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 진짜 난리도아니었지.. 아부지가 고무다라에 동동태워 쌩판 모르는 남의 집에 갔는데 "아이들 씻기고 밥부터맥입시다" 그집서 하루자고.. 이웃사촌이란 말이 괜히있는게 아녀..
@음메-h5d Жыл бұрын
우왕..
@Latteholikkk Жыл бұрын
@@뉴라리움? 닌 어디가서 밥참 잘얻어 먹겠다
@주마초9 ай бұрын
그런데 넌요즘 왜그냐?
@Nowiztki-DAL9 ай бұрын
@@주마초 ㅂㅅ 뭐야? ㅋㅋ
@david192509 ай бұрын
@@_RED_FISH_ ㅋㅋㅋ
@마리-c9h11 ай бұрын
안녕하세요. 도덕수업시간에 선플달기운동을 하고 있는 운산초등학교 5학년 학생입니다. 영상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제가 모르던 소양강댐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의 이런 재난이 있는줄 몰랐는데 꼬꼬무가 이야기를 해주니 귀에 쏙쏙들어오네요.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ash0224411 ай бұрын
귀여워라❤
@최윤정-o7d3s10 ай бұрын
으악 귀여워요♡♡
@번개의신-p8k9 ай бұрын
나두 귀엽.ㅇ(?)
@roundlee8 ай бұрын
어이구 귀여워라
@번개의신-p8k8 ай бұрын
귀여워요? 귀욤? ㅎㅎㅎ
@손짱-o2w Жыл бұрын
정주영은 진짜 나라의 구세주였네 진짜 1세대 기업인들은 구국의 영웅들이다
@mmncol22 Жыл бұрын
ㄹㅇ...나라 구함..
@박규민-o7l Жыл бұрын
@@으어어-h1u저때는 한창 우리나라의 전투력이 북한을 우세하지 못한시점으로 콘크리트 댐으로 지었다간 전시국가인 우리나라 안보에 큰 위협이되서 사력댐으로 지은겁니다 댐이 한번에 무너지면 서울은 잠기니까요^^
@오찬우-c5n Жыл бұрын
@@으어어-h1u혹시 부모가 현대에서 잘리셨어요? 왜캐 아니꼽지 ㅋㅋ
@박규민-o7l Жыл бұрын
@@으어어-h1u 아니죠 어쨌던 저 사력댐이 버텨줬고 그 사력댐을 현대에서 지었는데
@ayj4858 Жыл бұрын
@@박규민-o7lㄹㅇ 논점 벗어남. 저 난리가 사력댐 때문인데.
@청순이플 Жыл бұрын
소양강 댐을 계획하고,건설하고, 관리하고,재난을 극복하고.... 진짜 대한국민들 대단함~
@가애-M사생활O유r출S4 ай бұрын
🍷🍷🍷
@센안조4 ай бұрын
개소리하네 ㅋㅋㅋ 다 일본기술인데 ㅉㅉ
@고기집스님3 ай бұрын
@@센안조 일본은 소양강 댐 콘크리트로 만들자고 했고(비싸서 마진도 많이 남으니)현대는 사력댐으로 하자고 해서 사력댐으로 만든거임
@sky770107 Жыл бұрын
소양강댐 직원분들 참으로 감사합니다 ❤
@풀버전-야뎡-o9jАй бұрын
🔝👨👨👧
@Cccco70811 ай бұрын
너무 무서우면서 다들 한 마음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다
@명식최-b4b11 ай бұрын
정주영회장님의 능력과 열정이 느껴집니다. 이분은 나라의 영웅이십니다. 존경합니다 ❤
@항정살좋아 Жыл бұрын
저 당시 소양강댐 건설 시도조차 하지않았다면, 또 최고 수위 높이가 0.1m 더 낮거나 1cm가 모자르게 됐더라면 진짜 역사 자체가 바뀌고 삶의 터전 잃은 수많은 수재민들이 발생했겠지 위험을 무릅쓰면서 마지막까지 댐 지키고 발전소 또한 더이상 물 피해 안가게끔 지키셨던 모든 분들 정말정말 고생많으셨습니다
@PP-nl2rs Жыл бұрын
그분은 사람들이 욕만하지 전혀 고마워하지않음
@saefsef3862 Жыл бұрын
사기 1위 노ㅂI 민족 기생 민족 표절 민족 엽기 민족 소국 말살이 필요하다 !
@ryhd323 Жыл бұрын
정주영 회장의 공을 높게 사야 함
@항정살좋아 Жыл бұрын
@@PP-nl2rs 그건 님과 같은 그 무리들만 그러는거고 올초 방영했던거 보고나 그런소리하는건지
@davidjacobs8558 Жыл бұрын
저걸 경험해서 금강산댐 방류하면 똑같이 당한다는 판단으로 평화의댐 만든건데, 그걸 좌파들은 욕하지. 그런데, 김대중이 정권잡은후, 지가 그렇게 욕하던 평화의댐 2배 높이로 증축했지. 지도 불안했기 때문이지.
@영인이-g3r Жыл бұрын
이당시 사람도많이 죽었어요. 그당시 남동생이 해병대헌병이였는데 동료한명과 상속장교.장교의 결혼할 여친ㆍ여친의 어린초등남동생(늦둥이외아들)포함해 5명이함께 소양강 아래 강천주변에서 휴가갔다가 갑자기열린댐 물류에 하천이불어나 맞은편 주택쪽으로 인간띠로 서로손을잡고 건너다 물살에 휩쓸려 남동생 만살고. 4명은익사한 가슴아픈 사고생각이 나네요 군병원에 누워있던남동생. 병문안을 가서 사고경위를 들었죠.남동생은 키도크고 수영을 엄청잘했어요. 강을 건너는데 물이갑자기 불어나면서 손을모두놓쳐서 휩쓸려떠내려가는순간 물위로는 힘이부족해 물속깊이 들어가야만 헤엄을칠수있을거같아 잠수했는데 힘이부족해 터내려가면서 이제 죽는구나 라는순간 커다란나무에 몸이걸려서 잡고 버텼는데 강가길쪽에 사람들이 줄을던져줘서 잡고 헤엄쳐나와 보니 혼자만살았더라는., 그남동생 결국은 제대하고 술로 살다가 일찍세상을 떠나갔어요.너무보고싶고 가슴아파요.
