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토기장이 비유는 예정론을 지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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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жыл бұры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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Пікірлер: 391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4 жыл бұрын
아티클 번역본 링크 blog.naver.com/osm4709/221700814790 아티클 내용이 과격하다 생각하시면 마지막까지 봐주세요. 아티클에 대한 저의 개인적 평가가 있습니다. 참고: 이 아티클을 쓴 블로그 주인이 평신도인 것을 알게 되어 이후 근거 없는 주장이 없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신학계에서 전형적으로 쓰여지는 논증들을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펼친 논증이 크게 2가지인데, 첫번째가 로마서 9장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며, 여러 신약학자들이 이런 내용을 지지합니다. 대표적으로 신약학의 거장인 F.F 브루스가 말라기 1:2-3절을 근거로 야곱과 에서는 이스라엘과 에돔을 상징한다고 주장합니다. 두번째 논증의 경우에도 전형적으로 쓰이는 논증인데, 에서를 미워하였다는게 증오의 표현이 아니라 야곱을 선호했다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9장에서 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다'라는 표현도 같은 표현이라고 합니다.
@user-jr8wx5gj5l
@user-jr8wx5gj5l 4 жыл бұрын
오오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야곱, 에서, 모세, 바로 등은 국가나 민족을 대표하는 이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바울은 이런 문맥을 슬그머니 이전의 도식에 속하지 않은 새로운 공동체로 이끌어내고 있지요. 바울은 이들이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부름을 받은 이들이며, 남은 자라고 설명을 하고요. 바울은 이들이 선택된 이유를 개인의 결심이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결심으로 설명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바클레이의 주장과도 연결된다고 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자격없는 은혜(비상응성)과 우선적인 선택을 강조했다는 것이죠.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아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는 개인에게 적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롬 9장의 토기장이 비유가 예레미야를 암시하는 게 맞나요? 저도 그렇게 알고는 있었는데... 이사야도 토기장이에 대한 비유를 하는데 어조 자체는 이사야랑 훨씬 가깝거든요. 뭐, 둘 다를 암시했을 수도 있지요.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사 45:9) 이건 아무래도 욥기의 하나님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선택이 절대적이며, 인간이 가치평가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네요. 자, 그러면 예정론이 맞는 것일까요? 바클레이는 바울이 극대화한 특성을 '비상응성'으로 한정해요. 다시 말해서 바울은 예정을 극대화하지 않아요. 롬9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좀 강조하거나 과장한 건 아닐까요? 이렇게 보는 이유는 다른 본문에선 예정과 배치되는 것 같은 표현이 등장하니까요(렘 18장 처럼요) 그래서 롬 9장을 굳이 분류하자면 예정론을 지지하는 구절은 맞는 것 같아요. 다만 그것과 상충되는 구절이 성경에 존재하니까요. 극단적 예정론은 성경 전체의 지지를 받기 힘들다고 봅니다~
@user-er8tm1ko9s
@user-er8tm1ko9s 4 жыл бұрын
완전 저랑 공감되요 진짜 예정론에대해서 엄청 깊이생각했는데 장로교인으로서저는 너무 이상하다라고생각했어요 감리나 다른교단은 다르게생각하는지도모르고 장로교회에서의 가르침만 알고있었으니 신앙생활에있어서 먼가 아는게부족하다 즉 하나님은 무서운분 이렇게생각하게되는 ,,감사합니다
@user-wh2fm7zd5n
@user-wh2fm7zd5n 4 жыл бұрын
여전히 스스로를 자력으로 구원할 능력은 없지만, 적어도 구원자이신 예수를 스스로의 의지로 믿을 능력은 주어졋다는 것입니다...여기서 스스로의 의지로 믿을 능력은 주어졌다면 그 능력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전에 가지고 있던 의지를 말하는건가요? 아니면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지를 말하는 건가요? 만약 타락한 인간의 의지라면 하루에도 몇번이고 변할수도 있고 그 간사한 믿음의 의지를 보고 하나님이 아 너는 믿고 다른애는 안믿네 너에겐 내가 성령을 부어주어 더 잘믿게 해야 겠구나? 만약 하나님이 그런 믿음의 의지로 사람을 판단 하신다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범죄하기전에 의지를 말한다면 어떻게 설명이 돼야 하는지요.....
@user-cv2dt6nl1c
@user-cv2dt6nl1c 4 жыл бұрын
@@user-wh2fm7zd5n 이 땅에서의 사람의 믿음은 불완전합니다. 하나님도 그걸 잘 아시기에 성령님을 보내시어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잘 갈수 있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우리자체로 완벽한데요. 우리가 불완전하기에 예수님을 더욱더 의지 할 수 밖에 없는거지요. 신앙생활이 한번 믿으면 굴곡 없이 평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앞서도 말했듯이 사람자체가 불완전하기에, 많은 유혹에 넘어지고, 불평하고, 좌절하고, 배신하면서도, 성령님의 강권하심으로 다시 일어서게 되고, 그러면 그 사이에 어느새 믿음이 자라있고 마음이 강해지지요. 우리는 이런 생활을 죽어 주님 품에 돌아갈 때까지 계속 할 것입니다. 물론 시험에 드는 강도와 횟수가 믿음이 커질수록 줄어들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불완전한 믿음으로 살 것이나, 주님의 은혜로 결국엔 천국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user-wh2fm7zd5n
@user-wh2fm7zd5n 4 жыл бұрын
@@user-cv2dt6nl1c 하나님도 그걸 잘 아시기에 성령님을 보내시어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잘 갈수 있도록 인도 하고 계십니다.... 이말은 처음에 우리가 가진 그 불완전하고 간사한 그 믿음이라도 보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어 믿음을 자라게 한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처음부터 하나님 께서 미리 택한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에게 없는 믿음을 주신다는 건가요? 지금 유투버님이 말씀하시는게 이거라서요. 제가 말하려는 거는 성령님이 없이는 그 불완전하고 간사하고 하루에도 몇번씩 바뀌는 그 교활한 우리가 가진 믿음이라고 하는 믿음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여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신다는게 이상하지 않냐는 거에요. 교회안에 가라지들도 최소한 그런 믿음을 가졌을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선한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성령으로) 선한 행위를 할수 없다는게 맞지 않을까요? 구약에서도 그렇고 악한 사람을 더 걍팍하게 만드시기도 하시고 잠깐이나만 선한것을 주시어 선하게 행동하게도 하시잖아요. 또는 같은 악한사람끼리도 누구에게 선한 행동을 주어서 세상이 파멸로 가는것을 막기도 하시고요.세상을 섭리로 다스리실때에도 악한사람이 악한일만 하게 그냥 간섭안하시고 내버려 둔다면 벌써 세상은 망했을 겁니다.(렘 10:23, 잠 20:24)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선한 생각은 할수 조차 없는것이고 믿음 없는 사람들이 선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하는거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이고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오니...로마서에도 나오고요.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 19-23절 육체의 일은 악한것이고 성령의 열매만이 선한 것이라 나오고요. 누가 복음 8:13 에 보면 육에 속한자의 믿음이라고 하는 그 불완전하고 간사한 믿음에라도 잠깐이나마 진실한 믿음을 주신것은 그들의 죄를 더욱 명백하게 하며 변명할 여지를 주시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에 잠입하여 양자로 삼는 영은 받지 못하더라도 주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시기 때문이죠. 그러나 갈 4:6 마 24:13 에서 보면 택하심을 얻어 먼저 성령을 받아 성령이 주시는 믿음으로 믿음 씨앗을 가진자들은 끝까지 견딜수 있도록 그 믿음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성령께서 끝까지 믿음을 주시어 인도 하신다고 나오잖아요.
@muz6623
@muz6623 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제 신앙이 커가는데 많은도움이 되었어요^^ 아멘~~~~~♡♡♡♡
@user-ch8yh6um3g
@user-ch8yh6um3g 3 жыл бұрын
장로교 교인들이여 예정론에 속지 말라 kzbin.info/www/bejne/r53XZXatns-joZY 다른 복음을 전하다가 지옥에 가는 사람들 kzbin.info/www/bejne/rJeoaWpvapmghJo 복음 전파의 정석, 복음은 이렇게 전해야 합니다. kzbin.info/www/bejne/oZ7boKyMbdFohJo
@user-yx4du8hg2x
@user-yx4du8hg2x 4 жыл бұрын
좋은영상 감사합니다!! 예정론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된것같아서 많은도움이된것같아요ㅎㅎ 앞으로도 좋은 콘텐츠 부탁드리겠습니다ㅎ
@lion14400
@lion14400 5 ай бұрын
새롭게 알게 된게 아니라 님은 한 청년에게 속는 겁니다.베뢰아교인처럼 이것이 그러한가 상고하세요.저 같은 경우도 예정론에 대해 하나님께 질문 즉 기도 했더니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다라는 말씀과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롬9:11)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결정한다는 사실을 계시래주셔서 예정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 한답니다.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을 아셨기에 타락전에 이미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예정하시고 구원할 자 또한 품 안에 두셨어요.
@ddunie.c
@ddunie.c 4 жыл бұрын
영상 오늘도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혹시 매영상 끝 오늘의 영상끝에 나오는 찬양?이 제목이 무엇인지 여쭤봐도 될까요?ㅎㅎ;;
@user-cv2dt6nl1c
@user-cv2dt6nl1c 4 жыл бұрын
어른행세를 해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다메섹님을 보면 흐뭇해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제가 인생을 좀 살다보니 개인적인 생각일지 몰라도 복 중에 자식 복이 최고인거 같은데 그런 면에서 다메섹님 부모님은 최고의 복을 받으심이 틀림 없네요. 저도 예정론을 믿지만, 예정론만 믿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정말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최종 목표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아 모두 천국 가는 것이기 때문에, 예정론만 믿게되면 딤전 2:4의 말씀과 어긋나게 됩니다. 성경에는 만민구원론과 예정론의 말씀이 함께 적혀 있기에 사람이 어느 한쪽만 맞다여겨 그쪽으로만 강요하는 것은 성경의 한쪽 말씀을 빼는 것이므로 만민구원론이 맞고 만민구원론 안에 예정론이 속해 있다고 봄이 가장 정확한 해석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가운데(만민구원론), 하나님의 창세 전부터 임의의 선택이 아닌, 예지의 능력으로 누가 믿을 사람인가를 미리 아신다는 예정론은 만민구원론에서 구원방법론의 하나라고 보고 있습니다. 해와 달의 모든 만물의 자연을 통해 불신자에게도 은혜를 주시듯이, 구원의 방법은 여러가지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만민구원론에 맞는 말씀이고 예정론과는 상반된 말씀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방법론을 제시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각 가정이나 집안마다 믿음의 사람이 최소 한 명 이상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먼저 부른 이유는 이 말씀대로 가족들에게 전도자가 되게 하여 한 영혼도 놓치고 싶지 않는 하나님의 심정이 담긴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러하기에 먼저 부르심을 받은 자의 책임과 의무가 막중하며, 먼저 된 자의 책무를 다 하지 못하면, 심판날 반드시 이 문제도 결산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부름받은 자가 가족에게만 죽음을 각오하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고 전적으로 주님께 매달린다면, 장담컨대 세상에서 구원 못 받을 영혼은 한 영혼도 없을 것입니다. 전도는 명령이고, 명령을 받은 우리는 책임과 의무감으로 임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예정론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자, 버림받은 자가 있긴 합니다. 이런 자는 극히 일부분이며 복음의 문이 닫힌 자들인데, 그 기준은 저도 말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복음을 계속 전했으나 하나님의 시간이 끝난 자도 있고 (제 경험상), 우상이나 이단에 깊이 관여된 자도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시간과 관계있지 않나 하고 혼자 생각해 보는데, 왜냐하면 이단이나 우상에 깊이 관계된 자들 스님이나 무당 이런 자들이 간혹 하나님께 돌아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여튼 구원을 포함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지만, 예정론에 의해 선택되어 지는 것은 이것 또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하에 이루어진 일부의 방법론이라는게 저의 체험과 깨달음에서 온 생각입니다.
@merry10025
@merry10025 4 жыл бұрын
안녕하세요. 상담하고 싶습니다.
