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가장 큰 차이? 서양에는 있었고 동양에는 없었던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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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디정의 지식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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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үн бұрын

Пікірлер: 31
@glorios71
@glorios71 Жыл бұрын
흥미롭습니다. 동양에 논리가 없었다기보다는 다른 논리로 세상을 본 것 같습니다. 실쳬 본질 항상 주어의 자리에 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부연 설명 부탁합니다. 실체는 술어의 규정이 없이도 자존하는 자기 근거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codyjeong
@codyjeong Жыл бұрын
네. 이른바 형식논리학이 동양에 없을 뿐이지 당연히 동양철학만의 논리가 있었겠지요~ 네, 말씀하신 것처럼 실체(substance)의 성격은 자존성입니다. 그것 때문에 판단(명제)에서 술어가 되지 않고 항상 주어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존성이라는 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변하지 않는 성격, 즉 불변성과 같은 의미로 봤습니다. 그런데 '술어'의 역할은 주어에 다양한 변화를 부여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술어 자체가 변화라는 속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자존적인 것, 즉 불변하는 것, 다시 말하면 실체는 술어 역할을 하지 않고 주어에만 놓이는 것이라고 서양철학자들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기능하기는 언어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언제나 실체로 언급되는 '신'이나 '불멸의 영혼'은 판단에서 술어가 아니라 주어만으로 사용됩니다. '코디정'도 불변한 실체인 경우에는 주어만으로 사용됩니다. 물론 '코디정'이 실체가 아니 게 사용할 수도 있기도 하지만(예를 들어, 코디정, 홍길동, 임꺽정, 손오공이 있는 그룹이 있고, 그 그룹에서 발표자를 선정할 때의 판단에서는 코디정은 실체 개념이 아니라 단순한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단독자로서 코디정 한 사람을 생각할 때에는 실체가 됩니다. 그런데 실체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속성에 있고, 그것은 사멸하지 않음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코디정의 몸은 변화하고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래서 서양철학은 사람의 실체를 육체에 있지 않고 영혼(정신)에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정리해 보자면, 실체는 자존성이고, 그것은 "불변성"을 뜻합니다. 우리가 어떤 판단에서 '불변한 것'을 지칭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실체가 되고 따라서 주어의 위치에 놓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실체인 그 주어의 의미를 알고 싶은데, 그 경우 주어에 대한 다양한 속성, 즉 술어를 연결하게 됩니다. 어떤 술어를 연결하느냐에 따라 주어의 성격이 변화하게 되는데, 그때 변화한 것은 주어 자체가 아니라 주어(실체)에 붙어 있는 변화하는 속성이고, 그걸 철학자들은 우연성(우유성)이라고 칭하면서 실체와 구별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substance는 실체로 번역해서는 안 되고 '본질'로 번역해야 하며(과거 100년 전에는 이걸 '태극'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일본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우유성(accidents)도 우연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체'라는 단어는 reality에 어울리는 단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glorios71
@glorios71 Жыл бұрын
@@codyjeong 무척 흥미롭네요 그리고 그런 접근으로 새롭게 이해되는 것도 많아 보입니다.ㅎ 다만 저는 지식이 부족하지만 문득 드는 의문은 실체의 자리로 가는 개념은 신, 영혼 말고도 그 어떤 사물이라도, 가령 강아지, 돼지, 산 등 등 모두가 존재론 적 관점에서 불변의 본질의 담지자로 간주될 때 실체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것이죠. 그리고 실체를 본질로 번역하는 건 아무래도 철학사의 계보를 볼 때는 무리가 따르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실체는 논리학이전에 존재론적 개념이고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도 본질과 실체는 엄밀히 구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무튼 실체와 본질은 같은 것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고 생각이듭니다. 그럴 경우, 본질주의자라는 비판도 가능해 보입니다. 물론 논리학은 기본적으로 존재론이 아니라 추상적인 본질의 연관 형식을 다루는 학문이기는 합니다만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같은 학자들은 논릭주의, 본질주의를 강력히 비판한 걸로 압니다.