@zyo.94 ай бұрын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앵구리구리4 ай бұрын
ㅠ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ㅠ
@wariji2094 Жыл бұрын
우리들의 이런 평화로운 일상은 뒤에서 묵묵히 버텨주시는 분들 덕분에 영위되는 거네요 인터뷰 하시는 분들 아버지 세대라 더 짠했어요ㅠㅠ
@금빛별이-j7b11 ай бұрын
1984년 아직 어린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 그러나 나라 분위기와 부모님을 뵈면서 나라가 좋아진다는 느낌이었어요 ~ 저도 눈물 흘리며 이 영상 봅니다 ~
@borahkang76795 ай бұрын
네 저도 당시 여섯살이었는데 뉴스들이 너무너무 무서웠던 기억만 있네요. 부모님이 보시면 귀막고 눈감고 있었어요.
@센안조4 ай бұрын
웃기고있네 저거 다 일본기술이여 무식아 ㅉ
@김찬영-b6x Жыл бұрын
이 방송 참 잘봤다.소양강댐이 세계 5번째 큰 댐인것도 알았고 소양강댐 직원분들 멋져!
@kyo6558 Жыл бұрын
꼬꼬무는 진짜 좋은 프로그램이다
@reppi7491 Жыл бұрын
전체는 아니고 사력댐중입니다 다목적댐 중에서는 중국 샨사댐 다음으로 아시아에서는 두번째로 큰 댐이구요
@금빛별이-j7b11 ай бұрын
@@reppi7491그렇군요 ~ 우리의 선배님들께서 온힘과 온마음 다해 만들어 주신 대한민국 ~ 625전쟁 후 미군을 따라다니며 초콜렛을 외치던 시대에서 빠져나와 다른 나라사람들의 부러운 눈빛을 모른 척하며 즐길 수 있었습니다 ~ 대한민국 만세 ~ 선배님들 정말정말 감사드립니다 ~ 이 큰 감사를 어찌 다 올릴 수 있을지 ~
@Alex-lh2ue Жыл бұрын
위기때 포기하지 않는 우리나라 국민들 너무 멋있네요 ㅎㅎ
@toworwor Жыл бұрын
sns에서 한참 비가 허리까지 차도 출근하는 80년대 사람들 이라고 해서 당시 영상 같은 걸 본 거 같은데 그게 이때 홍수 난 영상이었구나........... 정말 그분들은 죽을 고비이셨네..
@johnlee.1755 Жыл бұрын
84년 허리까지 차는곳을 버스내려서 건너다가 한명 휩쓸려 큰 개천구멍으로 사라져 포기하고 2교시중에 학교 등교했었어요.
@toworwor Жыл бұрын
@@johnlee.1755 고생 너무 많으셨습니다..ㅠㅠ
@alexjung46177 ай бұрын
@@johnlee.1755 개천구멍 들어간 분은 살아계실지...ㅠㅠㅠ
@user-only12306 ай бұрын
부천에서 여의도로 그날 출근하면서 죽을고비 여러번 넘김 ...그날 츨근하니 반도 안오고 일찍 퇴근하면서 유일하게 문연 대방동 목욕탕에서 직장 언니와 회포를 품 😂
@HP_Y3 ай бұрын
그건 아니고, SNS 등에 돌아다니는 영상은 대부분 1990년 홍수때 상황 영상. 84 90 둘 다 겪어봤는데 서울의 사정은 거의 비슷했습니다. 원인이야 조금 다르겠지만. 단지 90때가 84때보다 대비가 조금 더 된 정도?
@조승환-v4z Жыл бұрын
진짜 옛날엔 저렇게 힘들면 도와주고 같이하고 했는데ㅠ 정이란게 있었는데 요즘은..ㅠㅠ 에휴..
@sts9900 Жыл бұрын
물의 무서움과 소양강댐의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좋은프로그램이네요 이런프로그램 더 많이 만들어 주세요~^^
@봄날은온다-c2z Жыл бұрын
위기때 서로 돕고 하나로 똘똘 뭉치는건 진짜 한국인만의 고유한 특성이다 민족성에 특유의"정" 문화가 있어서 힘들땐 하나되어 정말 잘 도와준다 이 "정"문화를 터치해서 제대로 대박났던게 초코파이"정"광고 ㅋ 국뽕이 아니라 위기때 뭉쳐서 빨리빨리 위기에서 벗어나자 하는건 진짜 세계1등이다 Imf조기졸업이 가장 큰 예
@오문원-v7y Жыл бұрын
참고로 1990년에 소양강댐이 197미터 까지 올라 간적이 있었습니다. 위험 수위까지 근접한건 1984년 1990년 두번밖에 없었죠. 현재는 보조 여수로가 있어 최대 만톤까지 방류가 가능합니다. 충주댐도 143미터까지 간 경우는 1990년 2006년 이며 현재는 보조 여수로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sanmicheal6754 Жыл бұрын
어찌 이리도 유식하실까ㅎㅎ 부모님께서 흐믓해 하시겠어요☺️😚
@peacemaker5010 ай бұрын
@@sanmicheal6754마흔두살이십니다
@김산복-r7i9 ай бұрын
ㅎㅎ 수방 관계자 분이시다 수방! 남들 보기엔 편해보이지만 한강 수계 7개댐 수문 동시 개방시 (소양 춘천 화천 의암 청평 충주 팔당) 인천간만까지 동시에 겹치면 한강 하류유역은 수방하기 힘듭니다 ~(영등포 마포 능곡 김포 부천 등등) 😅
@도깨비신랑7 ай бұрын
정말 똑똑하셔요😊
@카송3 ай бұрын
맞아요. 1990년은 저도 유일하게 기억나요. 지대가 높은 용산구 살다가 1990년에 한강변으로 이사와서 한강물 넘어올라오는거 목격함요.
@zsdaxc4567 Жыл бұрын
올해가 소양강댐 50주년이라서 나온 방송이기도 하네요.감사합니다!
@지니-n8j8r Жыл бұрын
우와...소름돋아요ㅠㅠ그때 태어나신분들 다들 고생했어요.
@gabofilmtv9858 Жыл бұрын
그당시 성내동주민이었습니다. 국민학교도 다니기전인 5살이었는데 집은 물에 잠기고 도로는 엄마 허리높이 이상으로 물이 차서 엄마가 목마 태워서 윗층 주인집으로 대피한 기억이 납니다. 그랬던 엄마가 이제 70대 중반이네여 ㅠㅠ 엄마 사랑합니다
@c.j-win80397 ай бұрын
보이지 않는 곳 에서 힘써주신 모든분들 감사합니다
@똘아이-f1o Жыл бұрын
저때 북에서 보내온 물자중 일부는 안보교보재로 일선 학교에 보내졌던 기억이... 옷감은 꺼끌하고 식량도 도정기술이 떨어져서 우리쌀과 다르다는걸 첨 알았던 시기...