@liberty8507
@liberty8507 2 жыл бұрын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4:12
@user-wm7fx1rs8w
@user-wm7fx1rs8w 4 жыл бұрын
아티클 해석까지,,,감사합니다 : )
@17kHz
@17kHz 4 жыл бұрын
하나님의 예정이 있다해도 그것을 사람이 알 수는 없음. 사람이 예정을 논하는건 자격/능력 외의 짓. 사람이 예정에 대해 논하려면 모든게 끝나고 천국에서 후일담으로나 가능할것.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예정 혹은 계획을 완벽히 이루심으로서의 예정을 논할 수는 있어도, 인간이 자기 행위를 설명 혹은 핑계 삼는 요소로써 사용될 수는 없음. 사람이 자신에게 혹은 다른 사람에게 예정을 논하는건 자신이 하나님인양 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user-ev6pu5in1p
@user-ev6pu5in1p Жыл бұрын
저도 신앙고백적 표현에 동의합니다... 요즘은 구원이나 예정의 확신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확신이 너무 강해서나 자기가 하나님자리에 앉아 자기를 구원하는 오만에 빠진 성도가 많아서 오히려 문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주님안에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ryujunyoung
@ryujunyoung Жыл бұрын
오래된 댓글에 늦게나마 제 생각을 적습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혹은 다른 사람에게 예정을 논하는 것이 하나님인양 구는 것이라 하셨는데 .. 거만한 무지의 형태라고 이야기하고 싶네요. 특정 내용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용이기에 나 이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알 수 없는 내용이고, 안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질타를 받아야 할 사람으로 겨냥하는 프레임을 짜고 계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17kHz
@17kHz Жыл бұрын
@@ryujunyoung 네 저를 향한 질타 잘 들었습니다^^
@ryujunyoung
@ryujunyoung Жыл бұрын
@@17kHz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예정이든 어떤 교리이든 역사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검증된 정교리라면 자유롭게 설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교리의 발전을 돕고 더 나아가 교회의 발전을 도울테니까요. 그러나 절대 알 수 없는 내용이라고 결정해버리는 순간, 그것을 묵상하는 것 조차 의미없는 일로 여겨지게 되고 그것을 말하는 사람은 공격 대상으로 겨냥 돼버립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다 알 수없는 인간인만큼 보다 알아가고자 묵상하고 논의하고 설파하는 것들을 억제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dd-mr6nn
@dd-mr6nn Жыл бұрын
​@@seongilyeo984 결론이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인데 성경에 관련 구절이 있나요?
@user-qx6gk7er5z
@user-qx6gk7er5z 4 жыл бұрын
오늘도아주심오한주제로명확한답변을하셨네요^^😍
@user-ik9ob5hw6z
@user-ik9ob5hw6z 7 ай бұрын
성경을 자주 읽고 있지만, 예정론 만큼은 정리가 안되어서 10년넘께 고민으로 지내왔습니다. 영상 잘 보고 갑니다.
@lathurTV
@lathurTV 4 жыл бұрын
좋은 아티클 소개에 감사합니다 😊 저는 언제나 “@@주의자”가 문제라고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칼빈이 직접 주장한 예정론에 대한 글들과 논리를 보면, 굉장히 신앙적으로 유익을 주는 면이 많이 있고 강조점 역시 다메섹님이 말하신대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경외심과 은총에 있죠.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이것을 교리적으로 확정지으면서 강조점을 엉뚱한 방향으로 접근하다보니 문제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저는 개혁주의 소속이지만 굳이 “주의”에 제한되지 않으려 합니다) 인간의 측면에서 감사의 이유로 사용해야할 예정적 이야기가 누군가의 유기와 저주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되는 식으로 말이죠. 마찬가지로 청도교주의자들이나 루터주의자들이나 웨슬리안이나 할 것 없이 각각 추종자들의 오류는 언제나 쉽게 발견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어느 한 개인을 너무 과도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지양해야 되는 것 같아요. 모두가 배울 점이 있고 또 동시에 약점이 있으니까요. 신앙을 공유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이해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일 줄 알게 되고, 성경적 논쟁과 비판적 수용을 적절히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무튼 저는 기독교의 구원론이 너무 개인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 데에서 점점 크고 포괄적인 수준의 이해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균형이 중요하니까요 ㅎㅎ
@seongilyeo984
@seongilyeo984 4 жыл бұрын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좋은 토론의 장이 되네요. 점점 성경의 공부하는 신학이 사람을 중심축으로 해석하고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서신서에서 말하는 복음은 (그리스도께 직접 계시받은 복음) 구원은 선물이다. 이 말 한마디에 결론이 나옵니다. 구원은 은혜의 선물이다. 사람이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칭의의 구원에만 손가락을 짚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항상 인생의 마지막 상태의 모습이 어떻나? 를 강조합니다. 1. 타락해서 믿음이 마음에 없다. 2. 순종해서 믿음이 마음에 있다. 그리고, 순종해서 믿음이 마음에 있다면, 1. 하나님의 뜻대로 잘 행하고 살았나? 2. 믿음만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게 아니라 대부분을 내 뜻대로 살았다. 2번은 순종이 아니죠. 그냥 자기 의지대로 살면서 믿었다고 주장하는 경우죠. 선물을 줬는데, 1. 마지막에 보니 선물을 버렸다.(타락) 2. 선물을 소중하게 간직했다.(순종) 그리스도인은 순종하도록 창세전에 선택받은 사람이고, 순종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타락을 선택하니까요. 요즘 핫 한 이슈가 행위가 왜 없나? 왜 이렇게 교회가 썩었나? 결론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성도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 답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성도도 타락하면 똑같이 심판하십니다) 같은 말입니다. 선물은 사람이 노력해서 받아가는 상이 아닙니다. 선물은 (연약하여 스스로 노력할 수 조차 없어도) 오직 성령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삶을 산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입니다. 평안하십시오.
@user-ym3jr3wh9r
@user-ym3jr3wh9r 3 жыл бұрын
다시 들으니 더 명확하게 이해가 되는군요. 다메섹의 영상은 한 번 듣고 끝나는게 아니군요. 예전엔 그냥 아! 저런 통찰 좋아! 라고 했다면 지금은 내가 의문을 두었던 것들에 명확한 답들을 주는 내용들이 많군요.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감사하네요.
@user-io7fo1wg2y
@user-io7fo1wg2y 4 жыл бұрын
저는 장로교에 다니고 있고 칼빈이 이야기하는 예정론을 믿고 있습니다. 한 때 알미니안과 칼빈에 견해차이에서 신 독력설과 신인협력설 사이에 어떤것이 맞는지에 대한 나름의 고민과 공부를 했습니다. 제 결론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라는 사실 속에서 이미 미래를 알고 계심에도 '너의 자유의지로 한 행동이니까 결과에 따라 심판받아'라고 이야기 하는것은 죄인된 본성을 아직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닌 방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부활은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공의를 압도했기에 이루어진 사건이다라고 이야기한 존 맥아더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기에 내 힘이 아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거 같습니다. 분명 견해의 차이가 있고 인간의 해석이다 보니 누군가가 정확히 옳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주장과 신념만이 옳다고 믿는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user-wh2fm7zd5n
@user-wh2fm7zd5n 4 жыл бұрын
예레미야 18장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어 써봅니다. 4절에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이건 민족이든 개인이든 간에 주권자(토기장이)가 미리 선하게 만들겠다는거 아닐까요? 6절에 "..... 이 토기장이의 하는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여기서도 4절에 말한걸 반복한거 같고요. 6절에서 "... 이 토기장이의 하는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너희가 내 손에 있는니라" 하시고 7절로 넘어가셔서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라고 "작정" 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토기장이(주권자)의 하는것 같이 그리 하신다는거라 봐도 되겠죠. 여기서 일단 4절에서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이 말씀에서 만에하나 주권자(토기장이)가 파상한 것중에 선한 것이 있었다면 이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문제가 생기는게 아닐까 생각 합니다. 그래서 7절에서 "멸하기로" 작정 하셨는데 만에하나 8절 처럼 그 민족이 "악"에서 돌이킨다면 하나님은 "토기장이(주권자)"같이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되지 않을까요? 즉, 파상한 것중에 선한 것이 있었다면 이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문제가 생긴거라 생각 된다는 거죠. 또 9장에서 "민족을 심으신다"고 하셨는데 10장처럼 심은 것이 "악한 것"을 행한다면 마찬 가지로 하나님은 토기장(주권자)이 같이 할 수 없다는 결론 같구요. 그래서 그렇게 된다면 6장에 "이스라엘아 족속아 너희가 내손에 있느니라" 이말씀에 오류가 생기는거 같아서요. 하나님이 "실수하는 일(할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거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실수 하시는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즉, 말씀에 오류가 생기지 않게) 말씀을 다시 본다면 8절에 "만일.....그 악에서 돌이키면.....뜻을 돌이키겠고" 여기서 "만일"은 만약 (하나님이 공의롭고 전능하심의 깊이로(토기를) 판단하신거라 선한것이 없으므로 악에서 돌이키는 일은 없겠지만) 그중에 혹시라도 그런 민족이 있다면이란 뜻인듯 하고요. 7절에서 멸하신다고 "작정"(주권자로써)하신거와 연결해서 본다면 내가 멸하기로 "작정"했는데 ( 위에서 설명한대로 토기장이가 토기를 파상한것 처럼 그 중에 선한것은 없는 것이라고 보고요) 그중에 있다면 내가 뜻을 돌이키겠다는 뜻이 더 맞지 않을까요? 이제 무슨말을 하려는지 성경을 많이 보신분들은 아시리라 봅니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이 멸하기로 "작정"한 소돔과 고모라에서 아브라함이 의인을 찾으려 했지만 결국 못 찾았잖아요.(창 18:16-33) 결국 하나님이 멸하기로 "작정" 하셨다면 거기에는 선한것이 없는거 아닐까요? 예레미야 18장 11절에서 " 거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너희를 치려 하노니....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선하게 하라 하셨다 하라" 경고를 하며 말씀을 전파하라 하셨는데 12절에서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된 말이라 우리는 우리의 도모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리라 하느리나" 그들을 그들의 의지대로 선택하게 두셨는데 결국, 그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지는 못한다는 말씀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은 공의롭다는 결론에 어긋나지도 않는거 같고요.(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실수가 없으신 분이라면) 12절은 8절에만 해당 되는거 같고요.) 9절 10절도 같은 해석으로 선에 대해서 (토기장이가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이걸 생각해서 해석해 보면 위에서 설명한대로 9-10절에는 악한 것이 없다는 것이 되고 4절과 9-10절을 보면 어떤 파상한 그릇으로(자신의 의지대로는 멸하여진 그릇) 즉, 그들의 의지에 의해서는 파상되어졌지만 이제는 그들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깊으신뜻과 어떤 공의로운 판단으로 하나님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으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분"이란걸 생각해 봐야 할거 같아서 한번 적어 봅니다
@kihokwon1605
@kihokwon1605 4 жыл бұрын
@@user-wh2fm7zd5n 앗따 길게도 쓰셨네요. 근데요 구약은 유대인들도 읽고 그러죠. 그들은 다르게 말하던데요. 하나님이 전능한 것은 옛날에 집어치웠고 (600만명이 허망하게 ...) 그저 힘은 없지만 그래도 정이 있으니 함께 한다고... 구약의 하나님은 어렵더라구요 이름도 많고 누가 누군지 정확하지도 않고.. 저분은 칼빈의 예정론을 믿는다던데... 이중예정이겠죠. 뭘 믿습니까? 인정한다면 몰라도. 그리고 칼빈이라고 뭐 용가리 통뼈입니까? 신학자가 아닌 것은 아시죠? 법학전공인것으로 알고 있는데. 장로교에서 신대원 안나오고 목사하고 있으면 ... 가만두지 않겠죠 아마..
@QjnY6B-kyk8MNQ6B
@QjnY6B-kyk8MNQ6B 3 жыл бұрын
근데 진성용님이 그렇게 말하는 거 자체가 오히려 예정론의 폐해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데요
@seongilyeo984
@seongilyeo984 3 жыл бұрын
예정은 계획을 말하는 것이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되었고 예정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언약과 심판입니다. 사람은 언약과 심판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라고 하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언약안에 들어왔으므로 가능한 말입니다. 이방인들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을 가두어 두었다고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든 민족들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올 수 있습니다. 어떤 제한도 없습니다. 구원되는 자를 미리 예정했다는 말은 복음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아직도 미숙한 믿음안에 있습니다. 복음은 새로운 유대인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민족들이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기 원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resurgamm
@resurgamm Жыл бұрын
@@seongilyeo984 수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예정론을 믿고 가르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다.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는 캘빈주의자였고 그에게 영향을 준 앤드류 풀러 또한 캘빈주의자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존 번연, 찰스 스펄전, 마틴 로이드 존스, 존 맥아더, 존 파이퍼, 팀 켈러, 데이빗 플랫 등은 또 어떻습니까? 예정을 믿는다고 복음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니 어이가 없군요.
