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죽은 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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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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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jcast
@skjcast 3 жыл бұрын
하이데거는 현상학과 해석학적 입장에서 ‘의미’란 이해 가능성을 시간 속으로 투사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젝이 묘사하는 믿음의 작동 방식을 하이데거식으로 이해하자면, 기대를 미래로 투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적인 종교적 믿음이 초월적인 대상에게 투사되었다면, 오늘날의 믿음은 이러한 투사가 제도화되어 정착된 사회적 장치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믿는 역할은 일련의 규칙 또는 역할들이 대신해줍니다. 나는 믿지 않으면서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주체를 이중적인 분열로 몰아가는데 한편으로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며,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시간, 곧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 행동에 있어서 콘텍스트가 미치는 영향은 상상 이상인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 연구에서 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내용은 다른 영상에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젝은 오늘날 세계 질서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대-기독교 전통을 재해석합니다. 기독교의 초월적 기반을 지워버리고 대신 성령을 통한 해방의 공동체를 들여놓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그의 정치철학과 연계된 작업으로 보입니다. 이념의 필요성을 요청하기 위해 이론적 기반을 닦는 거죠. 나치의 법학자로 유명한 칼 슈미트는 법학의 개념은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고, 정치는 적과 동지를 가르는 것이며 주권은 예외상태에서 결정을 내리는 권한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벤야민은 이에 대항해 해방을 가져오는 신적 폭력을 얘기했죠. 오늘날 주권을 쥐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신학을 전유할 필요가 있고, 지젝의 작업도 이 정치신학 프로젝트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지젝의 이 작업의 대단한 점은, 서구인의 무의식의 핵심을 대담하게 파헤쳐버린 데 있습니다. 평생 종교와 사상의 문제를 연구한 조던 피터슨이나 신학자들조차 지젝이 제기한 방식으로는 전혀 생각조차 해 본 일이(또는 생각을 할 수조차) 없다는 것은, 기독교와 신에 대한 믿음이 서구인의 정체성에 얼마나 근본적인 것인지 보여줍니다. 20세기에 기독교 전통 바깥에서 기독교의 재구성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인물은 칼 융일 것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기독교 전통의 재구성에 관심을 가졌던 융은 노년에 이라는 책을 쓰는데, 욥기의 해석에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기독교 서사를 재편하려 한 작품입니다. 칼 융의 비범한 해석은 이렇습니다. 욥이 신에게 자신의 삶이 처한 부당한 처지에 항의함으로써, 신이 자신의 모순을 인식하게 됩니다. 한낱 피조물이 신의 도덕적 결함을 마치 신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듯이 주장함으로써, 맹목적인 힘 비슷했던 신이 자신의 모순을 인식하고 구체적으로 분열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 완벽한 도덕적 존재인 예수가 구원자로 오게 되는데, 완벽한 도덕적 존재인 예수의 대극으로써 절대적인 악의 형상이 형성되었고 그 대결이 미래로 투사되어 새로운 천년과 종말이 예고됩니다. 여기서 융은 인간이 성령을 통해서 다시 악을 융합하여 대극을 회복하고 구원의 길로 가게 된다는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 모델은 사위일체로, 융의 관점에서 삼위일체는 물질, 여성, 악이라는 근본적인 요소들을 배제했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융은 을 결코 수정하지 않을 평생의 유일한 책으로 꼽았습니다. 융의 마지막 작품들은 연금술에 대한 것인데, 여러 사상을 취했던 융이 최종적으로 연금술을 연구한 것은 연금술에 물질과 함께 구원된다는 관념이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한편 조던 피터슨은 을 읽은 듯하지만 이 내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욥기의 해석에 대해서는 강의나 강연에 빠져 있고 질문에 대해서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피터슨은 이 해석을 받아들이기에는 융이 취하고 있는 기독교 서사 전체에 대한 과감한 도전적 태도와, 융의 비전이 개인의 힘을 극단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염려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 지젝은 욥기를 고통의 문제로 해석합니다. 지젝이 보기에 욥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삶의 고통에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로, 욥기는 기독교 서사 내에서는 해석될 수 없는 진실을 답고 있다고 봅니다. 즉 모든 의미를 보장하는 초월적인 의미 같은 건 없으며, 이게 이데올로기 너머의 진실이라는 겁니다.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초월적인 권력은 소멸하고, 사태의 질서를 유지하고 스스로를 해방시킬 몫은 인간에게 넘어왔다는 게 지젝의 주장입니다.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이해하자면, 융과 피터슨, 지젝 모두 가장 고통스러운 내용을 담은 욥기를 기독교의 가장 문제적인 부분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고통의 문제가 종교와 믿음의 근원이며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임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또한 오늘날에도 우리의 믿음이 고통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 문제인 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믿음 체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듯합니다. 가능하다면 그 중에 더 훌륭한 믿음 체계가 무엇인지, 더 나은 방식은 없는지 찾아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제가 지젝이 제시하는 기독교의 재해석을 굳이 따로 소개하는 이유는, 여기에 우리의 관점을 급진적으로 향상시키는 면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융이나 피터슨의 방법을 따를 때 우리는 비유럽인으로서의 한계를 마주하게 됩니다. 신에 대한 더 경건한 믿음을 가져야 하고 신학을 더 공부해야 하고 등등... 하지만 지젝의 렌즈를 사용하면 즉시 유럽인과 동등한 관점에서 사태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이 점에서 지젝이 제시하는 지평이 우리에게 큰 참조점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i240kor3
@i240kor3 3 жыл бұрын
인간은 왜 고통을 받는가..
