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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에서는 1919년 3월 19일 남상철이 면민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며 1차 시위를 주도하였으나 남상철이 일경에 체포되면서 시위대가 해산하였다. 3월 24일에는 이계성의 주도로 2차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는 면사무소 서기로 24일 오후 7시 경 김관룡의 집을 찾아가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을 권유하여 동의를 얻었다.
해미공립보통학교 반장으로 3월에 졸업한 김관용은 졸업생을 위한 고별회에 참석하여 졸업생 이봉이·유한종·최흥량과 재학생인 장기남·양태준·이기신 등에게 고별회가 끝난 뒤에 모두 독립 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하여 찬성을 얻었다.
밤 11시경 유세근·김연택·한신우 등 기독교인과 주민들은 해미면 뒷산에 올라가 횃불을 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횃불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남문과 서문을 지나 읍내리의 면사무소와 우(牛)시장에 가서 김관룡의 선창으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주재소로 이동하던 중 출동한 일제 경찰과 충돌하여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 만세시위로 김관룡·이계성·김연택·유세근 등은 태형 90 도에서 징역 1년의 악형과 옥고를 겪었다.
이들은 옥고를 치른 후에도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항거하여 서당을 개설하거나 승려가 되어 법회를 통하여 민족의 전통 교육을 강조하고 일본어 교육을 반대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제작 202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