@KJS2
@KJS2 4 жыл бұрын
잘생긴 마스쿠스! 오늘도 자막달아주시는 센스 고마워요~
@fidelity12
@fidelity12 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user-yr9ok9ov9k
@user-yr9ok9ov9k 4 жыл бұрын
맞아요!!! 둘다 맞는 얘기고 둘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가지로만 생각하려니 분쟁이 일어나죠... 유투브가 새로운 시각, 본질을 보게 하네요 응원합니다^^
@jaehosong4255
@jaehosong4255 3 жыл бұрын
오늘도 좋은 영상 너무 잘봤습니다 ㅎㅎ 제가 개인적으로 궁금한게있는데 아직 답을 못 구한 부분이 있거든요 그래서 여기에 여쭤볼수있을까요? 저는 먼저 개인적으로는 예정론을 지지함을 밝히며 질문을 드려요. 아래는 질문 입니다. 질문이 조금 길수있습니다 1.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 모두가 죄인이고 그 죄의 결과로 전적타락 우리는 우리의 의로는 도저히 선을 선택할 능력을 상실했다 라고 배웠는데요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주지 않고서는 도저히 하나님을 믿을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에 우리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작용할수 있나요? 너무 예정론쪽에 치우친 질문인줄은 아나 제 주변 거의 모두가 장로교라 열린 대답을 듣고싶어 질문 드립니다 ㅎㅎ
@user-co5my1cc7w
@user-co5my1cc7w 4 жыл бұрын
궁금했던 부분들 그렇지만 반문해보지 못했던 사실들을 이렇게 듣게되서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user-wh2fm7zd5n
@user-wh2fm7zd5n 4 жыл бұрын
예레미야 18장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어 써봅니다. 4절에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이건 민족이든 개인이든 간에 주권자(토기장이)가 미리 선하게 만들겠다는거 아닐까요? 6절에 "..... 이 토기장이의 하는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여기서도 4절에 말한걸 반복한거 같고요. 6절에서 "... 이 토기장이의 하는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너희가 내 손에 있는니라" 하시고 7절로 넘어가셔서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라고 "작정" 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토기장이(주권자)의 하는것 같이 그리 하신다는거라 봐도 되겠죠. 여기서 일단 4절에서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이 말씀에서 만에하나 주권자(토기장이)가 파상한 것중에 선한 것이 있었다면 이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문제가 생기는게 아닐까 생각 합니다. 그래서 7절에서 "멸하기로" 작정 하셨는데 만에하나 8절 처럼 그 민족이 "악"에서 돌이킨다면 하나님은 "토기장이(주권자)"같이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되지 않을까요? 즉, 파상한 것중에 선한 것이 있었다면 이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문제가 생긴거라 생각 된다는 거죠. 또 9장에서 "민족을 심으신다"고 하셨는데 10장처럼 심은 것이 "악한 것"을 행한다면 마찬 가지로 하나님은 토기장(주권자)이 같이 할 수 없다는 결론 같구요. 그래서 그렇게 된다면 6장에 "이스라엘아 족속아 너희가 내손에 있느니라" 이말씀에 오류가 생기는거 같아서요. 하나님이 "실수하는 일(할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거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실수 하시는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즉, 말씀에 오류가 생기지 않게) 말씀을 다시 본다면 8절에 "만일.....그 악에서 돌이키면.....뜻을 돌이키겠고" 여기서 "만일"은 만약 (하나님이 공의롭고 전능하심의 깊이로(토기를) 판단하신거라 선한것이 없으므로 악에서 돌이키는 일은 없겠지만) 그중에 혹시라도 그런 민족이 있다면이란 뜻인듯 하고요. 7절에서 멸하신다고 "작정"(주권자로써)하신거와 연결해서 본다면 내가 멸하기로 "작정"했는데 ( 위에서 설명한대로 토기장이가 토기를 파상한것 처럼 그 중에 선한것은 없는 것이라고 보고요) 그중에 있다면 내가 뜻을 돌이키겠다는 뜻이 더 맞지 않을까요? 이제 무슨말을 하려는지 성경을 많이 보신분들은 아시리라 봅니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이 멸하기로 "작정"한 소돔과 고모라에서 아브라함이 의인을 찾으려 했지만 결국 못 찾았잖아요.(창 18:16-33) 결국 하나님이 멸하기로 "작정" 하셨다면 거기에는 선한것이 없는거 아닐까요? 예레미야 18장 11절에서 " 거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너희를 치려 하노니....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선하게 하라 하셨다 하라" 경고를 하며 말씀을 전파하라 하셨는데 12절에서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된 말이라 우리는 우리의 도모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리라 하느리나" 그들을 그들의 의지대로 선택하게 두셨는데 결국, 그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지는 못한다는 말씀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은 공의롭다는 결론에 어긋나지도 않는거 같고요.(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실수가 없으신 분이라면) 12절은 8절에만 해당 되는거 같고요.) 9절 10절도 같은 해석으로 선에 대해서 (토기장이가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이걸 생각해서 해석해 보면 위에서 설명한대로 9-10절에는 악한 것이 없다는 것이 되고 4절과 9-10절을 보면 어떤 파상한 그릇으로(자신의 의지대로는 멸하여진 그릇) 즉, 그들의 의지에 의해서는 파상되어졌지만 이제는 그들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깊으신뜻과 어떤 공의로운 판단으로 하나님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으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분"이란걸 생각해 봐야 할거 같아서 한번 적어 봅니다
@user-ll6gz6if9h
@user-ll6gz6if9h 4 жыл бұрын
김진곤 읽긴했는데 마지막으로 요약하시면 무엇인가요 간략하게 요약해 주실수 있나요
@user-wh2fm7zd5n
@user-wh2fm7zd5n 4 жыл бұрын
@@user-ll6gz6if9h 위에 얘기는 그냥 한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면 어떨까하고 쓴 글이고요. 밑에 글은 천천히 보시면 이해 되시리라 생각하며 성경에 근거를 두고 좀 길게 쓰는것에 양해 부탁 드립니다. 그래야 설명이 온전할 거 같아 써봅니다. 예레미야 18장 8,10,11절에 "너희 길을 선하게 하라"에 대해 말씀 드리면 이 구절에서 누군가 "자유 의지"를 주장하면서 "이것이 선지자들이 말한 것으로, 만일 인간에게 "자신의 어떤 능력"이 없다면 이 구절들은 쓸데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 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것을 주장한 사람은 바울의 가르침을 주목하지 않은 것입니다. (롬 7:9-24)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무슨 일을 권하고 격려하여 힘쓰게 함) 이 치명적인 검과 같아서, 마치 그가 우리를 죽음으로 보내사 우리를 꺽어 순종케 하여 그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받아 들이게 할 정도라고 합니다. 선지자는 "너희 자유의지로 나아갈 수 있다"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 "능력"이 아닌 너희 "의무"를 행하도록 주의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기 편하게 예를 들자면, 바울이("성령"의 가르침(요 14:26)을 받아) 예레미야 18장 7-11절의 "권면"과 "훈계"의 말씀(너희 "의무"를 행하도록 주의하라는 내용)을 듣고 자신을 어떻게 느끼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생각한 것이 (롬 7:9-24)(갈5:17)이라고 생각하시면 될겁니다. ============================================================================================================================================== 참고 : "믿음"에 대해서 (고전 2장 9절)와 (마 16장 16-17절)에서 우리가 현재 눈으로 보는 사물에서도 하나님의 진실성을 잘 믿지 못하면서 하물며 눈으로 볼 수 없고 이해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믿음을 우리가 스스로 조금이라도 가질 수는 없다. 주의 학교에서 전진하는 첫 걸음은 자기의 통찰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고전 2장 14절) 성령의 지원이 필요하며,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성령의 권능만이 여기에서 성공할 수 있다. (고전 2장 10절)와 (요 6장 44-45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 알게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이다.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갈수 없다. 인간적인 이해력도 이같이 성령의 빛으로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일들을 드디어 참으로 맛보기 시작하며, 이전에 심히 어리석고 미각이 둔하던 것과는 달라진다. 말씀이 선포된 모든 사람에게 비치지만, 성령이 내면적 교사가 되셔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며,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길을 마련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침투할 수 없다. (고후 4장 13절)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 (우리에게는 원래 없는 믿음) 그 자체를 바울은 "믿음의 마음" 이라고 부른다. (살후 1장 11절) 바울은 믿음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부르며, 그것을 "선을 기뻐함"이라는 적절한 말로 부른다. 이와 같이 그는 사람이 자신이 믿음을 일으킨다는 것을 부인하며,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라고 첨가한다. (고전 2장 4-5절) 바울은 믿음은 사람의 지혜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근거로 삼는다고 말한다. 성령께서는 그 힘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며 거룩한 생명을 불어 넣으시므로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과 자극으로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성령의 은혜의 열매이다. 성령이 계시지 않을 때 우리에게 있는 것은 어두운 마음과 사악한 심정 뿐이다. (갈 5 : 19- 21) (요 1 : 4-5) 사람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찬란한 광명이 비취기 때문에 작은 불꽃이나 적어도 불똥이 없을 때가 없으며, 이런 조명이 있는데도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다고 요한은 가르친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관한 한 사람의 예리한 지성은 맹목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어두움"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사람에게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는 사람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한다 (요 1: 13) 이것은 육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만한 높은 지혜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확언하신 것과 같이,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계시였다 (마 16 : 17) 그 택하신 사람들에게 중생의 영을 통해서 (딛 3:5) 주시는 것은 모두 우리의 본성에는 없는 것이며,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 36:9)(고전12:3) 또 세례 요한은 제자들이 놀라는 것을 보고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 리라"고 외쳤다(요 3:27) 요한이 "선물" 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이 주는 일반적인 천품이 아니고 특별한 조명 이라는 것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천거한 자기의 말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 그의 불만을 보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주께서 그의 영을 통해서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다면, 내가 한 말은 사람들의 마음에 거룩한 일들을 주입할 힘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렇게 그는 말한 것이다. 모세까지도 백성들의 건망증을 비난하면서, 하나님에게서 받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 3- 4) 그렇기 때문에 , 주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이것을 특별한 은총이라고 하신다 (렘 24:7) 확실히 이것은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비춰 주셔야만 영적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점을 인정하셔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6:44)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적 교사가 되어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전파하더라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 성령께서 놀랍고 특별한 능력으로 우리의 귀를 듣게 만들며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게 만드시는 것이다.(사 54: 7) (요 6:45) (사 54:13)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전연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 신비들은 사람이 통찰할 수 없도록 깊이 숨겨졌기 때문에, 오직 성령의 계시에 의해서만 나타난다.(고전2:9)(고전 1:20) "무슨 이유로 한사람에는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는가? 나는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이것이 십자가의 깊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판단의 어떤 깊은 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나온다.......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안다. 어째서 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는 그 어째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른가? 이 점을 나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밑 없는 구덩이며, 십자가의 깊이다. 나는 찬탄할 수 있으나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요컨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의 힘으로 우리를 조명하셔서 믿음을 가지게 하실때에 동시에 우리를 자신의 몸에 접붙이시므로 우리는 모든 좋은 것에 참여하게 된다.