@wpzmfha08 Жыл бұрын
서울 대홍수 인간의 힘으로 이겨내서 너무 대단하지만 역시 자연재해는 인간의 힘으로 다 막아내기에는 역시나 역부족이죠 미리대비하고 관리하는게 좋죠
@dudtkddjqrpdmltls Жыл бұрын
빙하가 녹고 있으니....
@이승호-d9e Жыл бұрын
당장 여름만되도 강남역 걱정하기 바쁨..
@saefsef3862 Жыл бұрын
사기 1위 노ㅂI 민족 기생 민족 표절 민족 엽기 민족 소국 말살이 필요하다 !
@김경민-w7i Жыл бұрын
저때뿐아니라 80년대 후반 성내동 풍납동은 상습침수였죠. 철없이 수영장처럼 들어가서 놀기도했는데… 스티로폼 서너개엮은 뗏목으로 가재도구 꺼내시던 어른들도 생각나고
@goodbyedpi Жыл бұрын
운 좋게 소양강댐 방류기간에 방문해 실제로 방류현장을 본적이 있는데 진짜 장관입니다
@천재-y8x Жыл бұрын
군생활 하면서 항상 지나치던 소양강댐의 새로운 역사를 알게되었습니다
@j40220able Жыл бұрын
이때 나의 고향이 물바다가 되었고 그로인해 고향을 버린고 다른 곳으로 강제 주하게 되었는데 어릴때 추억이 없어 진다는게 얼마나 잔인한건지 경험 안해. 본 사람은 모릅니다
@HI-tg3ji5 ай бұрын
어차피나이 먹으면 거의없어지죠ㅜㅜ
@somuatv10 ай бұрын
19:10 애초에 자존심때문에 지원제의를 거부할줄 알고 떠본거였다네요 저때 무리하게 지원해준 북한은 물자가 부족해서 그 해 농사를 망쳤다는 아름다운 후문이 있습니다.
@이름성-h2y6 ай бұрын
떠본건지 아닌지 어떻게 아나요?
@팝송용계정-d4g6 ай бұрын
@@이름성-h2y 지원 규모가 북한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신청년6 ай бұрын
저때 쌀의 질이 너무 안좋아서 밥은 못해먹고 떡을 만들어 먹었답니다
@이름성-h2y6 ай бұрын
@@팝송용계정-d4g 감당가능하니까 쌀준거아님?
@hggghdrhks6 ай бұрын
정치병자들 진짜 ㅋㅋㅋㅋㅋ음모론은 끝이없네
@kimsujeong1284 Жыл бұрын
그 당시 뚝섬 근처에 살던 친구집이 아파트 1층이어서 집이 뼈대만 남기고 홍수로 사라졌었는데...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익명-j9e Жыл бұрын
헐 ………역시 꼬꼬무 덕분에 몰랐던 일도 알게됬어요! 꼬꼬무 화이팅 조현우 선수 화이팅!
@정의와공의-h4j Жыл бұрын
나 국민학교 5학년때죠. 생생히 기억나죠. 이후로 6년뒤 90년도에도 심했었죠. 풍납동 또 잠겼고, 아산병원도 잠겼었고, 그때 정주영 회장이 열받아서 개인돈 몇십억 들여서 공사한사건, 그얘기도 다뤄주세요. 그뒤로 풍납동 제계발 잘됐었죠.
@정의와공의-h4j Жыл бұрын
지금, 재방송으로 제대로 보고 있어요. 제작진분들??? 6년뒤 90년도에 풍납동 비로인한 재난사건, 꼭좀 다뤄 주세요. 그땐 더 심했었거든요. 그리고 푹우가 끝나고, 정주영회장이 아산병원과 풍납동 주민들 위해서 그때당시 몇십억 들여서 공사한 사건도 세세하게 다뤄줘봐요. 그때당시 아산병원도 지하는 물론이고, 지상3층 까지 잠겨서 모터보트 타고 구명 했거든요.
@김봉구-x3g Жыл бұрын
춘천에 있었습니다 소양강댐 방류 대단했습니다
@surva5487 Жыл бұрын
참고로 저때 북한은 남한이 자존심때문에 거절할줄알고 지원해줄까라고 말한거라고함...ㅋㅋ 자기네가 더잘산다고 선전하려고 "지원해줄까?" 한거라는데 우리가 받으려고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지원한거라고 합니다...ㅋㅋㅋㅋ
@yin_exig6 ай бұрын
ㅋㅋㅋㅋ
@bona7233 ай бұрын
ㅋㅋㅋ설마 받을까 해서 말했다는 소리 저도 들었어요..
@토대부귀3 ай бұрын
바로 납죽 옴뇸뇸 받아먹기
@들짐승-j2c2 ай бұрын
저때 어른들이 북한에서 보내준 쌀이며 생활용품들 질이 너무 떨어져서 닭사료로 쓰고 안쓰다 다 버렸다더군요.. 북한은 설마 얘네가 받겠어? 하고 찔러봤던건데 준비도 없다가 급하게 죽기살기로 끌어모아서 체면구기는건 면했다고..
@스타일김-v4l Жыл бұрын
너무 아찔한 시절이였네요 항상 미래를 준비하고 예측해야한다는 교훈을 들려주는 방송 이였습니다
@팡팡이-i8o Жыл бұрын
저때 다같이 마당하나 두고 살았었는데 나와보니 마당이 수영장이 되어있었고 길거리 나가면 초 2였던 내 옆구리까지 물이 차있어서 신나서 수영하고 놀았던 기억이~ 근데 그때 물에 화장실의 구더기도 떠나니고;;
@채예은-v1z2 ай бұрын
진짜 낭만이 있던 시대였네요.. 다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돕다니 너무 대단해요
@p293-b1d5 ай бұрын
어두운 상황속 모든 사람들의 의지가 모여서 어둠을 싸워 이기며 다시 웃음과 행복이 돌아온것이 마치 소설속에 기적이란 단어 같네요. 우리나라의 대단하고 멋진 역사로 기억하며 감사함을 전합니다....
@동물사랑-c6cАй бұрын
우리집은 성수대교지나서 강북에 바로있는 행당동 인데... 전체적으로 지대가 높아서 그런가... 40년동안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집주변 도로에 물 고인거를 못봄... 예전에는 몰랐지만 나이들고보니 수해걱정 안하고사는것도 참 감사한일 이라는 것을 느낌...