@codyjeong
@codyjeong Жыл бұрын
@@glorios71 칸트에 따르면, substance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개념이고, 그런 관점에서, 존재론적이 아니라 논리적 개념으로 다루어지고, 그런 관점에서 말씀하신 생각이 제게는 아주 적합하다고 들립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사물이든, 강아지, 돼지, 산도, substance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를 감지하는 까닭은 변하지 않는 개념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데, 칸트는 순수 개념으로 그걸 substance라고 분류했습니다.... 이 substance에 대한 이해는 워낙에 철학자들마다 다양한 얘기를 한 것 같고, 모두가 옳다/그르다 라는 관점보다는, 예컨대 극단적인 유물론자들에게 substance는 원자가 될 것이고, 말씀하신 것처럼 플라톤에게는 이데아, 이런 식으로 철학사적으로 여러가지였다, 로 이해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어느 입장에서든 공통적으로 substance는 존재의 본질을 가리킵니다. 본질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저는 그 질문이 substance가 무엇이냐라는 질문과 동일하게 들립니다. 당연히 입장 차이에 따른 대답이 나올 것 같고요... 하여튼 어떤 경우에도 substance는 reality와 아주 독립적인 관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reality와 아주 밀접해지는 것 같습니다. substance를 '실체'로 번역한 것은 어느 일본학자에게서 비롯된 것인데, 제가 이 단어의 번역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실용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서양철학의 본거지에서는 substance와 reality를 직관적으로 구별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일단 단어의 형태가 너무 다르고요. 의미도 명확히 구별되고요. 철학사조에 따라 이 두 단어의 거리가 멀거나 가까워지는 것을 이해하는 묘미에 어떤 언어적 장애는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실체'와 '실재'로 번역해서 사용하는 우리의 경우에는 이 단어가 쓸데없이 가깝게 붙어 있고, 평범한 한국어의 용법에서 '실체'는 실제로 있는 것을 전제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다", "그 두려움은 실체가 되어 그녀를 덮쳤다", "짙은 안개 때문에 어떤 실체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등등에서 '실체'라는 단어는 실제로 있거나 생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substance 개념은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reality 개념에 적합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헷갈리고 혼란스럽다... 는 기분이에요. 한편 '실재'라는 단어는 우리 한국인이 일상 생활에서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지식인이 자기 지식을 어필할 때에만 등장하는 단어로, 영어 reality의 평범성에 비추어 보면, 그런 식으로 '실재'를 쓰는 것은 우리가 아주 손해보는 일입니다. 이 단어도 일본 학자들이 한자를 조립해서 발명한 단어인데, 굳이 손해보면서 따라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평범한 한국어와 철학 용어의 어긋남은, 일본 번역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런 식의 어긋남을 100개 정도만 개선하더라도, 철학이 훨씬 쉬워지지 않을까, 옛 인류 조상들의 지혜를 더 쉽게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다양한 반발과 비판이 있겠습니다만.... 보잘것없는 제가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요;;;;
@심남수-v1r
@심남수-v1r Ай бұрын
공맹주가 철학이 아님, 봉건정치윤리임. 자꾸 동양철학이라고 하지말것.
@codyjeong
@codyjeong Ай бұрын
네. 무슨 말씀 하시려는 것인지는 알겠습니다만, 그런데 그런 사상도 철학이에요.
@9m-thursday
@9m-thursday 4 ай бұрын
기독교인이었는데 성경을 너무 깊게 연구하다가 불교로 갈아탄 분이 생각나는군요. 그분의 성경해석을 봤는데 모든 단어에 대해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더라구요. 역사적이거나 인류사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좋을 부분도 지나치게 단어자체에 매어서 의미부여 하다보니 성경인데 도교?같은 느낌을 받았던기억이 있어요. ㅋㅋㅋㅋㅋ 고학력에 경제력도 있으신 분이던데. ㅎㅎ
@codyjeong
@codyjeong 4 ай бұрын
그게 좀 멋있어 보이기도 하지요. 아주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요. 저도 꽤나 기독교 문헌을 읽고 고민해 봤는데요. 서양철학과 동양사상도 공부해 보고요. 사람은 저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은 그렇게 쉽게 섞을 만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성경을 불교 이론이나 음양사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새로운 종교일 뿐, 올바른 기독교, 성격 해석은 아닌 것 같다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 서양의 수천 년의 역사는 그것대로 존중하고, 동양의 수천 년의 역사도 그것대로 존중하되, 그 차이를 잘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앞으로 충분한 시간이 흐르면, 관련해서 여러 가지 영상을 만들어볼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그런데 뭐, 이런 해석이든 저런 접근이든 옳고 그름 없는 생각일 것 같아요.
@venekr1
@venekr1 Жыл бұрын
Good job!!
@codyjeong
@codyjeong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평냉조하
@평냉조하 Жыл бұрын
한국은 행동양식적인 관념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나라에서도 서양의 논리학이 좀 더 뿌리내리는게 가능할까요?
@codyjeong
@codyjeong Жыл бұрын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모든 게 빠르게 바뀌는 사회에서는, 굉장히 빨리 뿌리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미 서구사회와 큰 차이도 없고요....
@oooo-yt5lp
@oooo-yt5lp 6 ай бұрын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동양철학은 지혜이고 서양철학은 지식이라는것이 제일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지혜는 내학(内学)이고 지식은 외학(外学)입니다. 근본적인 배움의 방식자체가 완전이 다르니 결과도 다른겁니다.