@user-wh2fm7zd5n
@user-wh2fm7zd5n 4 жыл бұрын
@@user-ll6gz6if9h 하나님의 영의 조명이 지성에 진정한 이해력을 준다면, 마음에 확신을 주는 것 또한 성령의 능력임은 더욱 분명하다. 지성이 사상을 얻는 것보다 마음이 확신을 얻는 것은 더욱 어렵다. 따라서 성령이 날인하는 일을 맡으셔서, 이미 마음에 확실성을 심어 준 그 약속들을 마음에 인치시며, 마음을 견고하게 확립하기 위하여 보증의 직책을 맡으신다.(엡 1장 13 - 14절) (고후 1장 21- 22절) 바울은 소망의 확신과 담대함에 대해서 말하고 성령의 보증이 그 확신의 기초라고 한다 (고후 5장 5절) 믿음은 여러 가지 의심에 시달려 신자의 마음은 편안한 때가 거의 없으며, 적어도 항상 평화로운 상태를 즐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공격 무기가 신자들의 마음을 흔들지라도 그들은 일어서며 굳게 선다. 참으로 우리가 시편에 있는 말씀을 굳게 잡고 있으면, 이 확신만이 믿음을 키워주며 믿음을 보호 한다.(시 46장 1- 3절) (시 3장 5절) ( 사 30장 15절)(시 37장 7절)(히 10장 36절) "우리가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장 6절- 7절) 이런 말로 바울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아는 일들은 우리 앞에 있지 않고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여지가 없게 만드는 것은 이 믿음이다 (골 2:2) (살전 1:5) (히 6:11) (히 10:22)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의 감미로움을 우리가 참으로 느끼며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확신이 생길 수 없다.그래서 사도는 믿음에서 확신이 나온다고 하며, 확신에서 담력이 생긴다고 한다.(엡 3:12) 이런 말로 그는 우리가 평온한 마음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한다면 거기는 바른 믿음이 없다는 것을 분명이 보여준다. 이 담력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구원을 확신하는 데서만 생길 수 있다. ====================================================================================================================================== 믿음이 있는 자라면(성경은 거듭난 자들에게 교훈의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행해야 할것이 무엇인지 보여준 이상 "(믿음이 없는자 처럼) 나는 그렇게까지 할 수 없다"라고 말해서는 안되고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되리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니까요 그런데 그는 우리에게 "훈계"하신 뒤 그렇게 "행할 능력" 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요14:26)(시 119:34,12,18,19,33)(잠21:1)(잠 28:14)(사45:7)(시105:25)(빌 2:12-13)(고후7:10)(딤후2:25-26)(엡2:10)(호3:5)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우리는 모두 본성이 죄인이며, 따라서 우리는 죄의 멍에를 지고 있다. 그러나 만일 사람 전체가 죄의 세력하에 있다면, 분명 그것은 죄의 중요한 자리의 의지가 필연적으로 가장 튼튼하게 가두는 형틀로 속박을 받고 있다는 말이된다. "성령"의 은총을 받기 전에 어떤 의지의 작용이 있었다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2:13)라는 바울의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도록 자기들의 마음을 인도해 주시기를"" 기원하는 때가 있으며 다윗도 여러 귀절에서 그렇게 했지만, 이런 기도를 하겠다는 욕망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이 점은 다윗의 말에서 추론 할 수 있다. 자기 속에 정(맑고깨끗한)한 마음이 창조 되기를 원할때에(시51:10), 그는 물론 그 창조를 자기가 시작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연히 정한 마음의 "창조"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이런 기도를 하겠다는 욕망은 정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이런 기도를 하겠다는 욕망을 주시는 것도 당연히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신29:3-4)(렘24:7)(요6:44-45)(고전2:9)(고후3:5) 우리의 것은 죄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창6:5)) 따라서 가르침을 들은 이상 그에게로 나아가서 우리가 그의 가르침 안에서 유익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헛되이 받지 않는 방법이며, 이것이 성경 구절들을 읽는 방법이구요 (이사야 1:16) 너희에게 있는 "악"을 버리라는 말씀은 사람이 실수 했을때 "스스로 선"으로 돌이킬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위에서 말한내용으로 미루어 아시겠지만 하나님이 손을 내밀어서 그를 구원하셔야 한다는 의미가 되구요.(롬 7:9-24) 게다가 우리는 "악"에 빠져 있을뿐만 아니라 "모든 선" 을 빼앗겼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사람이 "악"에 빠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것 이라 했고요.(롬 8:7)(막: 4:4) 그러므로 이제 선지자가 우리에게 한말, 즉 "우리의 길을 선하게 하라"는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그에게 나아가서 그가 우리의 삶을 규제하여, 우리가 그를 화나게 하여 엄히 처벌 받아 마땅하게 되는 대신 용서를 받게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로 봐야 합니다. (시편 51:10,12) (시편 119:29,36)(엡 1:18)(고후 3:5)(고전3:20)(시편 94:11)(창 6:5 , 8:21) 우리의 본성이 생각하고 선동하고 자신하고 시도하는 것이 모두 항상 악하다면, 어떻게 우리가 성결과 의만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같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이성은 어느 쪽으로 향하든간에 무참하게 허무에 빠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도 이 무력함을 알고 주의 계명을 바로 배울 만한 깨달음을 얻기를 기도 했고요 (시 119:34) 그가 새로운 이해력을 얻고자 한다는 것은 자기의 본성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 번만이 아니라 그는 하나의 시에서 거의 열 번씩이나 같은 기도를 반복 합니다.(시 119:12,18,19,26,33,64,68,73,124,125,135,169) 이렇게 되풀이함으로써 이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곤란한가를 암시한거고요. 우리가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높아지시는 것과 같이, 우리의 낮음을 고백하는 것은 그의 자비를 힘 입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갈 6:3) (시 147:10-11)(사 40:29-31) 이 모든 귀절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원한다면 아무리 적은 힘일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생각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약4:6)(벧전5:5)(잠3:34) (사 44:3)(사 55:1) 이 귀절들은, 자기의 빈곤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허락을 얻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 곧 자기의 참화와 빈곤과 벌거벗음과 치욕을 깨닫고 완전히 타도되며 압도된 사람은, 그렇게 됨으로써 자기에 대한 지식이 가장 많이 전진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없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도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한 그들에게서 자기의 것을 너무 많이 빼앗길 위험성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자기의 정당한 소유가 아닌 것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사람은 반드시 허무한 자신(어떤일을 해낼수 있다거나 어떤일이 꼭 그렇게 되리라는 데 대하여 스스로 굳게 믿음. 또는 그런 믿음)으로 자기를 잃어 버리며 하나님의 영예를 찬탈하여 신성 모독의 무서운 죄를 짓게 된다. 참으로 이 욕망이 우리의 마음에 침입해서 하나님 안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것을 찾으라고 강요 한다면, 그 때에 우리는 우리의 처음 조상에게"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기를"(창3:5) 원하라고 권고한 바로 그 모사가 우리에게 이 생각을 암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높이게 하는 것이 악마의 말이라면, 원수의 충고를 듣고 싶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의 말을 용인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힘이 많아서 "자기를 의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 허무한 신념에 속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교만을 철저하게 꺽어 버리는 중요한 성경 귀절에 귀를 기울여 그 만류를 받아야 합니다.(요1:4-5)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분들이시라면 "자유 의지"를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선행 은총"에 의해서 "자유 의지"가 어느 정도 생겼다고 말합니다. 그 "선행 은총"이 성경 어디에 근거를 두고 말하는지 확인 하시고 그 근거가 정당한가 아닌가를 정확히 정밀하게 판단해 보시는게 현명하다고 생각 합니다.
@user-iz1kk9cr2j
@user-iz1kk9cr2j Жыл бұрын
오늘처음 말씀들었는데 제가 알고 있는 성경 그대로 말씀에 감동했습니다
@jiwonlee1
@jiwonlee1 3 жыл бұрын
와 명료하네요 감사합니다!
@user-ch8yh6um3g
@user-ch8yh6um3g 3 жыл бұрын
장로교 교인들이여 예정론에 속지 말라 kzbin.info/www/bejne/r53XZXatns-joZY 다른 복음을 전하다가 지옥에 가는 사람들 kzbin.info/www/bejne/rJeoaWpvapmghJo 복음 전파의 정석, 복음은 이렇게 전해야 합니다. kzbin.info/www/bejne/oZ7boKyMbdFohJo
@gidoTV
@gidoTV 4 жыл бұрын
평소에 예정론에 대하여 종종 질문을 받곤 하는데제가 설명하기에 부족함을 느꼈어요.영상을 통하여 저도 한번 더 정리가 되었고,궁금해 하시는 분들에게 이 영상을 소개해 주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믿음으로 반응하며 자유의지로 선택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 이끄심, 살아계심을 고백하며 주께 영광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에 공감하며 맞다고 생각이 드네요. 크리스천들이 평소에 궁금해 하는 소재를 다뤄주셔서 감사합니다.
@user-tp9wl4vp7e
@user-tp9wl4vp7e 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예정이라는 것,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게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예정론을 처음 접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 혼자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 제가 예정론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철저히 신본주의를 따르는 설교말씀으로 성경을 알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이 말씀 안에서 제 삶을 바라보며 나라는 인간의 전적인 죄인됨,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적인 은혜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거든요. 내게 어느 것 하나 괜찮아보이는 구석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게 베푸신 구원의 약속을 절대 끊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도, 하나님께 합당치 않은 내가 살아 날뛰는 마당에 하나님 향한 믿음은 사라지질 않았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내게 믿음을 주신 것이구나.. 그렇지 않다면 어찌 나 같은 자가 신실한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나 같은 자는 애저녁에 구원이 취소되고도 남았을텐데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자녀 이스라엘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심을 끊임없이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낮은 우리를 찾아오셨듯, 내 믿음은 내가 믿음으로 주를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구나..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양들을 단 하나도 잃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깊은 안도감과 감사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게 하나님의 예정이란 이런 의미였습니다 저의 죄인됨을 깨달을 수록 구원의 역사가 온전히 하나님만의 것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그 어떤 것도 자랑할 것이 없고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단 하나도 없음을 오히려 그보다 더 못함을 고백했을때 말하기 힘든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에 대하여도 구원의 역사를 제 눈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 예정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영역이라 배웠습니다. 같은 의미로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유의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배웠습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이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어렴풋이 동경에 비춰 알 뿐인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어 보이는 이 모든 인생 과정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배우며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얘기가 길어져 죄송합니다. 예정론에 대하여 제가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나, 성경을 꿰뚫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인정하는 한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여러 주제에 관하여 깊이 있고 유익한 내용을 많이 올려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다.
@user-ll6gz6if9h
@user-ll6gz6if9h 4 жыл бұрын
아임그루트 많이 공감합니다.
@user-ll6gz6if9h
@user-ll6gz6if9h 4 жыл бұрын
추가로 예수님께서 오신이유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시고 내 증인이 되리라 고 명령하신부분과 주 예수을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등등 선택적 보단 우리의 의지로 보게 되는데 이부분은 어떻게 이해하실까요...
@user-tp9wl4vp7e
@user-tp9wl4vp7e 4 жыл бұрын
@@user-ll6gz6if9h 감사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하심을 보이시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위 말씀이 나오게 된 부분을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회복의 때가 언제이냐는 물음에, 예수님께서, 때와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이고 '너희가 알 바 아니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네, '너희들 내 증인이 되어라'가 아니라 '성령께서 임하시어 너희에게 권능을 주사 너희가 내 증인이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하실 일을 증언하신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인간 입장에서의 선택을 얘기하고 있지 아니하다고 생각합니다.
@user-tp9wl4vp7e
@user-tp9wl4vp7e 4 жыл бұрын
@@user-ll6gz6if9h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과 함께 선교와 전도의 현장에서 선포되는 귀한 복음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이 사람에게 주어졌을 때 궁극적으로 길은 두갈래 입니다. 믿거나 믿지못하거나.. 예정론에 따르면 이 말씀을 받아 믿는다는 것 자체가 그가 은혜안에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라 봅니다(믿음을 보이는 모양새, 외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저주를 퍼부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결국 복음에 반응하여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자가 있고, 기뻐 받았으나 이내 세상에 속하는 수많은 것들처럼 변하여 복음을 내버리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누가' 믿고 안 믿을 것인지는 알 수도 없고 판단해서도 안 되기에, 들을 귀 있는 자들을 위해 전하고 외쳐야 하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사실 칼빈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죄인됨)과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은혜(구원)이었다고 배웠습니다. '누가' 그 은혜안에 있는지에 관한 것은 사람의 알 바에 속하지 않는다 배웠습니다(다만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 안에 있는자에게는 그 믿음을 떨어지지 않게 하사 그가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함으로써 증거를 나타낸다 배웠습니다 눅22:31,32) 즉, 선택이라는 개념에서 예정론은 선이 아닌 택에 방점이 찍혀있는 것 같습니다. '택'에 방점이 있는 이상 우리로서는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 외에 어떠한 것도 자랑할 수 없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나의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고, 믿지 않는 타인을 정죄할 수도 없게 됩니다. 이것이 칼빈의 예정론이 가지는 진짜 의미인 것 같습니다.
@user-tp9wl4vp7e
@user-tp9wl4vp7e 4 жыл бұрын
@@user-ll6gz6if9h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하나님의 예정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드러내는 부분이라는 말씀은 제가 잘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여쭤봐 주시면 제가 배운 한에서 말씀 나누고 싶습니다.
@user-fk4vv1jx8t
@user-fk4vv1jx8t 4 жыл бұрын
로마서 9장과 11장이 신자 개개인의 선택이 아닌 그저 단지 민족적 선택만을 의미한다구요? 그런 견해가 있기는 합니다만 주류적 입장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로마서 9장과 11장은 로마서 전체 문맥에서 이해해야 하고, 특별히 율법의 의와 신앙의 의를 비교하는 7장과 의롭다함받는 자가 어떻게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지를 다루는 8장을 연속하며 확대되는 장으로 이해한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9장 24절은 그 그릇에 대해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자니라"라 하므로 9장에서 말하는 전체 국면이 그저 민족적 의미에만 제한되는게 아님을 아무 명료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설사 혈통적인 의미 혹은 불특정 다수의 민족적 의미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이라는 전체 의미안에는 신자 개개인이 포함되기에 하나님의 작정의 교리가 결코 불투명해질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전체 성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와 의미가 꼭 영토적이고 혈통적이거나 민족적 성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구약이든 신약이든 이스라엘 이란 단어와 의미는 민족적 의미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원형인 신구약 교회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포커스를 놓쳐버린채 그저 문자적 의미에만 그 의미를 둔다면, 로마서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서도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긿잃어버린 양들에게 간다"라는 말씀이나 시므온이 주님의 탄생을 바라보며 예수가 "이스라엘을 비추는 영광"이라는 선포나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종말의 날에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한다는 말은 민족적 의미에만 갇혀버리므로 그 확대된 복음적, 교회론적, 종말론적 의미는 넌센스가 될것 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이나 현대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머리가 나빠서 로마서 9장과 11장을 민족적 선택이 아닌 신적작정으로 이해를 했을까요? 좀더 글을 쓰고 싶지만 이정도로 하겠습니다.. 숙고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ChristIsMyKingAndImHisServant
@ChristIsMyKingAndImHisServant Ай бұрын
주류 입장이 아니라 생각하신다고 하셨는데 주류가 맞습니다. 칼빈주의처럼 로마서 9장을 이전 8장부터 11장까지의 문맥을 무시하고 해석하는 종파는 일부 침례교와 장로교 외에는 없습니다. 사도교회들부터 대다수의 개신교인들은 민족으로 해석합니다. 만약 말라기서의 내용을 무시하면서 굳이 바울이 그 성경 구절을 사용했다고 한다면 그에 따른 다른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신약에서 저자들이 인용한 구약 구절들 그 어떤것도 본래 내용과 문맥에서 벗어나면서 사용된 경우는 없습니다. 민족이 아니라 모든 교회를 의미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느 한 개인을 특정하는 경우는 야곱과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9장에서 이스라엘이 인용된 구절에서 어떤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확인하고 그에 따라서 해석을 해야지 무작정 이럴 수 있고 저럴 수 있다 하면서 해석하면 오류에 빠집니다. 로마서 9장에서의 이스라엘은 민족이 맞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민족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일반적 성도들, 즉 교회나 혹은 특정 개인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을 비유로 들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들과 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순종과 신실함을 통하여 구원에 이른다는것을 설명하지만 여기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입니다. 토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구원에 대한 예정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수행하던 역할 즉 1-18절까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향한 뜻이 예정된 영원한 형벌이라 하는데 바로왕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때마다 더욱 완고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형식적이고 단순 착각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는자라 하는것인데 하나님은 속이는것, 거짓 자체가 불가능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진심이고 바로왕이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마음, 즉 사랑입니다. 이를 거절한것은 바로왕입니다. 우리는 바로의 반응을 같은 책인 로마서1장에서 6장까지의 불법, 완악함, 불순종에 대한 이야기를 토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칼빈주의 신학자들까지 가기도 전에 칼빈이 무슨 권위로 기존에 없던 이중예정론을 설파 했는지부터 봐야합니다. 당시의 사도교회는 물론 초대교회에서도 어거스틴 이전에는 아무도 예정론을 주장한적이 없으며 어거스틴도 이런 극단적 예정론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주후 약 402-7년경 나온 주장인데 성경을 쓴 사도들과 그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과 지혜가 부족해서 칼빈이 1400년이 지나서 완성했어야 하는겁니까?
