요사항을 지적 해내는 모습도 있었구요. 또는 일본의 대학 초년생 만큼이 자의로써 언어표현법을 실행하여 누군가 여행자에게 중요한 팁을 전달하여 도움을 해내는 모습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언어영역은 몇 가지 이상으로 다양한 형편 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항은 최근에는 무슨 언어행위이든 바르다하면 칭찬해야 하고 또 장려 해야만 한다고 봅니다.
@HwangSungUk3 ай бұрын
그러고 보니.. 변소란 단어가 있었네요..ㅋㅋ 뒷간.변소 등은 이젠 사라져가는 단어 ㅎㅎ
@TheFrogOutsidetheWell3 ай бұрын
또한 해우소 라고도 해죠. 주로 사찰에서...
@bravewoo73173 ай бұрын
어르신들 1965년도면 60년전 쯤에 한국에 계셨던거에요??
@머털도사-z1t3 ай бұрын
엿장수 가위 =>1980년대 국민학교 다닐 때 엿장수 아저씨와 막대엿. 그리고 생수가 판매하기 전까지 보리차를 팔팔 끓여서 냉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마셨습니다. 그리고 변소는 앉은 자세에서 응가하는 장소입니다. 주인과 임대로 사는 사람들이 공동사용하였습니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나는 시절입니다. 추가로 바나나는 너무 비싸서 구입해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집 근처에 있는 Costco 에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