@kristah7223 Жыл бұрын
해외에서 시청중인데 눈물이나네요. 우리도 한때 너무 못살았는데 늘 노력하고 개선하고 협력해서 발전해왔으니까요. 심지어 북한도 도왔었구나!
@lIlIIlIl2 Жыл бұрын
그 당시 현장에 계셨던 분들은 어떤 심정이셨을지 ㅠㅠ 감사합니다
@fulgidstone11 ай бұрын
그당시 천호동에 살고 있었는데요. 천호사거리 전체가 물로 잠겨있는걸 봤었죠. 성내동은 물론이고 건너편 풍납1동에 살던 친구는 집이 침수되서 난장판이 된 집을 치우고 있었구요. 그 당시 천호동은 천호사거리 주변지역을 제외하곤 큰 피해는 입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당시 성내동과 풍납동 쪽은 배수펌프장 고장까지 겹쳐 난리가 났었지요.
@이세영-p8g Жыл бұрын
성수동 4살때인데 기억나요 물 넘친다고 한강구경갔다가 단독주택인데 옆 공장 2층으로 피난갔어요. 한강3수문에 모래주머니 쌓고 그거 구경했던거 기억남. 어릴때인데 생각나는 것도 신기함
@나다띱때끼야-m4y Жыл бұрын
아 진짜 기억나네 제가 국민학교 1학년때 이층까지 물이 올라와서 옥상에서 헬기로 구해져서 사람들이랑 성내동 천호동으로 그때 북한에서 쌀 받아서 그걸로 밥먹고 그랬는데
@キムミミ Жыл бұрын
97년인가 98년에도 비 엄청 와서 한강고수부지 모두 잠겨 높이 3 미터 넘는 가로등까지 거의 잠겼음. 그때 반포대교 바로 옆 아파트 살아 복도에 나와 떠내려가는 가구, 물건들, 고수부지 보고 놀랐던 기억남. 밤중에 아파트에서 방송함 모래주머니 한강 굴다리쪽에 쌓는다고 남자분들 나와 도와달라던 기억도 남.
@블루잉-p7v Жыл бұрын
96년일 거에요. 그때 전 철원에 군 복무 중이었는데... 막사 근처 언덕 무너지고 나무 다 쓰러지고 전봇대 쓰러져서 매인 전원 끊기고.. 식수 끊겨 빗물 받아 먹고;; 자다 말고 비상 터져서 뭔 일인가 했더니 군수창고 탄약창고 전부 물 차올라서 싹 다 옮기고 추억 돋네요.
@lododoss10 ай бұрын
저도 기억납니다 당시 한강 고수부지 입구가 수문역할을 했었죠.. 지금은 한강을 안가본지 오래되서 아직도 입구 천장에 철문이 달려있는지는 모르겠네요 ㅎㅎ..
@hwan20165 ай бұрын
@@블루잉-p7v서울 기준으론 98년일거에요. 서울도 96년 비 많이오긴했는데 서울은 1998년이 훨 넘사급으로 왔어요. 8월 한달 동안 총 1,200mm인가 왔다고 봤네요.
@Kikiki0034 ай бұрын
저도 기억나네요. 무슨 비가 종일오고 다음날도 오고 계속오고 ㄷㄷㄷ
@gomdori1089 Жыл бұрын
서로돕는거눈물난당 ㅠㅠ
@김광열-f7f11 ай бұрын
한국 국민 대단해요 멋져요❤
@kbcnews9305 Жыл бұрын
저도 신나게 물에서 놀았던 기억이... 다행히 울동네는 안잠겼었지만 모래주머니로 물 못들어 오게 막아두고 그때 난지도는 완전 잠기고 똥물인지도 모르고 신나게 놀았는데 피부병 안생긴게 신기 ㅋㅋㅋ 한강넘치지 않게 해달라고 피난가방 싸두고 기도하고 잤는데 아침에 있어나니 안넘쳤다고 유치원 가야한다고해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가긴 또 싫었던 기억이.... 울엄마는 그때 밤 새 잠도 못자고 기도하면서 뉴스들으며 우리곁을 지키시고..... 지나고나니 추억이네. 수재의연금 엄청 걷었죠. 그리고 몇년후엔 또 북한에 대비한다고 평화의 댐건설한다고 성금도 걷었는데....
@SEXY_GIRL735 Жыл бұрын
북한도 어려웠을텐데 고맙네요 지금이라도 북한에게 물자 지원을 돌려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SEXY_GIRL735 Жыл бұрын
굥줄리가 할리 없지만요~~~~~~~~,,
@nanajam7777 Жыл бұрын
@@SEXY_GIRL735 지금까지 많이 줬는데 왜 또 줘요?
@SEXY_GIRL735 Жыл бұрын
@@nanajam7777 2찍 조용
@nanajam7777 Жыл бұрын
@@SEXY_GIRL735 논리적으로 반박 못하고 "2찍 조용"ㅋㅋㅋ
@nahyeon1482 Жыл бұрын
단순히 댐이라는 구조물이 무너지는 문제가 아니었음 댐이 무너지면 춘천시 전체가 산사태+수몰 루트였어가지고.. 춘천시 전체 목숨이 걸린 문제라 무조건 안 열수는 없는 상황
@초영-y7x11 ай бұрын
이해할 수 없네! 30억톤이면 춘천시만 문제가 아니라, 서울을 포함한 한강 전체가 잠기는데?ㅋㅋㅋ
@nahyeon148211 ай бұрын
@@초영-y7x 한강 일대라면 서울의 일부이고 수량이 내려가는 동안 대피시간은 벌 수 있지요. 그런데 댐이 붕괴되면 춘천 시민 전체가 삽시간에 황천길 가는거구요. 당연히 서울도 타격입지만 30억톤이 흘러가면서 당연히 지류들로 빠지면서 여파가 줄기 때문에 춘천~서울 사이의 다른 지역들이 순차적으로 타격입겠죠 말씀하신거랑 반대로 서울만의 문제가 아닌 상황이었음
@range55829 ай бұрын
비가 전국에 내렸고 한강이 좀 위해도 댐 터지는 것보다는 나았다고 봄. 댐 터지면 도시가 아예 죽음;;
@wh19108 ай бұрын
댐터지는것보다 수문개방이낫지;; 도대체어떻게생각해야 댐터지는게 낫다고생각을하지
@wh19108 ай бұрын
수문개방은 많은양이지만 비교적 천천히 개방이고 댐터지면 한방인데?