@leepavol
@leepavol 4 жыл бұрын
전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믿는 사람입니다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8항 지극히 신비로운 예정의 교리는 특별히 지혜롭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롬 9:20,11:33, 신 29:29) 예정의 목적은 일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지켜 순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신들이 효과적으로 부름 받은 사실과 영생 얻은 줄을 확신케 하려는 것이다.(벧후 1:10) 그렇게 되면 이 교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찬송과 경외와 존귀를 돌리게 되며,(엡 1:6, 롬 11:33) 진실히 복음을 순종하는 자들은 이 교리로 말미암아 겸손해지고 근면해지고 풍성한 위로를 받게 된다.(눅 10:20, 롬 8:33,11:5,6,20, 벧후 1:10) 장로교 기본 신잉고백으로 정리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는 충분히 다루고 있는데 역사적맥락에서 비판받을 부분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이 끝에 충고를 무시 한경우 였죠. 조심스럽게 그러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분 뜻안에서 성취될것이라는 믿음과 신앙고백으로 겸손하게 성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신학들과 의미있게 서로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iloveme0127
@iloveme0127 4 жыл бұрын
네 저도 칼빈주의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kitaidong8382
@kitaidong8382 9 ай бұрын
글쎄요 처음에는 내가믿고 내의지로 주님을 믿은것 같았으나 훗날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없었으면 나같은 인간이 어떻게 믿었을까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hyj7862
@hyj7862 4 жыл бұрын
9장의 내용이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방식)에 달려있다'는 점에서는 예정론과 결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됩니다. (개인적으론 사실 웨슬리안이나 칼뱅주의나 같은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보는 차이라고 생각됩니다. 의화-칭의(성화)의 차이처럼요.)
@user-vu7li3yw7b
@user-vu7li3yw7b 10 ай бұрын
칼빈의 이중예정은 비성경적인듯…. 칼바르트의 말처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이 맞는듯…
@heypengsoodontdothat
@heypengsoodontdothat 4 жыл бұрын
저는 칼빈주의 전통에서 자랐고, 지금도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고백하지만, 군대에서 감리교 목사님의 교리반을 들으면서 상당히 자극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요. 제 생각에 인간의 구원론은 잠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우리가 동일하게 고백하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안에 동일하게 이루어진 구원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할 것이냐에서 갈리는 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댓글들을 보다가 한 마디 덧붙여 봅니다
@hyunjoolee6468
@hyunjoolee6468 29 күн бұрын
좋은 정보를 얻습니다. 장로교 안에서 예정론을 들을 때마다 화가 치밉니다. 예정론의 맹점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구원받은 그룹에 속해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말장난 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성경해석법에 오류가 있어서 (=믿음의 방식에 오류가 있어서) 그날에 지옥불 가운데 앉아있게 된다면 그때는 예정론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요? 하나님은 토기장이시니 그분 뜻대로.. 이렇게 생각할까요? 그런 사람 한명도 없을겁니다. 그동안 내가 교회안에서 얼마나 수고했는데 하나님이 날 선택하지 않았던 거야, 날 속였어, 나쁜XX. 분명히 그렇게 하나님을 욕할겁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날 선택하지 않아서 내가 지옥불에 있는게 아니고 내 믿음에 문제가 있었기에 지옥불에 있는겁니다. 자신이 교만스럽게 당연히 구원받은 쪽에 있을거라는 맹랑한 가정을 제하고 본다면 지금의 예정론 논리가 얼마나 모순 덩어리인지 분명히 보이게 됩니다.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29 күн бұрын
맞습니다. 그러니 장로교에서 구원의 확신을 매우 강조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죠
@user-fi3ph5hn6i
@user-fi3ph5hn6i 4 жыл бұрын
드디어 만났어요.ㅠㅠ저의 생각과 같은 말씀을 해주셔서 넘 기쁩니다.👍
@before_idisappear8776
@before_idisappear8776 4 жыл бұрын
비교급 이해 쏙쏙 잘 됩니다 😉
@lay5600
@lay5600 4 жыл бұрын
다마커스님 감사합니다. 아주 기초적인 영상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질적풍요 현실세계예서의 행복이 비크리스챤적 생각인지요? 성경구절인용도 구약은 축복으로 여기고 신약은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구절들이 있고 요즘 교회들이 번영신앙 신학이라 하며 올바르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을 보고 저 스스로 정체성에 떳떳하지 못한 갈등이 있습니다
@crouchingstone
@crouchingstone 4 жыл бұрын
저도 궁금하네요. 여타 종교에서도 청빈한모습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데 반해(종교인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유교사상도) 그 지도자 혹은 기득권층은 상당한 물질적 자산을 향유하여 왔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 같이 보여서요. 기독교 관점에서는 어떻게 해석될까요??
@user-rl1ub5ki9e
@user-rl1ub5ki9e 4 жыл бұрын
언제나 정말 좋은 영상들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영상을 보는 과정에서 제가 너무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하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을 설명하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공부를 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할려니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요... 방향성을 제시해주실 있으신지...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4 жыл бұрын
순전한 기독교부터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user-rl1ub5ki9e
@user-rl1ub5ki9e 4 жыл бұрын
@@DamascusLiveTV 넵 감사합니다~~ 앞으로 많은 자문 구하겠습니다 잘부탁드려요~
@zhezhuzheng9027
@zhezhuzheng9027 5 ай бұрын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seongjinlim3457
@seongjinlim3457 4 жыл бұрын
장로회와 감리회의 교리 차이를 명쾌하게 잘 해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waterstar6269
@waterstar6269 2 жыл бұрын
성경에서 말씀하고계신 창세전에 예정된것은 개인의 구원이아닌 구원받은 무리 즉 교회를 예정하셨다고 봐야할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예정된 대상을 말씀하실댄 복수로 표기되어있죠~ 내이름으로 두세사람이 모인곳에 나도 거기 있다고 하신 무리 즉 교회입니다.
@user-zy5nd1fd4u
@user-zy5nd1fd4u Жыл бұрын
공감되는 의견입니다
@sungjaehwang9332
@sungjaehwang9332 4 жыл бұрын
좋은 영상 항상 감사합니다. Jacob Arminius 이니까 알미니안이 맞겠죠~ㅎ 저도 조지 알마니가 유명하다보니 가끔 헷갈린답니다~^^
@solagratia9855
@solagratia9855 4 жыл бұрын
예정에 관한 간략한 교회사 1 개인예정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북아프리카의 교부이자 감독이었던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354-430년)입니다. 원래 마니교 신자이면서 플라톤철학(이데아사상)에 심취했던 그는 특별한 회심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과 절대주권을 매우 신봉하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활동하던 당시 또 한 명의 존경받는 수도사인 펠라기우스가 있었는데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100% 신봉하여 예수를 통하지 않아도 인간은 스스로 선해져서 자력구원이 가능하다고까지 주장하자 어거스틴은 이에 대항하여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고 결국 창세 전 개인예정까지 주장하게 됩니다. 위 이론은 당시에도 많은 비난이 있었지만 극단적 자유의지를 주장했던 펠라기우스를 단죄하기 위해서 수면 아래에 있었지만 펠라기우스가 이단으로 정죄(418년에 열린 카르타고의 공의회에서는 결국 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 저도 이 결정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펠라기우스가 아무리 훌륭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WCC같은 오늘날의 종교다원주의와 같습니다. )된 후 어거스틴 사후에 열린 오렌지 종교회의(529년)에서 펠라기우스 이후 그에 반대하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반응 즉 인간의 공로에 근거한 하나님의 예정을 주장한 반펠라기우스주의(신인협력설)를 다시 정죄(개인적으로 이 결정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복음의 수용에 대한 각 사람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개인의 선택에 관한 가능성과 의지를 전제로 하며 비록 인간의 의지가 타락으로 심하게 훼손 즉 은혜가 없이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할지라도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반응할 수 있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공히 우리에게 복과 저주를 택하라고 하시며 마음을 열고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할 자와 유기할 자를 동시에 정해 두셨다는 어거스틴의 이중예정은 비성경적 교리라고 결론을 내게 됩니다. 다만 오렌지 종교회의에서는 이중예정을 제외한 어거스틴의 교리를 대다수 수용하였고 이를 토대로 오늘날 개신교입장에서 비성경적 이론이라고 평가하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연옥설 등 카톨릭 교리들이 다수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개인적으로 어거스틴의 믿음이 신실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 시대에 맞는 자들을 택하셔서 그 분의 일에 사용하신다고 믿기 때문이고 그의 평생에 선을 실천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회심하기전 헬라철학과 신비종교에 심취한 그였지만 그 지식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변증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하나님의 은총이 각 사람의 의지보다 구원에 있어서 더 중요하고 본질적이다라는 그의 주장에는 저또한 격하게 동의합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어거스틴의 사후 1,000여 년이 흘렀습니다. 기독교공인(313년) 이후 기독교는 심하게 타락하였고 온갖 부조리의 온상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각국의 헌법에 기록된 정교분리의 원칙도 기독교의 타락이 원인이며 세계사에는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 1,000년을 암흑시대(Dark age)라고 명명합니다. 카놋사의 굴욕(1077년), 아비뇽의 유수(1309-1377년) 사건은 황제와 교황간의 권력다툼의 산물입니다. 결국 1517년 10월 31일 카톨릭주교이자 신학교수였던 마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의 성곽 교회문에 붙임으로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그 2세대 주자로 칼뱅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칼뱅은 약 1000년 전에 오렌지종교회의에서 비성경적 주장이라고 결론지었던 이중예정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를 통해서 1.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4.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이라는 5대교리인 튤립교리(TULIP)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중 2,3,4의 주장은 어거스틴의 주장을 차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출발 자체가 성경적 변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성경에서는 모든 인간이 타락하였다고 진술하였지 그 앞에 전적(total)이라는 수식이 붙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죄인이다가 성경적 진술입니다. 그런데 칼빈은 타락 앞에 전적(회복 불능)이라는 전제를 덧붙인 다음에 그의 교리를 진행시켜 나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선택도 무조건적이 될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이 창세전에 무조건적으로 택정된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제한적 속죄로 발전시키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창세전에 구원시키기로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 이외에는 십자가의 구속의 효력이 미치지 않고 다 멸망받게 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다 양보하여도 5대 교리중 제한적 속죄교리만큼은 절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solagratia9855
@solagratia9855 4 жыл бұрын
예정에 관한 간추린 교회사 3... 급기야 1610년 46명의 칼빈주의 개혁교회 목사들은 아르미니우스의 5개 신조를 승인해 달라고 항변서를 화란(네덜란드)국회에 제출하였으며 이에 대항하여 칼빈주의자들 역시 반항변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그러다 1618년 11월 13일 도르트(Dort)에서 종교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가 바로 도르트종교회의입니다. 그러나 이 회의는 모두 칼빈주의자들만 참석하였고 정치권력을 힘입은 칼빈파의 권세로 인해 항변서를 제출한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칼빈주의 목사들은 단 한 사람도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 그 결과 회의 종료후 투옥중이던 아르미니우스 대표에게는 처형을 집행하였고 200명의 아르미니안 목사들은 성직에서 추방당하였습니다. 결국 이 종교회의는 전혀 민주적이지 않았으며 폭력적 결과를 낳게 되었고 칼빈주의 견해중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들어 버리는 ‘타락 전 예정설’을 ‘타락 후 예정설’로 바꾸었을 뿐 다른 교리는 모두 그대로 수용하였습니다. 그 이후 세월이 흘러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이었던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수용했으며 기독교계에 회개와 관련하여 많은 영향을 펼쳤습니다. 또한 팀 켈러, 재커 라이어스 같은 오늘날 저명한 기독교 변증가들도 비록 타락하였다할지라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매우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사랑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선택에 관한 자유로운 의지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은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철저한 희생(십자가)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은 그 고귀한 희생에 대한 믿음(구원의 유일한 조건)의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전한 의지로 그러한 반응을 보이길 우리에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여호수아 24장 15절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haeminmom
@haeminmom 3 жыл бұрын
개인의 구원이 예정돼있다면 전도는 왜 하는걸까요?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이 구원받지 못할걸 알면서 신은 왜 인간을 끊임없이 세상에 만들어내는 걸까요?