@땡그랑한스푼
@땡그랑한스푼 3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지젝이 리처드도킨스과 히친스 같이 기존 무신론자들하고 다른게... 진짜 무신론자는 초월적 경험이 있냐? 없냐?라는 것인가요?? 그리고 초반에 '신 자신이 무신론자가 됐다'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제 개인적 생각은 제가 얄팍하게나마 알기론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구원한다라는 건데... 여기서 신학적으로 '성육신' 즉 신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으로 왔다라는 어... 그런 개념인데.. 지젝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지상으로 내려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로 분리하여 신이 무신론자가 됐다라는 그런 뜻인가요??
@adonaibasileia3985
@adonaibasileia3985 3 жыл бұрын
@@땡그랑한스푼 충격과 고통은 우리가 보는 세상에 관한 시선 (곧, 지도)를 재구성하도록 요청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아내가 바람핀 이유와 수많은 학살극은 벌였던 이데올로기와 나치수용소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 또한 그러한 상황에 놓여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극악한 고통은 인간의 감각과 믿음의 상태를 극한으로 몰아가게 되고 이것은 다른 형태의 믿음을 재탄생을 강요하게 되니까요. 이러한 예수의 ‘무신론적 태도’는 그것의 일환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렇기에 지젝은 그 라마라마 엘리사박다니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낚아채 예수의 믿음이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adonaibasileia3985
@adonaibasileia3985 3 жыл бұрын
융은 선과 악은 한 동전의 양면이다 라는 그의 원형을 바탕으로 욥기에서 등장한 하나님의 악의적이어보일 모습들을 고발하고 이를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따먹게 유혹하는 뱀과 연결합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융은 신이 ‘선’만을 가진 것이 아닌 선과 악 양면을 모두 지닌 존재이며, 신의 선악 양면을 균형있게 설명하지 못한 기독교의 신학은 서구문명에 큰 그림자를 드리우게 할 것이라는 생각을 밝힙니다. 구체적인 예로, 사도신경에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후 3일동안 무저갱/지옥으로 내려가는 신앙고백이 포함되어있는데, 예수와 그리스도교의 신이 너무나도 선의 일면적인 면만 강조한 나머지 악과 저주라는 다른 한편을 등한시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으로 놓고보아, 사실 이는 굉장히 대담한 선언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피터슨또한 이 선언에 동참하기는 쉽지 않아보입니다. 아직도 저도 Answers to Job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다새-h6l
@사다새-h6l 3 жыл бұрын
ㄱㅅㄱㅅ
@송송포
@송송포 3 жыл бұрын
여기에 영상과 sk j님의 해설에 대한 독후감 같은 것을 남겨 제 생각을 공유해보고 싶습니다. 참고로 저는 철학 또는 신학 전공은 커녕 그 근처도 못가본 사람입니다. 주장에 허점이 많을 수 있는데, 친절한 지적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 영상을 보고, 먼저 스피노자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스피노자는 신을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또는 제한되지 않는) 무한한 존재로 봤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신의 특성이 세상에 확장된 것들입니다. 그러니 선이니 악이니 하더라도 신은 그것들 모두를 이미 포함하는 개념이며,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체일 뿐이다"라는 무신론과 맞닿아있습니다. (이걸 범신론이라고 해야할지, 무신론이라고 해야할지 참 난감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는 스피노자적 관점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무한한 존재인 이상 '악'의 특성 또한 이미 가지고 있고, 괴물들도 신이 만들었습니다. 욥에게 일어나는 고행들 또한 신이 준 것인데, 욥이 자신의 고통에 아무런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은 고통을 자연적(Nature)인 것, 그러니까 자연이 곧 신이라는 스피노자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자신이 만든 괴물들과 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고 당혹스러워하지만, 욥은 신을 처음부터 그런 존재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체스터튼의 설명이 이런 맥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욥기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무한한 신'은 (선악이 불분명한) 자연 그 자체이며 이것이 우리의 도덕적 근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신은 죽었다"고 볼 수 있으며, 우리에겐 "만들어진 신"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신을 만들어진 신이라며 조롱하는 것이 리차드 도킨스 쪽이라면, 만들어진 신이 인간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탐구하는 것이 영상에서의 지젝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했는데, 맥락상 신이 죽은 시대에 도덕(사랑)을 구축하러 온 것으로 이해됩니다. 