@남자탁용삼 Жыл бұрын
소양강댐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이 만들었구나
@김규원-t6f Жыл бұрын
박정희대통령이 기획해서 현대건설이74년도에준공했읍니다
@킴써니-d4u Жыл бұрын
초4때라....뉴스로만 봐서리 다만 .....저 보트타면서 사람들이 서로 도운거는 기억나네 또....매년 태풍때마다 이제민 수제민생기고 학교에선 돌림노래처럼 성금모금하고 그게 꼭 매년 반복된 행사였지 그래도 나름발전하긴했네 갑자기 쓸려가는건 많이 사라졌으니 예전엔....단위자체가 달랐죠 인명피해가
@구마적-v1w Жыл бұрын
와 만약에수문개방안하고 그냥방치했더라면서울전체가 물바다가됬을거생각하니깐 끔찍하다 ;;;;
@이름없음-i8y2n Жыл бұрын
수문 개방 안하면 당장 춘천시부터 날라갑니다
@리디야산드라6 ай бұрын
시나리오상. 춘천, 서울 전부 날라간다더군요
@나매일배고픈 Жыл бұрын
이래서....내가 돌잔치부터 애기때 사진이 없음....ㅠㅠ😢
@jgypsy495612 күн бұрын
아빠는 키작은엄마 업고 나는 빨간 고무다라이 타고 윗집오빠가 밀어주고 그렇게 학교강당으로 피난갔던기억 어렸는데 찰나 찰나들 기억남 그때 그 오빠도 가슴까지 물이 찼었는데😢 잘 지내시죠? 감사했습니다!
@SANA-sana96 Жыл бұрын
전자제품 고쳐준건 지금의 일류기업이 된 삼성입니다 ㅎㅎㅎㅎㅎ
@bbmania4274 Жыл бұрын
제가 중1이었고 저도 잠실에 살았지만 제가 산 동네는 멀쩡해서 너무 신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때 반장이었던 저는 풍납동이랑 성내동 사는 반 아이들 집에 전화를 다 돌려서 상황 파악을 하라는 담임의 말에 따라 엄마랑 같이 애들 집에 전화를 막 하던 기억이 나네요. 정말 티뷔에서 눈을 못 떼고 보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그렇게 못 살때 아니에요.. 못 살아서 북한의 도움을 받은게 아니었죠. 그래도 빌렸던 구걸해서든 뭐던 저렇게 보낼 사정은 된 북한이었는데 지금 꼬라지를 보면 참 북한도 딱합니다. 하여튼 예전 생각많이 한 에피소드 였습니다.
@나가-h3t10 ай бұрын
못살아서 북한의 도움을 받은게 아니라, 아웅산(버마) 테러 1년 직후 입니다. 국제적으로 완전 고립이 되었을 때 북한이 이걸 계기로 벗어났습니다. 정치적 의도도 매우 깔려 있는 도움이였죠.
@용감한제리 Жыл бұрын
우리 어무니가 비올때마다 자기때엔 돼지,소 들 둥둥 떠다녔다고 지금 내리는 비 별거 아니라 했는데 진짜였네 ;;
@SaintKII Жыл бұрын
18:48 근데 감동파괴 조금하면 저때 북한이 우리 도와준거는 원래 도와주려고 했던게 아니라 84년 당시 성장을 거듭하던 남한보다 자기네가 더 잘산다고 대외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였음 ㅋㅋ 우리가 안받을줄알고 말한마디 던져본거였는데 우리가 옳다꾸나하고 받아버리는 바람에 중국에서 차관까지 해와서 줌 ㅋㅋㅋㅋㅋㅋ 결국 지들 빚만 늘림 ㅋㅋㅋ
@호수구름 Жыл бұрын
맞습니다ㅋㅋㅋㅋ
@haha00100 Жыл бұрын
저거주느라 빚짐?가지가지하네ㅠ
@user-p7ce8d Жыл бұрын
어쨌든 도와줬으니 고마운거 맞아요.그당시 전 국민학생이었는데 받아본 저희는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 피해입고 재산피해 당해서 너무 힘든때인때 그때 북한에서 준 물자도 정말 고마웠습니다.물질적인 피해도 피해지만 정신적으로 패닉 상태였는데 북한에서 도와준다는 그 자체로 뭔가 정신적인 위로도 받았구요..
@클룬웨스트 Жыл бұрын
어휴.. 그날 얼마나 심장 떨렸을까....
@sun400110 ай бұрын
저때 강변도로에 물이 차오른 높이가 대략 1~2미터까지 차올랐죠... 뉴스에서 가양동쪽 도로툭방이 안터지면 자양동쪽 강변도로 뚝방이 허물어진다고 했고..가양동이 터지면서 그 일대가 물바다가 되버린... 그리고 장양동쪽 한강둔치에 아름드리 나무들과 비닐하우스 치고 살던 사람들의 집..이런게 다 쓸려나가고 뻘판이 되버려서 그때부터 아주 오랜기간 공사하면서 강가가 모래밭이던 강변ㅁ이 시멘트로 공구리친 강변으로 바뀐 계기가 되고..지금의 한강변으로 개발된거죠..
@jin2696 Жыл бұрын
꼬맹이 코찔찔이었던 당시 허리춤까지 물이 올라왔었음 물에 뭐가 둥둥 떠다니길래 봤더니 땅강아지였음 ㅋㅋ 학교 끝나고 걸어왔는데 지름길 논밭쪽은 거의 한강이었고 길도 분별할 수 없었음
@JungSungMock9 ай бұрын
한편으로는 그거 예측못해 미리 방류 못한 부분을 지적하고 싶지만 그 당시 그누구도 빠져나가지안고 자기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일들을 해왔다는게 참 대단한거같다
@hanjo5896 ай бұрын
발전소면 감전되거나 침수될 수 있는데 자리 지킨게 세월호선장이랑은 다른 모습이죵
@광래김-e5u Жыл бұрын
4살때 코코블럭 젖어서 울던 한장면은 왜기억이나지.4살때인데 ㅠㅠ
@이장훈-q7y Жыл бұрын
제가 춘천 살아서 알아요 소양댐 무너진다고 난리났었죠
@kimbo_day Жыл бұрын
춘양로 생기기 전 고부랑길보다는 소양강댐에서 양구 선착장까지 배를 자주 탔던 기억이 있네요.. 소양강댐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잘 보고 갑니다😊
@k.saju.spirit Жыл бұрын
와 소양강댐 그래도 부실은 아니었네 😢
@JuJu_PaPa Жыл бұрын
정행님이 만드셨잖애
@makerchu Жыл бұрын
정주영 회장은 전설적인 일화가 많답니다. 오늘 에피소드도 처음 듣네요.