@user-ch8yh6um3g
@user-ch8yh6um3g 3 жыл бұрын
장로교 교인들이여 예정론에 속지 말라 kzbin.info/www/bejne/r53XZXatns-joZY 다른 복음을 전하다가 지옥에 가는 사람들 kzbin.info/www/bejne/rJeoaWpvapmghJo 복음 전파의 정석, 복음은 이렇게 전해야 합니다. kzbin.info/www/bejne/oZ7boKyMbdFohJo
@overbounding
@overbounding 4 жыл бұрын
7분 마지막 부분 예레미아 18장 10절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유익하게 하리라) "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
@jaylee7683
@jaylee7683 4 жыл бұрын
'구원의 권한이 온전히 하나님에게 있다'는 주장과 '하나님과 함께할지 거부할지는 자유의지로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 왜 상충되어야 하는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건 스스로의 구원이 아니라 내 인생의 주인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예정은 당연히 온 인류의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mjlee8487
@mjlee8487 4 жыл бұрын
영상 감사합니다 항상 ^^ 너무 좋은 주제입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사실 칼빈이 만든것도 아닙니다. 그 당시 상황을 보면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프랑스에서도 많은 개혁 개신교 신자들이 이단으로 몰려 장작불에 화형을 당하는 시대적 상황 이였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사실 이렇게 핍박과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신앙을 저버리지 않게 독려하고자 했던 취지가 강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관점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 관점에서는 이 예정론이 예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오히려 차별적이죠. 칼빈도 사람입니다. 칼빈 역시 역설적으로 숱한 사람들이 화형 당하고 죽게 했습니다. 이단 이라는 정죄 미명하에. 미카엘 세르베투스와 설전을 버리다가 세르베투스는 결국 화형을 당하고 죽죠. 저 역시 장로교 이지만 예수님을 믿지, 칼빈의 주장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교리를 생각하시며 어떤 교리가 맞을까? (칼빈의 튤립 vs 아르메니안 주의) 물론 중요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교리가 맞다라고 생각하며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예수님의 자리에 우리가 서려고 하는거는 아닌지, 내 생각만이 옭고 남은 틀렸다 라는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과 '피해의식의 산물'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합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칼빈, 루터, 쯔빙글리 등 모두 죄인인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한 분 바라보며 오직 주 예수님 안에서 거하며,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를 마음의 중심에 놓고 살아가시길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 간절히 소망합니다.
@XiJinpingpoohbear
@XiJinpingpoohbear 4 жыл бұрын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화형한것은 삼위일체를 부정했기 때문이고 칼빈은 정당한 재판 이란 제도적 테두리아래에 의한 심판했습니다 정적제거 목적이 아니었고 그 시대에는 이단은 화형으로 처벌되던 시기였습니다. 칼빈은 계속 마지막까지 그를 설득했을 뿐아니라 화형이 고통스러운 형벌이기에 참수형으로 바꾸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시민권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소하여서 잘못된점들을 밝히수는 있지만 그가 판결하는게 아니라 시의회가 결국 판결을 내립니다. 칼빈은 한번도 살인한적이 없습니다 단지 그 시대 상황에 따라 잘못된 것들을 법적 테두리안에서 정당한 형을 받게 한것이죠 구약에서도 살인자를 고엘제도아래 복수해야 하는사람은 그 사람을 잡아서 바로 살해 하는게 아니라 재판이라는 법을 통해 그 사람이 유죄 확정이 되고 난후에 죽일 수 있었습니다.그래서 도피성이란 제도가 있었던 것이고요 또 칼빈은 바로 재판을 통해 사형으로 인도하는게아니라 교회치리법에 따라 권고를 주고 듣지 않으면 두세사람과 함께 또 듣지 않으면 장로들과 함께 가서 권고하고 그래도 듣지 않을때 출교를 시키고 출교당한자는 신자가 아니므로 기소를 합니다. 칼빈을 학살자로 오해 하는 일이 있는데 칼빈은 자기맘대로 사람을 죽일수도 없거니와 그런 법적 지위의 권한 자체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것에대해 바로잡고자 몇자 써봤습니다
@mjlee8487
@mjlee8487 4 жыл бұрын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rooted4428
@rooted4428 4 жыл бұрын
후반부분 살짝 위험하신 발언 같은데요.. 그렇게 치면 신천지의 해석도 잘못된건지 판단하거나 말해도 안되는거네요
@user-ll6gz6if9h
@user-ll6gz6if9h 4 жыл бұрын
댓글을통해 저의복잡한 생각이 정리가 되는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user-ci8zk6ot3r
@user-ci8zk6ot3r Жыл бұрын
위의 분의 설명에 살짝 덧붙이자면 칼빈은 판결을 하는 판사의 자리에 있지 않았고 다만 증인이었을 뿐입니다. 칼빈이 학살을 했다는 오해가 확산이 된 계기는 소설가의 소설 때문이죠.
@prettylydia99
@prettylydia99 3 жыл бұрын
인간의 그 꼴난 자유의지로 인간 스스로가 예수님을 믿는다 했다가 기도응답도 없고 지속적 고난으로 과연 하나님이 진짜 계신지 의심이 들어 그 믿음이 오락가락 하다가 종국엔 치매까지 걸려 하나님을 거부하며 믿음을 잃게 된다면 과연 하나님께선 그 인간의 어느 시점의 자유의지 믿음으로 판단하셔서 구원해야 될까요? 한번 오신 성령님께서 이처럼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도 조변석개하는 나약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오락가락 들락날락 하셔야 되는 걸까요?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이처럼 말이 안되는 먼지같은 한심한 존재의 자유의지를 확대해석,과대평가 함에 있어 알미니어주의는 상당한 모순이 있음. 누군가는 칼빈 예정론이 사탄,마귀적인 이론에 불공평하다는데 밤낮 뒤바뀌는 인간의 그 알량한 자유의지로 지가 지의지로 믿고 지힘으로 선행을 쌓아 구원을 이뤄갈수 있다는 구약의 인간이 스스로 바벨탑 쌓기해서 하늘에 닿을수 있다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동급처럼 갈라하는 아주 교만한 인본주의에서 나온 알미니언주의가 더 사탄적이고 아주 교묘하게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시건방진 도전 아닌가요...!!!??? 그리고 타락한 죄인이 무슨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여 선행을 쌓는다는건지 오직 하나님만이 선이신데 그럼 구약의 하나님께서 전쟁때 "다 죽여라" 하셨는데 인간이 "살인은 나쁜거예요.그러니 전 못하겠어요"한다면 이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죄인이 지 멋대로 선악을 판단해서 하나님께 불순종 하는건데 알미니언주의자들은 바로 이걸 가르치며 너의 선악의 잣대대로 선행을 행함으로 구원을 이뤄가라하니 모순이 이만저만이 아님.
@ChristIsMyKingAndImHisServant
@ChristIsMyKingAndImHisServant Ай бұрын
믿음에 대한 정의가 옳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통한 구원을 오해한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어로 Pisits라 하는데 이를 번역하면 신실함, 충성심과 같이 번역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신실하고 충성하며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구원에 이릅니다. 이는 모두가 경주를 뛴다고 구원에 이르는게 아니라 운동선수와 같이 훈련을 하라고 바울이 말한 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심과 같습니다. 이는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하는것으로 우리가 믿는다면 믿는대로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뜻대로 행할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믿지 않고 뱀과 하와의 말을 행한거와 그 반대되는 예수님, 즉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선행을 하여 구원에 이르는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자신이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실거라 믿고 행한거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그 약속을 믿고 그에 따라 순종함으로서 구원에 이릅니다. 이유는 당연합니다. 믿는다는 것은(신실, 충성)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여 함께 하겠다는 뜻이고 하나님은 그런자들을 백성이자 자녀삼습니다. 그러나 불순종과 불신하고, 불법한 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것이므로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고 함께 하고 싶지도 않으니 하나님은 강제 하시지 않습니다. 이중예정론은 아직까지도 열린신론을 반박하지 못합니다. 영어가 가능하시다면 Matt Slick과 Chris Fisher의 토론을 보시길 추천합니다. 이를 포함해서 변증 권위자들 사이의 토론을 보면 이중예정론은 일방적으로 무너집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32:10-14; 킹제임스로 보면 읽어보면 여호와께서 행하시려는 “악”으로부터 Repented 하셨다라고 나옴 창세기 6:5-7;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후회하셨다라고 하심 킹제임스에는 repented라고 나옴. 역대상 28:9; 하나님께서 미리 이미 다 아시고 심지어 이미 직접 정하셨는데 왜 마음을 찾으시나? 예레미야 17:10; 여기서도 마음을 찾으시고, 시험하셔야함. 시편 139:1-6; 하나님께서 다윗을 아시는 이유는 찾으셨기 때문. 다윗을 시험하시므로 그의 마음을 아심. 신명기 8:1-5;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아시기위해 시험하심. 칼빈주의에 따르면 이미 아시지 않나? 예레미야 18:5-12; 국가 단위의 뜻을 바꾸심 마태복음 19:28; 12개의 좌에 열두 제자가 앉기를 원하시고 약속 하셨으나 유다는 어떻게 되었나? 베드로후서 3:10-13; 우리가 더욱 의롭고 거룩 할 수록 그리스도의 재림이 더욱 앞당겨짐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반박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것은 감정에 의한것도 아니며 우리의 알량한 지혜와 의지로도 아니고 오직 그 은혜에 기대고 신뢰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부모를 의지 하듯이 말이죠. 아이는 부모가 사탕을 주지 않거나 장난감을 사주지 않아 울거나 때를 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부모와 함께 있길 원하고 의지하고 사랑합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입니다.
@kimjongin4248
@kimjongin4248 4 жыл бұрын
영상에서 나온 예정론과 자유의지를 대립적으로 따로 봐야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예정론"이 맞을 것이고(시간의 틀을 만드신 창조주 이기시에), 인간의 시각(시간의 한계 안에 존재하는 자들이기에)에서는 "자유의지"가 맞겠죠. 이부분에서 하나님과 동등되기를 바라다가 떨어지는 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예정론이 하나님이 "결정하셨다"가 아니라 "알고계시다"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user-ks8zb6gm3d
@user-ks8zb6gm3d 3 жыл бұрын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12)
@user-qc7xb8gv6v
@user-qc7xb8gv6v 4 жыл бұрын
진짜 이걸로 많이 고민했었는데 정리해 줘서 고마워 형 ㅋㅋㅋㅋ 내가 예전에 정리한건 이거야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에 동시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선택으로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이고 우리들 입장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 창세전에 선택했다는 구절도 생각해보면 창세전이라는 그것이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 시간대가 맞냐가 논쟁거리인데, 사실 창조라는 것이 시간과 공간이 같이 창조되었을 텐데 시간이 창조되기 이전을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과거의 시간연장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는 거지.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에 동시에 존재히는 하나님의 선택을 창세전이라는 과거의 시간대에 제한해서 해석하는 것은 오류다! 라는 생각이야. 그 필립얀시가 예정에 관한 글을 쓴걸 조금 인용해봤어 어때??
@dssasd7387
@dssasd7387 2 жыл бұрын
c.s. 루이스는 하나님은 무한한 현재속에 계신다고 말했죠
@user-rc2wc1rq2r
@user-rc2wc1rq2r 11 ай бұрын
아멘 맞습니다
@user-er4eo5ty9x
@user-er4eo5ty9x 4 жыл бұрын
오성민 운영자님~ 무신론자 였던 신앙 초보자 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지만 교회나 성당도 다니지 않는 사람인데 로마서 7장 내용이 전혀 이해가 안가는데 간단하게 요약 설명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슨 의도를 전달하는지 너무 어렵네요 제가 이해력도 부족해서요 ㅠ
@user-cv2dt6nl1c
@user-cv2dt6nl1c 4 жыл бұрын
로마서 7장은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세 내용으로 분류되는데, 첫째, 율법으로부터 자유(1~6)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율법에 얽매여 조목조목 따지다 보니 모든게 죄여서 평안도 없이 죄의식으로 살았으나,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얽매였던 우리의 율법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으니, 이제 율법에서 자유로워졌다. 율법에만 의해서는 의롭다 인정도 못 받고 구원도 없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계명으로 열매를 맺히게 될 것이다. 둘째, 율법과 죄(7~12) ->예수님이 율법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으니 율법이 잘못된 죄인가. 그게 아니라 더이상 우리가 율법의 조항으로 인해 죽지 않아도 되며, 다만 율법은 우리의 행위가 죄인지 아닌지를 알려주는 거룩한 법이다. 셋째, 성도의 내적 갈등(13~25)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계명을 받은 우리가, 죄성은 남아있어 속사람 즉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하나, 겉사람 즉 육신은 예수님을 알기 전의 죄로 돌아가려 하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죄를 짓게 되지만, 예수님의 강권하심으로 말미암아 점차 죄인 악에서 선으로 바뀌어감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라는 뜻입니다.