@如去여거천기누설
@如去여거천기누설 Жыл бұрын
도가도 비상도 이것에 대해서, 99%는 전통적인 해석을 하고 있으나, 실상 그 해석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소통하자고 해놓고, 좋아요만 눌러주시면, 그건 소통이 아닙니다. 노자와 여래는 같은 말을 하였다. 그것이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 와 여래의 고집멸도 무고집 멸도 이다. 이는 전통방식의 해독이 아니다. 참고로 佛부처라는 한자에는 3개의 뜻이 있다. 1佛어렴풋하다, 2佛어기다. 3佛부처, 이 모든 것을 사용하여서,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佛어렴풋한 부처로서 중생의 괴로운 삶을 살아가는 너희들이 깨달음을 얻고 해탈하기 위해서는, 苦集滅 道 고통과 괴로움을 멸하기 위해서는 도를 하라. 道可道 도를 하는 것이 옳은 길이다. 단 신뢰할 수 있는 可정도 可쯤 까지만 도를 하라 2단계 도를 함에 도를 신뢰할 수 없다면. 非常道 常항상 해오던대로 道도를 해서는 非아니된다. 그러한 도를 佛어기고, 滅道 즉 득도한 도를 깨트려서 없애버리는 멸도를 해야 한다. 無苦集 滅道 득도자로서, 깨달음을 얻고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무고집 상태에 있는 노자와 여래와 같은 해탈을 하기 위해서는 멸도를 하라. 또는 멸도를 하면 무고집 상태에 이른다. 노자는 道無有水 라고 말했다. 물은 있으되, 도는 실체가 없다. 그러나 멸도=비상도를 하지 못하면, 물에 빠져서 죽듯이, 없는 도에 빠져서 결국에는 평생을 헤메다가 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도에 빠져서 죽는다.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하는 것이 道無이다. 無없다.無허무의 도. 無말라(금지의 뜻) 즉 도라는 것은 실체가 無없는 가상현실 세겨로서 無허무의 도 이니, 평생을도에 빠져서 살지말고. 늘 하던 도를 금지하고 하지 無말라 名可名 실체가 없는 가상현실 세계일지라도, 너희가 도를 체험하게 되니. 그것을 도라고 부르는 名이름은 可가히 可옳은 名이름이다. 非常名 그러나, 너희가 常항상 불러오던 道도라는 名이름은 실체가 없는 것의 名이름이므로, 없는 것의 名이름은 名이름이 非아니니. 道도라고 名불리는 것은 名이름이라고 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득도한 도를 버리고 멸도를 함으로서, 노자와 여래와 같이 육체를 벋어버리고 해탈한 영으로 깨어날 수 있다. 흔히들 멸도를 여래의 경지라 하면서, 그 이상을 나아가지 못하지만, 멸도가 비상도 임을 알고, 득도자는 한발 더 나아가서, 얻은 도를 깨트려서 버리는 용기를 내야만,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참나/진아를 찾아서 해탈을 할 수 있다. 늘 듣던 이야기가 아니니, 이해가 어렵다면, 소통을 해서, 님의 것으로 만들어야합니다. 연구해놓은 많은 자료가 있어요. 좋아요만 클릭하면, 그건 큰 실레가 됩니다. 가까우면 차나 한잔 하십시다. 득도및 멸도 체험자 입니다. 제가 배울것도 많은 것 같습니다.
@정현우-k8g
@정현우-k8g 11 ай бұрын
어이구
@JAY.K
@JAY.K Ай бұрын
무례함이 도를 넘어서시네요 ㅋㅋㅋㅋㅋㅋ
@如去여거천기누설
@如去여거천기누설 Ай бұрын
@@JAY.K 구체적으로 뭐가 무례한지, 지적해주시면 좋겠네요.
@JAY.K
@JAY.K Ай бұрын
@@如去여거천기누설 다 아는 것을 본인만 모르시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요.. 지금까지 헛배우셨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네요. 화이팅입니다.
@如去여거천기누설
@如去여거천기누설 Ай бұрын
@@JAY.K ㅉㅉ 사람과 인간의 차이가 뭔지도, 분별하지 못하는 분이 할 말이 아닙니다. 내 자신있게 말하는데, 지구 인류 80억 명 가운데, 사람과 인간의 다른점을 분별하는 이는 님을 포함해서, 단 한명도 없담니다. 이 차이도 분별하지 못하면서, 뭔 철학을 논하시나요. 참고로 노자와 여래를 제외하면, 서양 ㅈ철학자나 동양 철학자나, 도올(乭)조차도 분별하지 못하고 있어요. 혹여 님이, 분별이 가능하다면 사람과 人間인간을 분별해보세요. 댓글보고 풀어드리지요. 모두가 그렇다고 할때, 단 한 명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 한 명은 미쳤거나, 모두가 모르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이죠. 님은 그 한명을, 모두가 아는 상식에 비취볼때, 미첬다고 보는 것이랍니다. 상식이 상식이 아니었음을, 알아볼 눈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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