욥이 죄 없이 고통받았던 것처럼, 죄없는 예수도 고통받고 죽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유언에 대해 지젝이 논한 바는 에 대해 평한 내용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부활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람이 둘 셋 이상 모인 곳이라면 어디든 형성되는, 평등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인간 관계입니다. 공자가 말한 인(仁)과도 유사합니다. 그것이 추상화된 것이 종교이고, 추상화 수준이 높아지자 종교 색이 옅어지고, 근대적인 의미의 민주국가가 등장한 것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미국이 그 예시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종교를 직접적으로 믿지 않더라도, 종교적 믿음의 추상인 국가와 사회를 통해 그 믿음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을 다루더라도 프로그램 자체 알고리즘에 대해 알 필요가 없으며, 모니터나 디바이스 같은 인터페이스를 통해 접근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지젝은 공산주의와 함께 그 기반이 될 수 있는 종교에 대해 탐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skjcast
@skjcast 3 жыл бұрын
제가 얘기하려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십니다. 제 말은 오늘날 우리가 종교나 철학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어떤 규칙을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냥 니 해석이랑 내 해석 중에 뭐가 맞니 수준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무의식적으로 중요성을 느끼고 이끌리는 것 같습니다), 이 주제가 무척 격렬하고 험난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김도헌-p8h
@김도헌-p8h 2 жыл бұрын
유익한 해석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니 본 영상과 기존에 가지고 있던 종교에 관한 생각을 다시한번 가다듬게 되었어요
@이데아-e4u
@이데아-e4u 2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es_ist_unmoeglich
@es_ist_unmoeglich Жыл бұрын
정말 감사합니다!
@멜론-x2o
@멜론-x2o 4 ай бұрын
고동 자체인 인간이 발명한것, 그게 신. 타락한 나를, 수치심을 치유해주는 자기애적 장치, 그게 신. 자유주의자들이 신을 더 강조하곤 하지.
@ramdoncooler
@ramdoncooler 11 ай бұрын
사람과 사람간의 믿음 결국 남는건 이것뿐인가 홀로선 인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writerYOON
@writerYOON 9 ай бұрын
스스로를 섬으로 삼는다면, 남이 만들어놓은 의미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세상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니, 세상 법칙을 잠시 이용하는 것이지요.
@user-182ajh
@user-182ajh 3 жыл бұрын
요즘 업뎃이 많아 너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LL-yo3ik
@LL-yo3ik 3 жыл бұрын
너무너무 좋네요 생각을 일깨워주는 것 같습니다
@i240kor3
@i240kor3 3 жыл бұрын
시편 22편에도 나옵니다. 라마 사박다니.. 절망에서 소망을 노래한 시죠. 만일 유대인들이 에수의 외침을 듣는다면 바로 시편이 떠오를 겁니다.
@이예리-v3y
@이예리-v3y 3 жыл бұрын
댓글을 안 달 수가 없네요 정말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다나카홍길동
@다나카홍길동 3 жыл бұрын
오늘도 감사합니다!!
@cioran44
@cioran44 Жыл бұрын
꺄~ 대박 재밌음
@정현우-d8k9g
@정현우-d8k9g 2 жыл бұрын
와. 니체적이네요. 니체가 도스토옙스키와 예수만은 욕하지 않은 게… 예수에게서 일찍이 이걸 감지했나.
@WhishingRaven
@WhishingRaven 2 жыл бұрын
"진짜 기독교인"
@LimFight1999
@LimFight1999 17 күн бұрын
저는 예수를 비난한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는데 아닌가 보네요. 오히려 예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카이사르야말로 진정한 초인이었다고 하지 않나요?