@TheLesleygore Жыл бұрын
이때 기억난다. 초딩도 아닌 국딩 3학년때 인데 xx동, xx동 등등 저지대에 사는 친구들은 지금 가방 싸서 집으로 빨리 가라고 방송이 나왔음. 이때 김xx, 구xx 두 친구는 집이 금강산댐이 폭파 되더라도 끄떡없을 고지대에 사는 친구들 이었는데 다른 친구들 틈에 묻어서 우루루 집으로 갔음. 다음날 이 두 친구들은 극대노한 담임선생님 한테 쳐맞았고, 우리는 비오는 날 먼지날리게 맞는다는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히 잘 알게 되었음.
@모든것은변한다 Жыл бұрын
1984년에 보광동에서 살았는데 국민학생이었고 물에 잠겼어요. 엄마 아빠는 짐싸서 다행히 다른 집이 한채 더 있어서 그 집으로 피난 가서 있었죠. 그때 학교도 닫았고.. 저는 동네 친구들이랑 고무 다라 띄우고 철없이 물놀이… 신났었는데 ㅎㅎ그때 북한 김일성이 남한 수해민들에게 현금 50만원에 쌀 두자루, 비단을 줬대요. 아버지 말씀이… 그거 받고 정말 좋았다고 합니다. 주민센터에서 (당시엔 동회라고 했죠) 수해민들에게 나눠줬대요.
@stonestosto1939 Жыл бұрын
저거 북한이 거절할줄알고 대외적으로 제안했다가 우리가 오케이해서 눈물을머금고 줬던 쌀 ㅋㅋ
@0케이0 Жыл бұрын
ㅋㅋ심지어 그 지원해준 쌀도 못먹을정도 수준이었음
@lkm3668 Жыл бұрын
영화로 만들어도 흥미진진할듯합니다..!
@cute._yueun Жыл бұрын
그러게요
@freestyle0803 Жыл бұрын
ㅋㅋㅋㅋ그럼 벌써 영화 한편 다봤다 황정민, 하정우, 김혜수 나와서 신파 한판찍고 마지막엔 반일 국뽕 내용 섞어서 마무리하겠지 한명 죽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때 파주 금성리에서 군복무중있는데 탄약고 점검때 스르르 무너지는 3미터 모래주머니가 뒷꿈치에걸려 죽을뻔 했지요 그해 가을 대민지원 벼베기 나가서 일반미 밥과 반찬등 먹은 기억이 나네요 금촌 성동리 잣골 오두산 추억입니다
@무메이-f8q Жыл бұрын
북한이 저때 지원해준이유는 우리나라가 안받을거라 생각해서 말한것도있음 북한이 우위에있으며 지원도 해줄만큼 풍족하다고 과시용이였는데 실제로 지원받는다고 하고나니 북한도 부랴부랴 중국에서 받아가지고 지원해줌 그후에 우리나라는 배로 북한한테 되돌려서 돌려줌
@jungsa-sinАй бұрын
저때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나보다 애지중지 키우는 할머니의 화분들이 떠내려갈때 웃었고 돈이 없어 한번도 못타던 개천가밑에 방방이그리고 스프링달린 말타기가 떠내려갈때 환호성지르고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고 먹지도 못하게하던 할머니의 구멍가게 창고의 과자들이 떠내려갈때 어찌나 통쾌 하던지~~~하지만 그때의 나의 가족들이 지금은 옆에 없으니 긴 한숨이 나오네요 ㅜㅜ
@hyopenae Жыл бұрын
말은 제대로 하자, 북한이 도운거는 우리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자기네들 선전용으로 도운거다... 제발 피디들 생각하고 이야기 짜라 진짜 저런건 미화하는거 아니다.
@user-p7ce8d Жыл бұрын
어쨌든 도와줬으니 고마운거 맞아요.그당시 전 국민학생이었는데 받아본 저희는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 피해입고 재산피해 당해서 너무 힘든때인때 그때 북한에서 준 물자도 정말 고마웠습니다.물질적인 피해도 피해지만 정신적으로 패닉 상태였는데 북한에서 도와준다는 그 자체로 뭔가 정신적인 위로도 받았구요..
@KrMorgan125 ай бұрын
@@user-p7ce8d 저때. 지원안 낸 사람 처형당했음. ㅋㅋ
@jmd68833 ай бұрын
뭐가됬던 ㅈ같은 북한이여도 도움뱓은건 사실이잖아 그리고 무슨 미화? 팩트를 말했는데
@Jjjklljjjjj3 ай бұрын
풉 인생이 부정적으로 사는 인간이네 이사람은 미래가 없어보인다
@glegyu3 күн бұрын
12:05 우리 주변에 평범하게 일하고 계신 어른들도 다 운동 하셨고, 힘 쓸줄 아시는 분들이다. 자제하고 계실 뿐이지 언제나 필요한 순간이 되면 영웅처럼 등장하신다. 항상 어른들 존경해야합니다. 요즘 애들 어른들한테 대들고 까부는거 보면 가끔은 큰일나겠다 싶습니다....
@박노진-s8e11 ай бұрын
그당시에 물이 굉장히 심하게 내렸었고 홍수도 났었던 날이 있었으며 어린나이에 장화까지 사서 싣기도 하였다! 그당시 우리집에도 물이 차서 가족끼리 바가지를 이용해서 물을 빼기도했었고 수재민 돕기선금도 하였던 기억이 난다!
@네임-v2d Жыл бұрын
1950년 춘천대첩으로 국군 재정비 1983년 중공 민항기 불시착 중공과의 외교물꼬 (6.25터진줄 알고 난리났었음) 1984년 소양댐 선방과 홍수 재난극복 북한과의 외교물꼬 (예상치 못한 구호물품 맞추랴 고생했을 북한주민들 생각하면맘이 아프네요) 그러고보니 근대 역사적 의미가 깊은 도시네요
@park965110 ай бұрын
그당시 저 어렸을때 강 뚝방 물 넘치면서 논하고 밭 다 잠기고 동네도 잠긴다해서 울면서 유포리라고 윗동네까지 리어카 타고 올라갔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지금도 생각하면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입니다........