@user-er4eo5ty9x
@user-er4eo5ty9x 4 жыл бұрын
손혜숙 자세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ㅎㅎ 고맙습니다
@psuirsea5522
@psuirsea5522 4 ай бұрын
오로지 창조주만 진리를 알듯.. 인간적인 해석엔 무지와 불완전성과 오류가......
@user-bl9sb1oq5x
@user-bl9sb1oq5x 4 жыл бұрын
결국에는 사람 철학을 더하여 그게 하나님 뜻인냥 떠들어 대는 말장난... 해야할 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JR-tm7zj
@JR-tm7zj 3 жыл бұрын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것도 중요하죠
@user-lb1ur8nt7k
@user-lb1ur8nt7k 2 жыл бұрын
역시 성경을 단장취의(斷章取義) 를 하면 안되죠. 성경을 왜곡을 하거나 무지하게 해석을 해서 수많은 영혼들이 잘못된 길로 걷고 있잖아요. 성경을 잘 가르치는게 너무 중요합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PJ-ql4pw
@PJ-ql4pw 4 жыл бұрын
자꾸 자극적인 제목과 인트로를 사용하시고 너무 한쪽에 몰린 사고라 처음엔 정말 기대가 많았지만 이만 구독취소를 하고 떠나가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실것을 바랍니다. 이 영상의 인트로만 덜 자극적이었다면 좋았을텐데요. 자유의지가 없다라는건 성경을 읽으면 매우 쉽게 알 수 있지만 사람의 논리가 그것은 말이 안된다 라고 거절하기 쉽죠.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잔인하실 수 없다"착각하면서 말이죠. 알미니안 주의는 "사람이 구원받을 찬스가 주어져야 한다"고 강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을 사랑하니까요. 반대로 칼빈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강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요. 저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우리는 천국으로 갈 자격이 있어?" 그럼 너무나도 당연하게 답이오죠. "아니.. 그치만 천국으로 갈 기회는 한번씩이라도 주어져야 할 거 아니야.." 그말이 그말입니다. 그 기회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거죠. "you deserve nothing"이라는 발언을 알미니안은 싫어합니다. 칼빈주의는 생각부터가 겸손합니다. "우리는 원래 다 지옥에 가야하는데..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니 이 무슨 불공평한 일인가!" 하면서 말이죠. 알미니안은 상상도 못해본 말이겠죠. 저희 신학 교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Most of the students came to me and said, "why didn't God save all?" But only one asked "why am I saved?" 사고방식부터가 다릅니다. 그리고 왜 소수만이 천국에 이르는지 정확하게 알려주죠. 또 알미니안은 "모두에게 똑같은 기회가 주어져야한다"라고 생각하죠. 참 좋아보이죠? 근데 우리는 그 무엇도 가질 자격따윈 없습니다. 무교사상과 비슷해져 가는거죠. Equal right!을 외치며 자신의 정의로운 행동에 뿌듯해하죠. 그다음 칼빈주의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기회를 가질 자격은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user-fx2kg1kd4x
@user-fx2kg1kd4x 10 ай бұрын
듣다가 갑자기 의문이 들어서요. 그럼 로마서 9장에서 웨슬레가 말한게 맞다면 왜 하나님이불공평한것 같다는 식으로 말한건가요?
@user-dt2uw6ez2w
@user-dt2uw6ez2w Жыл бұрын
아~ 저의 신학적 노선이 감리교나 성결교쪽인데 장로교 합동측에 댕기고 있으니 마니 힘드네여~ 설교 자체가 합동측 교리에 맞춰진게 많다보니ㅜㅜ
@user-rc2gb3qr2m
@user-rc2gb3qr2m 2 жыл бұрын
종리스찬에서 말씀하신 "예정론"과 "운명론"의 차이를 말씀하신 것도 들어보시면 참고가 될 것 입니다. 저는 예정론이 되었던 무엇이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user-mf8fb2zo8n
@user-mf8fb2zo8n 4 жыл бұрын
영상 감사합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성서문서설 jedp 문서설 Q복음설에 대한 설명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4 жыл бұрын
다 시즌1 라이브방송때 이야기 많이 했었는데 당시 영상들이 길어가지고 하나하나 찾기가 어렵네요. 신약개론서나 구약개론서 소개하게 되면 내용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user-mf8fb2zo8n
@user-mf8fb2zo8n 4 жыл бұрын
@@DamascusLiveTV 답변 감사 합니다 예정론과 토기장의 비유를 이렇게 간결하고 쉽게 설명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 드립니다 또 로마서 9장의 야곱과에서의 비유가 말라기서에 나오는 건 알았지만 토기장의 비유가 예레미아서에 나오는 건 오늘 처음 알았고 또 한번 크나큰 성령의 감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더 여쭙는 기회를 주신다면 톰라이트가 말하는 칭의관도 개인적 칭의보다는 민족적 칭의라고 생각 되는데 맞는지요 또한 웨슬리의 칭의관도 궁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구원에 있어 개인의 주권과 선택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함도 무시할수 없다는 취지로 말씀 하셨는데 혹시 웨슬리안이 말하는 신 인 협력설의 입장이신지도 궁굼 합니다 감사합니다.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4 жыл бұрын
@@user-mf8fb2zo8n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으로 전적으로 타락했던 인간에게 선행은총이 주어졌다고 봅니다. 여전히 스스로를 자력으로 구원할 능력은 없지만, 적어도 구원자이신 예수를 스스로의 의지로 믿을 능력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 또한 십자가 덕에 주어진 것이니 사실상 웨슬리의 신학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샘입니다. 톰 라이트의 칭의관을 짧게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조금 어렵지만, 라이트도 로마서 9장을 민족적으로 해석합니다. 인간의 대표인 이스라엘이 드리지 못한 순종을, 이스라엘의 대표이신 메시아 예수께서 하나님께 드렸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렇기에 루터식의 개인의 의의 전가 교리는 부인합니다.
@user-wh2fm7zd5n
@user-wh2fm7zd5n 4 жыл бұрын
@@DamascusLiveTV 여전히 스스로를 자력으로 구원할 능력은 없지만, 적어도 구원자이신 예수를 스스로의 의지로 믿을 능력은 주어졋다는 것입니다...여기서 스스로의 의지로 믿을 능력은 주어졋다면 그 능력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전에 가지고 있던 의지를 말하는건가요? 아니면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지를 말하는 건가요? 만약 타락한 인간의 의지라면 하루에도 몇번이고 변할수도 있고 그 간사한 믿음의 의지를 보고 하나님이 아 너는 믿고 다른애는 안믿네 너에겐 내가 성령을 부어주어 더 잘믿게 해야 겠구나? 만약 하나님이 그런 믿음의 의지로 사람을 판단 하신다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범죄하기전에 의지를 말한다면 어떻게 설명이 되야 하는지요.....
@user-lj5zo6fy2z
@user-lj5zo6fy2z 5 ай бұрын
시간이라는건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의지가 곧 과거이고 현재이고 미래이다 어쩌면 예정론이라는 단어선정으로 인한 어감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자꾸 시점단위의 범주 안에 집어넣으려는 오해를 불러오게 되는데,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동일한 자유의지를 주셨더라도 어떤 부류들은 끝까지 하나님이 주신 용서에 대한 복음을 따르지 않을 것을 아신다라고 이해하면 예정론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특정대상에 대하여 복음을 믿지않도록 창조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user-eg2du2jk1y
@user-eg2du2jk1y 3 жыл бұрын
설명 참 잘하셨습니다. 행 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누가 구원 받을 지 다 아십니다. 예수가 어떻게 고난 받고 죽을 지도 다 아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를 구원 못 받게 정하시지는 않으셨고, 예수를 죽인 것도 그들의 선택이지 하나님이 등장인물을 미리 만들어 그 역할을 시키신 게 아닙니다. 위 두 문장을 연관지어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이 개인의 구원이 이미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정해졌다는 주장은 성경의 사상과 배치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그를 본받는 과정을 미리 정하셨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니님의 전지하심을 오해하여, 우리의 구원의 선택까지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그분의 전능함을 들어 말하는 것은 성경의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후에 법에 조화롭게 살아야 하는 자세에 대한 책임 회피성 주장일 수도 있습니다. 현재 자신이 하나님의 법에 조화롭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죄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에 소경과 귀먹어리가 되게할 수도 있은 이론이기에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말세에 이러한 일들이 있지 않기를 원하시며, 인자가 세상에 (다시)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면서, 불법이 성하므로 모든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불법함에 대해 경고를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명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과 우리가 계속 의롭게 살아야 할 의무와는 무관합니다. 다 이루었으니 더욱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율법 주의가 아니라 율법 사랑주의입니다. 오늘날 이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구원을 받으려고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이 완전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제사제도는 실체가 왔으므로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거나 먹어도 되는 것은 아니고 계명에 어긋나게 아무렇게나 살아서도 아니됨은 성경을 아는 사람의 상식입니다. 하나님의 음식물에 대한 경계는 오늘날 과학과도 상충되지 않습니다. 레위기 3장에는 짐승의 피와 기름을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생피는 병의 이동 통로일 수 있으며 피 동물성 지방은 혈 중 콜레스테롤을 높힐 수 있습니다. 또 피 성분이 우리 면역 계통에 어던 악영향이 있는지도 아직 다 연구되지 않았습니다.