@hyejue
@hyejue 2 жыл бұрын
지젝이 이택광 교수님과 인터뷰할땐 정말 점잖게 말씀하셨는데...여기서는 너무 재미있네요.
@ramdoncooler
@ramdoncooler 11 ай бұрын
10:44 이부분 뭔가 이상한데? 욥은 자기 잘못없다고 말하는데 욥기 27장
@치타목살
@치타목살 3 жыл бұрын
도킨스 형님 내가 보는 영상마다 비판 받네...
@ss-wi3mx
@ss-wi3mx 3 жыл бұрын
본인 분야에선 세계 최고급이지만 철학, 무신론 쪽으로는 솔직히 바보입니다..ㅠㅠ
@lichtundwasser9044
@lichtundwasser9044 2 жыл бұрын
사실 모든 학문 분야를 완벽하게 습득하는것은 불가능하기때문에.. 자신이 평생 연구한 분야에서만 최고인거죠 뭐 반대로 평생을 철학을 공부한 지젝이랑 리처드 도킨스랑 생물학 논쟁을 한다면 지젝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이솝우화의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 교훈을 생각해서 누가 더 못났다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smokemirror1583
@smokemirror1583 2 жыл бұрын
@Astral ㄹㅇ 후설이 지적한 것처럼 실증주의가 모든 학문에 우선한다는 사고관이 문제인듯
@msg6218
@msg6218 Жыл бұрын
이 글 왤케 귀엽 ㅋㅋㅋ
@nocountryforgoblin6812
@nocountryforgoblin6812 Жыл бұрын
본인이 어그로 끈 만큼 맞는거져 뭐 ㅋㅋ
@yumyumboink3262
@yumyumboink3262 3 жыл бұрын
개꿀잼,리얼
@전자공학의악마
@전자공학의악마 2 жыл бұрын
욥은 까뮈식으로 말하면 부조리를 직면한 인간일까요?
@Y-raise
@Y-raise 2 жыл бұрын
그런것 같네요.
@정현우-d8k9g
@정현우-d8k9g 3 жыл бұрын
구독합니다.
@코알람-코인알려주는
@코알람-코인알려주는 3 жыл бұрын
기독교적 바탕으로 세워진게 아닌 우리나라는 지젝의 관점을 심도있게 생각해볼필요가있다는 말 같네요. 별개로 궁금한게 피터슨은 기독교가 영향을 끼치지않은 나라들 ex)한국 등의 나라에대해선 어떻게 얘기하나요? 모든도덕이 기독교아래서생겼다가 성립이 안되는데 이모순에대해서 어떤입장인지궁금하네요
@ss-wi3mx
@ss-wi3mx 3 жыл бұрын
피터슨은 도덕이 기독교아래 생겼다고 주장하는게 아니라 도덕법칙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초월적 가치(신)에 의존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도덕법칙 중에서 "평등"이라던가 "자유" 같은 개념은 기독교로부터 나온것이구요.
@ss-wi3mx
@ss-wi3mx 3 жыл бұрын
그리고 한국이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건 그 자체로 틀린말입니다. 동네마다 교회가 있는걸요.. 그리고 "자유"라던가 "평등" "계약" 같은 개념들은 기독교로부터 나온것이므로 그 나라 법에 "자유" "평등" "계약" 등이 구현되어있다면 그 나라 법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처럼 크리스천이 거의 없는 나라도 "평등" "계약" "자유" 등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그걸 법에 구현했으니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시면 기독교의 영향을 안받았다는게 말이 안됩니다. 기독교는 서양 전통 그 자체이고 서양 전통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코알람-코인알려주는
@코알람-코인알려주는 3 жыл бұрын
@@ss-wi3mx 제가 의문을 제기한 부분에서 날카로운 지적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리가또님 같은 분을 덕분에 항상 배우고있습니다. 평등,자유,계약의 개념이 기독교에서 나왔고 대부분의 나라에는 (심지어 일본까지도) 이 개념들이 녹아있기때문에 기독교와 분리할수 없다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다만 조던피터슨의 논의를 수용하는것에는 몇몇 어려움이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피터슨의 핵심은 ‘가치있는 것을 추구하라’ 입니다. 조던피터슨이 제시하는 가치체계의 꼭대기에는 신이라는 개념이 존재합니다. 신이 있다 없다를 떠나서 우리의 신과 피터슨의 신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다르냐면 피터슨이 강조하는것중 하나가 ‘아버지 찾기’입니다. 혼돈속으로 들어가서 아버지를 찾아서 부활시키라는 것입니다. 전통을 현대에 맞게 구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전통이라는것이 하루아침에, 100년만에 세워지는것이 아니기때문에 저는 한국 전체역사로봤을때 우리의 전통은 무엇이며, 우리가 살려야할 전통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우리는 윤리학의 근거가 부족합니다. 유교,도교,불교를 근거로 제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죠. 그렇다고 다 버리고 서구적인 가치체계를 온전히 받아들여야하는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때문에 조던피터슨의 논의를 수용하는것에 몇몇 어려움이 있다고 말씀드린겁니다.