@이용범-c1q9 ай бұрын
전 율문리 살았어요 동향분을 뵙네요 ^^*
@park96519 ай бұрын
@@이용범-c1q 반갑습니다
@줴제12 күн бұрын
정회장님의 선구안이 서울과 인근지역을 살렸네요 ㅎㅎ
@debsbig3580 Жыл бұрын
13:03 와 소름돕네... 저기 보이는 2층 조은미술학원을 85년도에 유치원 대신에 다녔는데....바로 앞에 우성아파트 살았습니다. 제 기억으론 86년도에도 홍수가 나서 우성아파트 1층 문턱까지 찼던 기억이 납니다.
@debsbig3580 Жыл бұрын
저 당시 토성국민학교 다녔던 분들...다들 잘 살고 계시죠? 어느덧 마흔이 넘은 나이에 예전 풍납동에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다들 건강하고 행복하고 즐겁게 사시길!
@myd20R Жыл бұрын
@@debsbig3580우와...전 지금 풍납동 살고 토성초 나왔는데 신기하네요
@goraebabb Жыл бұрын
84년 토성국민학교 1학년 입학생입니다. 우성아파트 살았었고 조은미술학원도 잠시 다녔었죠^^ 주신교회도요 ㅋㅋ 기억나는 담임 선생님으로는 반현숙 오기모 선생님 계십니다. 우일아파트 옆 풍납토성이라고 불리는 언덕과 자갈더미들, 논밭 스케이트장, 코팅 이름표, 오락실 모두 생생하네요. 가장 기억나는 학교 최대행사는 운동회 고싸움이었습니다. ㅎ 간만에 추억뒤지기 함 해봤네요^^
@jmun99128 ай бұрын
대한민국은 정말 국민들이 살려내는 나라구나 다시한번 체감된다
@ByungWooChung Жыл бұрын
제가 엄마 뱃속에 있을때 대홍수가 있다는건 들었는데 이정도일 줄이야...😮
@쑤기-h3p Жыл бұрын
전태어났을때에요
@BangGood29 ай бұрын
댐의 부하를 방지하기 위해 또 최대로 적재할수도 없고...정말 아찔하네요
@gupalsam1 Жыл бұрын
이때 신정동에 살았는데 아주 난리가 아니었음 대부분 재래식화장실이라 똥 떠다니고 ㅎㅎ 북괴에서 쌀하고 모포 보내준거 받은 기억이... 오목교 신정동 뚝방 밑에서 산 사람들 전부 허리 높히까지 물에 잠김~
@user-nzsmGxc7r4 ай бұрын
대감동 가슴이 찡하고 울컥합니다 그시대 영웅님들 께 감사드립니다
@스이긴토-r9q Жыл бұрын
내 세대의 이야기로군
@YS-mn9xw3 ай бұрын
그당시 춘천에서 국민학교 6학년이었어요. 그것도 소양강댐에서 가까운 우두동... 당시 군장병들 총동원해 모래자루 쌓아서 2-3m 더 높였었다고 하더라구요. 사실 그 땐 거의 매년 서울에 홍수가 났었고 83년도인가엔 북한에서 쌀도 보내줘서 수해당한 친구가 북한 쌀로 지은 도시락 밥을 가져와 한 숫가락 얻어먹어보기도 했어요. 78년인가 소양강 댐 수문 개방식 했을 때 할머니 손잡고 가서 그 거대한 폭포같은 물보라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espanalosario1456 Жыл бұрын
참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북한이 구호품을 보내온 목적과 그 질에 대한 언급은 없이 ㅠㅠ 보내온 옷감의 질 낮음은 그렇다 쳐도... 쌀엔 모래가 겁나 섞여있어서 거의 먹기 힘들엇던 ㅠㅠ
@소호영-j9z Жыл бұрын
저시대나 지금이나 국민들이 힘든건 국민들끼리 위로하는구나 필요없는 국회는 여전하구나
@TiaRua-x9u Жыл бұрын
장성규 게스트 누구임? 네랑 아밖에 안하네
@레홍-j6b Жыл бұрын
나도그생각ㅋㅋ
@김동현-f2i6s Жыл бұрын
난 당시 방배동 살았는데 보트 탈 정도는 아녔슴. 서문여고부근은 원래 침수지역이라 보토 필요. 당시 카폐촌 지하는 전부 침수. 가전제품 전부 버림. 공짜로 고쳐준적 없고 버렸슴
@년지-s8w Жыл бұрын
그 와중에 출근하고 학교가는 어른들과 학생들..... 얼마전 오보긴해도 미사일로 재난 문자왔을때 출근준비하다가 출근을 해야되나 ... 말아야 되나 엄청고민하는 나를 보는것같음... ㅜㅜ 옛날이나 지금이나 먹고살기 빠듯..
@letme40911 ай бұрын
5:00경 상황이 2020.8월에 전북 진안군 용담댐에서 발생하여계속 불어나는 저수량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방류로 충남 금산군, 충북 옥천군, 영동군 엄청란 침수사태...... 😢😢😢😢😢
@더블하트-dox6 ай бұрын
풍납동 다 잠기고 아산 병원이 물이 차니 정주영 회장 대대적인 하수도 공사 했음 그 이후론 푹우 피해 없었음 그때 생각하면 끔찍하다~ 부모님이 지방으로 할머니 병문안 가셔서 없으셨어 ㅠㅠ
@초초루-j5b Жыл бұрын
저때 웃긴 이야기가.. 사실 저 당실 김일성이 그냥 가오 한번 살려보겠다고 수재민 지원한다고 말했는데 남한에서 오! ㄱㅅㄱㅅ 하니깐 엣? 지..진짜요?; 하면서 울면서 도와줌. 지내들도 자원이 없으니깐 중국에서 빌려서 도와준게 웃음벨..
@카더라카더라-o3b7 ай бұрын
그 때 살던 곳이 다행히도 산중턱이라.... 서울시내였지만 그래서 피해는 없었는데 물이 끊겨서 동네에 안 쓰던 우물에 줄섰던거 기억나네요. 비 그치고 산 아래에 갔더니 논이 물에 잠겨서 큰 호수처럼 되어 있던 것도 기억나네요.