@skjcast
@skjcast 3 жыл бұрын
@@코알람-코인알려주는 훌륭하십니다^^ 피터슨은 다른 문화권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슬람에 대해서 모른다고 얘기했고, 불교나 도교도 개별적으로 교리를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동아시아의 전통에 어떻게 구현되어 왔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좀 도식적으로 보자면, 서양 전통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뿌리를 두고 있고, 동아시아 전통은 유교, 불교, 도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헬레니즘으로부터 오늘날 통용되는 의미의 수학(특히 증명이라는 절차를 동반한), 논리학, 철학과 같은 학문과 민주주의와 같은 제도들이 비롯했고, 헤브라이즘으로부터 초월적 권위 앞에서의 평등, 인간의 책임, 구원과 같은 관념들이 발생해 로마와 중세를 거치며 정비된 실정법 제도와 자연법, 이성, 역사의 진보 같은 관념들이 배태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연에 대한 체계적 인식, 다양성을 허용할 수 있는 제도, 생산력의 비약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력의 상승이 가능해지면서 근대가 포문을 열었습니다. 이것들이 서양 전통(기독교를 포함하는)의 긍정적 속성이라고 한다면, 한편으로는 유일신의 권위에 의존하는 일신교 특유의 배타성과 자기 정당화 논리가 고질적인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학에서 '대분기'라고 이르는 시점이 있습니다. 서양이 동양의 경제력을 뛰어넘는 시점을 말하는데, 그 시기와 동력에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경제적으로는 식민지와 자원의 확보가 주요 동력으로 꼽힙니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 아프리카의 흑인들 등등 대규모의 인력을 노예로 징발하고, 그들을 몰아내고 영토와 자원을 확보하고 등등.. 근대의 눈부신 발전과 확장은 기독교적 인간이 아닌 인간들을 갈아넣음으로써 촉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로 사태의 경과를 우리 관점에서 대략적으로 열거하자면 이렇습니다. 제국주의로 불리는, 열강들의 영토, 자원, 노동력 등에 대한 이권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동아시아도 서구의 영향권에 들어섭니다. 탈아입구를 기치로 내건 일본의 근대화,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한 청의 몰락,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조선 지배권 확보, 국권 피탈과 식민 통치, 이 시기의 경험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민족 의식을 일깨우면서 근대화의 요구, 서구 사상의 수용과 재생산, 자의식의 각성을 불러왔습니다. 그 와중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긴장이 폭발한 1차 세계대전, 경제 공황으로 인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의 파시즘 부상에 따른 2차 세계대전,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으로 인한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급격한 산업화 시기를 거쳐 정보화 사회로 진입한 현재. 급격한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치며 우리는 전통과 급격한 단절을 경험하게 되었고, 변화한 생활 기반에 적합한 행동 양식을 스스로 고민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사회학에서 아노미 내지는 문화 지체 현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만, 한국은 전후의 폐허에서 개발도상국으로, 개발도상국에서 다시 선진국으로 진입한 거의 유일한 사례로서 특수성을 갖습니다. 프랑코 베라르디라는 이탈리아 철학자는 한국 사회가 한 공간 안에 수많은 시간이 겹쳐 있는 사회로서, 현대 사회의 모순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습니다. 말하자면 하드웨어의 급격한 변화에 맞는 소프트웨어 최적화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의 가치들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계승할 수 있는가, 저도 이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해왔는데, 앞으로 출산율 저하, 다문화의 유입 등과 함께 우리 사회가 장기적으로 마주하게 될 문제의 하나라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전통적으로 유교의 주제가 인륜적인 삶, 불교의 주제가 고통의 소멸, 도교의 주제가 자연친화적인 삶이라고 했을 때, 오늘날의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유교는 분수에 충실하기를 권하는 전근대성, 불교는 사회철학과 역사철학의 부재, 도교는 지구 온난화와 같은 자연 개념의 급격한 변화와 같은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계가 극복되지 않는다면 유교, 불교, 도교는 관습이나 관행으로서 남아있을 뿐 윤리학의 학문적 근거로서는 계속해서 쇠퇴해갈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날 타인의 신체, 생명, 재산, 명예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개인의 종교생활은 자유롭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헌데 종교라는 것이 법의 울타리를 넘어서 도덕을 비롯한 개인의 생활양식과 내면세계에 깊이 관계되어 있기에 중요하고 문제가 되는 것인데, 저는 이 부분에서 오늘날 종교적 차이로 오는 갈등에 대한 대안으로 현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주목하는 유교의 현실주의는 계승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아마 앞으로는 가속화되는 기술 혁신과 세계화로 인해 지나치게 배타적이거나 융통성이 없는 종교는 경쟁력을 잃어 서서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특정 종교나 교리에 매몰되지 않고도 '인륜적인 현실감각'을 유지하는 데 유교의 현실주의가 하나의 기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유교의 현실적 측면은 정치적인 국면에서도 상당히 참고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조공이라고 하는 유교 이데올로기 특유의 국제정치의 규제양식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상당히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국제관계에서 조공이라는 이벤트를 통해서 서로 공물과 하사품을 교환하고, 상대를 문명국으로 승인하고, 군신 또는 형제의 관계라고 하는 규범성을 띤 호혜적 관계에 들어선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힘의 논리를 넘어서 유교 특유의 평화사상을 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행이 초월적인 권위나 신의 명령을 내세우지 않고도 지속될 수 있었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으로, 중국 중심주의와 전근대적 혈연 요소를 걷어낸다면 문명권 간의 충돌과 종교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정교분리를 유지하면서 종교적 갈등을 중재할 만한 이념 내지는 그러한 방법론에 참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damiank8230
@damiank8230 3 жыл бұрын
사실 철학 주류의 입장은 도덕이 기독교적 전통에 나왔다기 보다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절에 기본적인 바탕은 완성됐다고 보고 있죠. 그 시절에 노예제가 문제지 자유시민에 대해서는 어떻게 서로 의무와 권리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는지 심도깊은 논의가 있었으니까요.
@박태수-n1w
@박태수-n1w 11 ай бұрын
죄다 무신론자가 아니라는 말은 다른 유신론자가 말하는 세상의 본질같은게 있다고 말하기 때문일까요 뭔가 외롭네요
@leo-ku2pf
@leo-ku2pf 3 жыл бұрын
지젝이 초반에 한 말중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가 예수님, 즉 신 자신이 무신론자가 됐다라는 뜻(말)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는듯 했으나 계속 생각해보니 저 말이 어떻게 무신론자가 됬다는 것과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skjcast
@skjcast 3 жыл бұрын
아시겠지만 기독교는 유일신교고, 소위 정통 기독교 신학에서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동등합니다. 기독교 서사에서 예수의 위치는 비범한 인간이나 예언자가 아닙니다. 예수는 육화한 신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신 자신의 절망의 표현인 것입니다. 조던 피터슨은 바이블 해석에 문학 비평가 노스롭 프라이를 인용합니다. 프라이는 바이블이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엉성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사람들에 의해 교정되고 다른 사상들과 대결하면서 나름의 논리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피터슨은 이런 관점에서 인간 역사의 정수를 담고 있는 바이블에 인간 정신의 영속적인 패턴이 표현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지젝의 해석이 충격적인 것은 다른 논리를 끌어와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신의 내적 논리를 가지고 기독교 서사 전체를 뒤집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을 통해서 지젝은 기독교의 초월성을 공격하려는 것입니다. 고전적인 초월성, 지젝이 보기에 저 위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명령하고 심판하는 아버지가 여전히 있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도덕적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임감이 줄어듭니다. 판단과 결정을 아버지에게 맡기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아버지의 명령을 가장해서 온갖 끔찍한 일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지젝은 예수의 죽음은 초월성 자신의 죽음이고 윤리적 구원의 책임은 성령이라는 해방의 공동체를 통해서 인간에게 넘어왔다고 주장합니다. 초월성에 대한 지젝의 공격은 기독교의 뿌리와 함께 서구인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에 지젝의 묘사처럼 트라우마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강력한 도발은 고전적인 형태의 믿음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형태의 윤리적 책임을 지우려는 지젝의 전략입니다. 오늘날 여러 형태의 종교적 근본주의가 부상하고 있는 상황에서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우리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Y-raise
@Y-raise 2 жыл бұрын
어떤 업보로 자기가 고통받는게 아니다. 어떤 가치관에 의해 평가하는 존재가 없다. 아무 가치관이나 계속 바꿔가며 살다 가면 그만이다. 동정심 유도나 변명 안해도 된다ㅋㅋ 위로받지 않아도 된다ㅋ 위로하는 자가 없다고 우울하지 않아도 된다!