@gadi1871 Жыл бұрын
스압이긴 하지만 유용할 꺼 같아서 남기는데... 18:48 꼬꼬무라서 좋게 얘기하고 넘겼지만 실상은 북한이 되려 손해를 엄청 보았음 아니 그냥 김일성이 개 뻘짓하였다고 보면 되는 사건 이었음 왜냐면 당시 북한 즉 김일성은 자신들의 체제 우월성 등을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로 돕겠다고 나선 거였고 우리 정부도 당연히 예의 치레상 이 제안을 거절 할 것이다 라는 생각도 들어서 물품 지원에 나서겠다고 소리침, 근데 우리 정부는 개이득을 외치면서 받아들였고 이에 북한이 당황해서 이왜진을 외쳤다고 함 게다가 이때의 북한은 전성기 시절에 나타났던 경제력에 서서히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한 때였고 지원해준다는 물품들도(쌀 약 7800톤, 옷감 50만m, 시멘트 10만 톤, 의약품 등) 워낙 많아서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한계였었음, 그래서 중국에게까지 구걸해서라도 물자 마련에 나섰고 공장들도 밤낮없이 24시간 풀로 땡겨서 겨우겨우 맞추면서 나왔지만 물자가 너무 부족해서 전쟁물자 까지 땡겨쓰는 촌극을 펼침(이 사실은 89년에 열린 비공식 회담에 참석했던 김정일이 직접 이 사실을 언급하면서 알려졌는데 이때 김정일은 수해 때 쓰인 전쟁 물자들을 보충하지 못해서 애 먹고 있다, 이때 이후로 경제가 어려워 졌다는 식의 얘기를 했다고 함) 어쨌든 겨우겨우 맞춘 끝에 북한은 수로를 통해서 물자들을 전달했고 이걸 다시 수재민들에게 전달했으며 우리 정부도 이에 대한 보답차원에서 북한이 지원한 물품보다 100배의 가치에 달하는 전자제품, 손목시계, 양복지 등을 넣은 선물 가방을 북측 근로자들에게 전달했었고 이를 들은 김일성은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어서 개쪽팔렸다는 썰이 나오곤 했음 아 물론 이때를 기점으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 등의 행사가 열릴 정도로 남북관계가 좋은 관계로 나오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음 여담으로 북한의 물자 지원에 관한 썰들이 있는데.. 1) 위에 나온 대로 북한은 비밀리에 베이징까지 날라가서 중국에게 헬프 요청(이라 쓰고 구걸이라고 외침)을 외쳤음, 그리고 그 헬프 소식을 전해 들은 중국은 자신들이 물자 비용을 대주는 조건(대신에 그 비용 만큼 석유가 체납액 삭감등의 딜이 있었음)과 더불어서 물자의 일부를 지원하면서 나오기로 해서 물품들 중에는 중국이 지원한 물품들도 있었다고 함 아 물론 이건 조정해서 나온 내용들이지 북한은 처음부터 아예 중국 보고 자신들이 설정한 물자 전부 다 지원해 달라고 중국측에 요청하는 실로 개같은 내용을 선 제시함;;; 즉, 똥은 우리가 쌌으니 치우는 건 너네가 싹 다 치워달라는 식의 미친 내용들을 대놓고 요구한 것이었음;;;(제 아무리 같은 공산권 혈맹이라 할 지라도 이건 좀....) 2) 북한이 제공한 물자들의 품질은 평가가 엇갈렸음 쌀의 경우, 전국 각지에서 긁어 모았던 거 였는지 어떤 곳은 맛있다고 했고 또 어떤 곳은 밥으로 쓰기엔너무 질이 안좋아서 떡으로 했다는 후기들이 있었음 하지만 시멘트는 최악 이었다고 함, 시멘트는 우리가 만든 시멘트와 비교하면 그 품질이 너무 저급해서 건물용으로는 사용이 불가해서 88올림픽고속도로(일명 88 고속도로) 공사에 쓰이게 되었지..만... 그 마저도 우리나라 특유의 날림 공사 등이 접목되면서 이상이 생겨 결국 고속도로가 콘크리트 시공에서 아스팔트 시공으로 바뀌는 계기가 됨 아 물론 옷감과 의약품은 시멘트보다 더 최악이라서 영 좋지 못한 수준을 넘어서 아예 좋지 못했다고 함... 3) 물건을 전달하였던 북측 근로자들이 우리릍 통해 100배 가치에 달하는 남측 물품들을 받았다는 소식에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당국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함 그래서 북측 근로자들이 돌아오자마자 남측 물품들을 싹다 회수 하였다고 함, 쉽게 말해 당국에 다 바친 꼴 4) 이렇게 가오 상하는 짓거리를 했는 데도 불구하고 북한은 당연하게도 이 사건을 체제 선전에 이용하며 나왔음, 그 내용도 "헐벗고 굶주린 남조선 수재민..." 이라는 식의 내용 이었음 5) 이와중에 물품 운반에 나선 '대동호' 라는 배는 백령도 부근(장산곶 인근)에서 침몰하는 참사까지 벌어졌고 이 일은 후에 북한 노동당출판사가 2000년에 발간한 ‘김정일 위인상’ 2권의 내용에 수록이 됨, 참고로 해당 책에는 김정일이 대동호 사건을 언급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은 "해주에서 출발한 장산호가 해상군사분계선을 넘기 전에 (수해물자 전달 요원들을) 장산호로 옮겨 태우라" 라는 식의 지시를 인민무력부에게 내렸다는 내용으로 김정일 스스로가 북방한계선 NLL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됨(이 사실도 2010년 중앙일보의 보도를 통해 알려짐) 5) 북한의 구걸 짓을 비밀 회담을 통해 전달 받은 중국의 부총리는 정확히 5년뒤인 1989년, 한 사건으로 인해 중국 공산당에게 영원히 언급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조자양으로 우리에게는 자오쯔양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부총리였음 그리고 그가 연관된 사건은 ' 천안문 사태' 로 당시 그는 시위대에게 온정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이유로 덩샤오핑에게 버림 받았고 후에 중국 공산당에게까지 버림 받으면서 가택 연금 등의 온갖 수모를 겪었음, 그리고 그는 현재까지도 중국 공산당에서 금기시 되는 인물로 자리 잡고 있음 참고로 자오쯔양은 2005년에 세상을 떠났음
@cspark604 Жыл бұрын
81년생입니다.97년도 고등학교때 사회선생님이 말씀해주시는데 그당시 30대초반쯤의 남자선생님이었습니다.사회과목이니만큼 80년대 전반적인 사회분위기를 말씀하시다가 80년대 중반에 서울에 엄청 큰홍수가 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그당시 북한에서 쌀을 구호품으로 보내줘서 자기가족도 그쌀을 받아서 밥을 지어먹었는데 진짜 그렇게 맛없고 형편없는 품질의 쌀은처음먹어봤다고 말씀하신게 아직도 기억에 남네여.정말 맛이 없었다고 합니다.그래서 남은 쌀은 버리기도 그렇고 떡을 해먹어서 먹었다는 사회선생님의 경험담을 들었는데 님의 글이랑 정확히 일치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