@gadasd1342
@gadasd1342 3 жыл бұрын
오랜만에 이 영상을 다시보는데 책을읽고 인사이트가 증가할수록 정말 공감할수밖에없는 이야기 ...
@오우-r9l
@오우-r9l Жыл бұрын
어떤책을 읽어야 공감이 가나요?
@gadasd1342
@gadasd1342 Жыл бұрын
@@오우-r9l 심리학이나 의사분들이 정신학 쪽으로 강의하는거 보시면 됩니다 지젝을 이해하기 위해선 칸트 헤겔 공부는 필수긴 합니다
@Jacobson5837
@Jacobson5837 2 жыл бұрын
예신까지갔던 가톨릭신자이지만 공감가네요 혹시 지젝은 불가지론자인가요?
@skjcast
@skjcast 2 жыл бұрын
지젝은 헤겔주의자입니당
@hba3144
@hba3144 3 жыл бұрын
예수가 죽기 전에 했다고 알려진 가상칠언 내용을 모두 알아보자
@hba3144
@hba3144 3 жыл бұрын
첫째 말씀 :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둘째 말씀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셋째 말씀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넷째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섯째 말씀 : “내가 목마르다” 여섯째 말씀 : “다 이루었다” 일곱째 말씀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채권총론
@채권총론 3 жыл бұрын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죠. 눈 앞에 보이지 않아도 저기에 사냥감이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을 상상해 믿고선 무리지어 그서 잡아부리는게 인간이죠. 이걸 부정믿음이라 표현하던데 제대로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지젝의 말이 너무나도 방대한 지식의 언덕 위에서 전해지는 것이라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렴풋이 감만 잡은 듯 합니다. 인식할 수 없는 물자체의 영역에서 자유가 느껴집니다. 인간은 단지 주어진 생물학적, 자연적, 사회경제적 토대에서 짜맞춰진 태엽처럼 굴러가는 것만은 아닌 듯 합니다. 우리는 그 이상을 상상하고, 믿고, 지향하여 결국 실재에 구현해내는 것이죠. 자유의지가 단지 실천적 견지에서 옳은 것이 아니라 실로 존재한다는 얘기인것 같아 뭐랄까 가슴이 벅차기도하네요.
@skjcast
@skjcast 3 жыл бұрын
결국 믿음이란 기대(expectation)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은 신이라는 질서 아래 공동의 이상과 정교한 지식 체계들을 만들어냈고 그게 인간의 고유한 언어 능력과 정보 처리 능력 및 미디어의 발달과 합쳐지면서 다른 생물과는 격을 달리하는 능력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은 운하를 만들어내고 몇 만 톤 단위의 화물을 실은 배를 움직일 수 있는데 이 자체만으로도 엄청나지만 이를 통한 물자의 이동과 경제적 영향은 또 다른 생산물과 창의성을 허용하게 되죠. 어떤 과학자들은 우리가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인류의 활동이 지층에 퇴적되고 과거와는 구분되는 기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거죠. 인간은 결코 자연에 구속되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연에 기술적 조작을 포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다양한 창의적 생산물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이건 인간의 사회적 능력에 의해 가능합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아주 똑똑한 개미 비슷한 생물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갈등은 신들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사회학의 아버지 막스 베버가 이미 '가치의 다신교' 현상을 진단했었고 오늘날 사무엘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이라고 부른 것이죠. 사실 그 이전에도 기독교 내부의 분열이나 십자군과 같은 종교 전쟁은 많이 있었지만요. 오늘날엔 그 전쟁이 첨단 무기들을 가지고 수행될 수 있습니다. 악의 축인 이라크를 최첨단 무기로 폭격하는 미국 등등.. 냉전 질서가 사라지고 미국의 패권이 흔들리면서 이슬람과 기독교, 중국과 미국, 러시아와 미국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기타 이교도적 3세계들은 도약을 꿈꾸고 있습니다. 지젝은 이런 갈등이 근본적으로 초월성을 강조하고 절대적인 의미 체계를 전제하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온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같은 의미 체계에 포함되는 사람들만이 동지가 될 수 있고, 다른 의미 체계를 가진 사람들은 적이 됩니다. 신이 죽었다는 지젝의 설명은 초월성에 대한 집착을 공격함으로써 새로운 보편적 윤리를 마련하려는 전략입니다.
@ma-uh2ow
@ma-uh2ow 2 жыл бұрын
@@skjcast 그점이 조던 피터슨의 기독교 행보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설사 초월성에 집착한다고 해도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해진 시점이 아닌가 싶네요.
@ma-uh2ow
@ma-uh2ow 2 жыл бұрын
역사학 층위에서는 몰라도 철학이나 문학의 층위에서는 날카로운 지적으로 보이네요.
@byunghunyoon1239
@byunghunyoon1239 2 жыл бұрын
@weingood
@weingood 3 жыл бұрын
이것은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짧게 나마 말씀하실 수 있었던 구절의 일부분만을 놓고 지젝이 해석을 했기에 벌여진 오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언급한 마 28:46 구절의 난하주를 보면 ㄱ. 시 22:1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22편을 보면 다윗의 시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쓴 글이긴 하지만 다윗이 직접 겪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훗날 겪을 예언의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시 22:16-18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위 내용은 요 19: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이 구절에 나타나있듯이 미리 예수님이 겪을 일을 예언하고 성취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존재를 나타내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구약과 신약, 즉 이전 약속과 새로운 약속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요 14: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즉 성경에 구약의 내용은 예수님에 대한 것을 증거하기 위한 것(예언과 성취)이 가장 큰 목적(그 증거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 받고 영생을 얻음)이었지만 예수님이 밝히 이르시기 전에는 알 수 없었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안다고 생각했기에 그토록 하나님을 가장 믿고 따른다는 유대인들이 도리어 예수님을 핍박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사단이 교만함으로 타락한 천사가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고 그렇기에 교만함을 가장 경계해야 되는 이유를 나타내는 역사인 것입니다 결론을 말하면 시편 22편 내용을 다 읽어보면 당시 다윗이 ㅡ아직 때가 되지 않아 응답이 없는ㅡ하나님에게 절규하는 내용으로 시작하지만 뒷내용은 결국 주께 도움을 요청하고 주를 찬송하며 하나님을 따르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임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이 내용을 예수님의 십자가 역사와 연결지어 생각하면 단지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만 놓고 해석을 해 신이 스스로 무신론자가 되었다라고 오해하는 것이 아닌 예수님이 예언을 성취했다는 것과 극심한 고통과 환난 중에도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이해하거나 해석하고자 할 때는 자신의 경험과 사고로 생각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성경은 다른 성경의 구절을 통해 연결지어 유기적으로 푸는 것이 가장 성경적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의 생각이 섞이지 않는 방법입니다
@iloveu5966
@iloveu5966 3 жыл бұрын
맞는 말인데 성경안에서만 보고 해석하면 신천지식이고, 역사,문맥,문화적 상황까지 고려해서 읽어야 합니다.
@syul4133
@syul4133 2 жыл бұрын
@@iloveu5966 안녕하세요 혹시 그런 방식으로 해석한 예시를 알 수 있을까요?
@GunhaGreat
@GunhaGreat Жыл бұрын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육신으로써 내려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스스로 절대적 이데올로기를 파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 후 두 명 이상 모여서 예수를 기억하는 곳에 '성령'이 임하여 신 자신조차도 '무신론자'가 되어서 인간들을 죄로부터 자유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합니다.
@weingood
@weingood Жыл бұрын
@@GunhaGreat 성경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없이 단편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위에도 적어놓았지만 성경은 예언과 성취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예언과 성취라는 큰 틀을 가지고 들여다보아야 좋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설명드리자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한 예언과 성취의 과정입니다 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던 일인 것입니다 단지 신 스스로의 죽음으로 보는 것은 성경의 전후 맥락을 보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헸기 때문입니다 굳이 죽고 나서 부활은 왜 했을까요? 신이 ‘아 다시 생각해보니 그냥 죽지말걸’이라고 생각해서 부활했을까요? ㅎㅎ 십자가 진 후 성령이 임하는 것, 부활도 다 예언에 나와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이루리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자신 인생마저 한 치 앞도 예상치 못합니다 모든 것을 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는 사람 있을까요? 하나님은 몇 천 년을 앞서 예언하고 성취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나는 신이다 믿으라 하는 것이 아닌 이를 보고 믿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MrTanorus
@MrTanorus 10 ай бұрын
"우리해석이 맞으니까 우리방식대로만 해석하세요"
@jjjjj-p9l
@jjjjj-p9l 9 ай бұрын
어떻게 산타와 신을 비교하지 ㅋㅋ 그럼 산타도 종교로 등장해야지 붕스은ㅅㄲ
@jjjjj-p9l
@jjjjj-p9l 9 ай бұрын
지젝은 논점을 너무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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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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