@user-kc3um8sy6b
@user-kc3um8sy6b 4 жыл бұрын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서도 한번 다루어주세요
@user-bo7gw4zd6u
@user-bo7gw4zd6u 4 жыл бұрын
오오.... 좋은 주제입니다. ㅎㅎ 저는 참 이해가 안가는게, 왜 서로다른 구원방법 2가지가 존재할까?? 입니다. 이건 마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무척 헷깔려하는 과학자의 입장 같습니다. 한국의 대다수 교회들 즉 장로교회에서는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한번구원은영원한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소수의 교회들...주로 감리교회를 주축으로 인간의선택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하더이다. 제가 신학자도 아니고 신학도 모르기에, 어떻게 이렇게 전혀 다른 구원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도무지 이해가 안갔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어떤 사람은 예정적으로, 또 어떤 사람은 본인의 선택 결심으로 구원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극소수의 교회에서 제3의 구원론이 등장했습니다. 구원 받는 것은 예정이고, 본인의 선택으로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겁니다. 신학적인 정확한 표현이 아니니, 말꼬리 붙잡을 필요는 없어 보이고, 대충 내용이 이렇다는 겁니다. 제가 나이 30살 넘어서 예수 믿게 되었고, 신앙생활 하면서 깨닫게 되는게, 내가 예수 믿은게 아니고 택함 받은 것임을 최소한 나이 20살부터 시작된거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하는 목사님을 보면서, 저 목사님이 옛날부터 타락했을까? 남의 말을 들어보면 그건 아닌 것 같구... 그래서 현재로서는 결론 내린게 극소수가 주장하는 제3의구원론인 "구원 받는건 예정, 그러나 본인선택으로 구원취소됨" 을 따르고 있습니다.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4 жыл бұрын
제 3의 구원론이 뭔지 모르겠지만 새관점 비스무리해 보이네요.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해선 정확히 알 방법이 없죠
@user-bo7gw4zd6u
@user-bo7gw4zd6u 4 жыл бұрын
@@DamascusLiveTV TV 제가 10여년전에 한참 설교듣기에 미쳐 있을 때, 옥한흠 목사님 설교 kzbin.info/www/bejne/n4u0lWuNftCje7s 이 설교를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지요. 그당시 사랑의교회 홈피를 죄다 뒤져가며 들은 기억이 있네요. ㅎㅎ 설교 들으면서 그렇게 많이 울어본 적이 없었던거 같아요. 내가 눈물이 매마른 사람인데 말입니다. "구원 취소" 로 검색해보시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주장하시는 신학자나 목사님의 주장을 들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다마스커스님의 구원취소에 대한 의견도 주시면 허벌나게 감사하겠습니다. ㅎㅎ
@user-uw3hc2ed5v
@user-uw3hc2ed5v 5 ай бұрын
하나님은 토기장이십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_롬9장20절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_롬9장21절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_롬9장22절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_롬9장23절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자라_롬9장24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_엡3장11절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_고전 2장7절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_마22장14절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_마24장31절 나더러 주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니라_마 7장21절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_행14장 47,48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_롬12장29절 예정론과 관련된 말씀을 몇개 적어봤습니다ㅎ
@overbounding
@overbounding 4 жыл бұрын
2분 26초 부터, 존파이퍼는 칼빈주의자가 된 결정적인 계기었다,는데 그 다음이 "그래서 알마니안이라고 스스로 지칭"하고 있답니다
@HANSE_TV
@HANSE_TV 4 жыл бұрын
극단적으로 가면 아무것도 안해도 구원 받을 사람은 받고 뭔 짓을 해도 구원 못받을 사람은 못받는건데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처럼, 특정 존재만 구원을 예정하셨다는건 잘못된 생각이라 생각합니다 영상 감사합니다 👍👍
@user-vf5ib6wx6j
@user-vf5ib6wx6j 4 жыл бұрын
뭔짓을 해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 인간은 정확히 알 수고 없으며 판단해서도 안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으로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혹 내가 전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선택하신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에 따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옆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 아닐지 몰라.' 라고 판단해서 주신 시간과 몸을 게으르게 사용하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생각이 아닙니다. 결과는 주님만이 알고 계시며 무엇보다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는다면 절대 의도적이며 악한 계획은 없다고 믿어야하며 값없이 받은 복음을 힘을 다해 증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user-se4mv2wt4o
@user-se4mv2wt4o 4 жыл бұрын
아무것도 안해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뭘 해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게 아니니까요~
@hugdagh79754gjbvc_
@hugdagh79754gjbvc_ Жыл бұрын
@@user-se4mv2wt4o 하나님은 이기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모든 백성을 사랑하셔서 다 돌아오시길 바라시는분입니다 자유의지가 맞습니다 예정론이맞다면 장애인들은 하나님께서 장애인으로 예비하셨다는건데 얼마나 가슴아프고 슬픕니까 장애인으로 태어나도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만나서 매일 울고 슬퍼하며 하나님 감사하다 외치며살수있습니다 반대로 장애인으로 태어나 예정론을 따르면 얼마나 원망과 욕과 하나님을 떠날수도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이기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brianjhlee4099
@brianjhlee4099 4 жыл бұрын
다메섹님! 우선 개인적으로 다메섹님께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역을 감당해가시는 모습을 보며 큰 힘을 느끼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고, 중보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같은 세대에 살면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사람으로서 다메섹님께서 올리시는 영상들로부터 여러가지 고민도 해보는 기회가 되어 제 신앙에 있어서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댓글을 일일히 확인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오늘 영상을 보면서 궁금했던 점이 있어서 여쭤보고 싶은게 있어서 댓글을 적게 되었는데 제가 성경은 보통 영어로만 읽고 생각해서...제가 궁금한 점을 한국말로 잘 표현을 못 할 것 같아서요. 영어 잘하시는 거 아니까 영어로 좀 여쭙겠습니다. So in the middle part you were talking about how those who follow John Wesley’s ideas (Although I think it is very similar to the Arminian mindset) and talked about how they view the concept of “harden” and used the context of Jeremiah 18:1-10 to explain that the meaning of “harden” is related to how God judges the fate of the nation based on whether the action, the direction of the nation is in line with the word of God. The part that I’m troubled by this interpretation of “harden” is that the verse quoted by Paul in Romans 9, Exodus 9:16, seems to explain God’s predetermined plan of raising Pharaoh up for as an ‘object of wrath’ so that God’s glory will be displayed. Looking at this, I don’t know if I can agree to such an explanation regarding the word harden, and personally I think the word “harden” does mean an active act by God instead of a passive act depending on the preceding act of Pharaoh. My view on Calvinism and universalism (or Arminianism, which is the word I prefer) is that it is somewhere in between, although I consider both as only models of the truth which is not for us to know, but only God, for it is his authority to save and not ours. How I view Romans 9-11 is that it is written in a very interesting way in that Romans 9 puts emphasis on the sovereignty of God, whereas Romans 10 puts weight on the active willingness of the Israelites to reject the Christian doctrine. At the same time even the word “harden” that is used in Exodus varies on who is initiating the act of hardening, for it is Pharaoh who hardens in 8:15 & 32 (2nd & 4th plague), while God is the one who takes the initiative of hardening in 9:12 & 10:20 (6th, 9th & 9th plague, although the Hebrew word is not the same as the “harden” in 8:15 & 32). Give such, I am drawn more towards a paradoxical sovereignty model in which God has absolute sovereignty to predestine all things to carry out his purpose, in raising up objects of wrath to display his glory and objects of mercy to display his grace. At the same time the mankind are 100% responsible for their actions and choose to do whatever they want, but somehow mysteriously it is perfectly in line with God’s predetermined plan. A common example I give is how God predetermined the older to serve the younger for Jacob & Esau, but Esau acted in ignorance to God by his own will which somehow mysteriously is in line with God’s predetermined plan. So Mankind and God are both 100% responsible for their actions and belief. Sorry, didn’t think it would become this long. I am usually in the leadership position and usually have to teach stuff than discuss stuff, and don’t have a chance to openly talk about these things. I hope that if you have the spare time to give me your insight it’d be very helpful. Anyways, I’m encouraged by your heart for God and pray that you will continue striving after the Lord.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4 жыл бұрын
말씀해주신 미스테리한 방식의 주권이 우리가 이야기 할 수 있는 전부겠지요. 개인적으론 성육신이나 성경영감처럼 주권과 자유의지도 50대 50이 아니다 100%/100%의 문제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관점이냐 인간의 관점이냐의 차이에서 해석이 달리되는 것으로 봐요. 사역을 하고 가르치시는 입장이라 말씀하시니 필살기를 하나 알려드릴게요. 저는 주권과 자유의지에 대해 쉽게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바둑 9단 프로기사와 제가 바둑을 둔다면, 한 턴 한 턴을 볼 땐 저의 자유의지로 두는 것이겠지만, 게임 전체로 볼 땐 전부 프로기사의 의지대로 진행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이와 비슷하다. 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비유가 다 그렇듯이 완벽하지 않고 구멍이 있지만 적어도 직관적이고 이해가 쉬워서 도움이 되는 비유입니다. 파라오 문제는 좀 길어서 다음 영상의 23분 50초부터 보시면 제 의견을 들으실 수 있으니 참조해주세요. kzbin.info/www/bejne/sJ3VpJ2JiZefldE
@brianjhlee4099
@brianjhlee4099 4 жыл бұрын
좋은 답변과 비유를 주셔서 감사해요. 참고하겠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중보하겠습니다 :)
@leopardolee4910
@leopardolee4910 10 ай бұрын
오랜 구독자이고 전에도 이 영상을 봤지만 다시 보게 되네요 최근 기독교 유튜버 다니엘라, kei is loved 이분들이 영상을 다 내리고 한명은 잠적 한명은 아예 댓글막고 새로운 류의 영상을 만들고 있는데 이것이 칼빈주의,, 김ㅎㅁ 교수,, 뭐 이렇게 연결 연결 유튜브 찾아 돌고 돌다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user-vt5vn6go7c
@user-vt5vn6go7c Ай бұрын
하나님의 의도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돌이켜서 복음을 믿기로 결정하면 흑인이건 소말리아 사람이건 거지이건 부자이건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믿고 안믿고는 인간의 책임입니다.
@katej1344
@katej1344 3 жыл бұрын
만약에요 하나님이 첨부터 구원받을자와 그렇지 못한자를 나누어 놓으셨다면 하나님이 심판하실수 있나요? 또 성경에 수없이 나오는 하나님의 회개의 촉구와 아버지의 애끓는 기다림은 다 무언가요?? 그리고 만약 나의 가족중 하나라도 선택받지 못한자에 속해있다 가정하면 정말 끔찍합니다. 전 예정론의 신한적 논쟁을 떠나 정말 하나님께 가길 원하는 자에게는 그가 누구든지 후히 구원을 베푸시라 여깁니다 어쩜 진정한 예정이란 하나님은 사람의 자력구원이 불가능하므로 은혜로 구원해주기로 예정하셨고 그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도록 예정해 놓으신그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중요한건 내가 지금 구원의 증거를 보이며 빛의 자녀로서 살아가 전도의 통로가 되고 있는지일겁니다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3 жыл бұрын
제 말이요.. ^^
@user-go2sv6jn9i
@user-go2sv6jn9i 3 жыл бұрын
엥? 그렇다면 예수님의 존재도 여호와하나님의 존재도 모르고 죽었던 조상들도 심판할수 없다는 말이 되지 않나요? 그들도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예수님을 모르던 시절에 태어난거아닌가요? 그게 아니라면 자유의지문제라면 이순신장군같은 분이나 예수그리스도 자체를 모르고 죽었던 분들도 심판받을수 없으니 어디계실까요? 애초에 선택권이 없던 자들이 지옥에 있다면 하나님은 공정한 분이 아니게 되는거잖아요? 그런데 선택이 아닌 자유의지라구요?
@user-go2sv6jn9i
@user-go2sv6jn9i 3 жыл бұрын
@@DamascusLiveTV 다미스쿠스님 그렇다면 애초에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죽으신 분들이 지옥에 있다면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 아니잖아요. 그들은 자유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그시절에 태어났으며 지옥에간거잖아요?
@user-ch8yh6um3g
@user-ch8yh6um3g 3 жыл бұрын
장로교 교인들이여 예정론에 속지 말라 kzbin.info/www/bejne/r53XZXatns-joZY 다른 복음을 전하다가 지옥에 가는 사람들 kzbin.info/www/bejne/rJeoaWpvapmghJo 복음 전파의 정석, 복음은 이렇게 전해야 합니다. kzbin.info/www/bejne/oZ7boKyMbdFohJo
@BE-mr5sm
@BE-mr5sm 4 жыл бұрын
알미니안/웨슬리안들도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믿죠. 단지 칼빈전통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믿을 뿐입니다. 칼빈전통에서의 예정은 (구원에 있어서) 운명론적이고, 인간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누구는 구원 받고 누구는 심판 받는다는 것을 예정한다는 관점입니다. 반면에, 알미니안/웨슬리안전통에서의 예정은 인간의 선택을 미리 아시고 그것(divine foreknowledge)을 바탕으로 어떻게 일하실지 예정하신다는 관점입니다. 예를 들자면, 칼빈전통에서는 구원 받을 것으로 예정된 자들이 회개도하고 믿음도 갖게되죠. 동시에 심판을 받을 것으로 예정된 자들은 제대로된 회개나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그에 반하여, 알미니안/웨슬리안전통에서는 죄로부터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을 예정하시고, 그렇지 않은 자들에겐 심판을 예정하시죠. 이 두개의 관점의 차이는 흑과 백의 차이입니다. 칼빈전통의 예정에서 구원 혹은 심판을 받는 것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에게 있죠. 애초에 어떤 사람들에겐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자유 자체가 박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의 하나님은 단지 불공평할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인간들을 저주하고 심판하기 위해 그들을 만들었다는 신성모독적인 의미가 됩니다. 반면에, 알미니안/웨슬리안 예정에서 구원 혹은 심판을 받는 것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인간에게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십니다.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인 은혜(인간이 자유의지로 하나님께 잘 응답할 수 있게해주는 은혜)를 주시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특별한 은혜(구원의 은혜, 칭의/성화)를 더하시죠. 이러한 점에서, 칼빈전통의 예정과 알미니안/웨슬리안 전통의 예정의 차이는 흑과 백의 차이와 다름이 없습니다. 절차탁마가 가능한 영역이 아니죠. 다메섹님의 영상 말미에 나온 예정에 대한 지지는 칼빈전통 예정에 대한 지지라기 보단 알미니안/웨슬리안 전통 예정에 대한 지지로 보이네요. 추가적으로, 하나님은 인간들과의 사랑의 관계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자유가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죠. 사랑은 강요될 수도 없고 억지로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폭력적인, 억압적인, 사람을 이용/오용하는 관계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혹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살아있는 이들과의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자유가 없는 물건(로봇/인형 등와 같은)과의 피상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그 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성경 많은 부분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칼빈전통의 신학자분들, 목사님들, 형제 자매님들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칼빈전통의 예정론은 비그리스도적인 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하나님을 인간의 폭력적인 주권(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주권과는 다른)이란 프레임에 가둬두려는 시도와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그리며, 더 나아가 하나님을 심지어 악의 근원이라고도 묘사할 수 있는 논리적 결과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신비를 모두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신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이, 성경과 예수님 안에서 분명히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길에 합당하지 않을 때에는, 그 방식이 문제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는 정직함과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4 жыл бұрын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저의 예정에 대한 지지에 대해 좀 덧붙이자면, 제가 칼빈보단 웨슬리쪽에 가깝기는 하지만 웨슬리의 신학 (엄밀히 말하면 웨슬리 설교를 이후 사람들이 집대성한 신학)이 꼭 맞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정에 대해 신앙적으로 말씀드린건 사실 예지예정도 아니구요. 그냥 말 그대로 논리적, 교리적 체계가 없는 개인적 신앙고백의 차원입니다. 하나님이 제 인생과 세계를 이끌어 가신다는 고백이죠.
@user-rs8iz1bg1o
@user-rs8iz1bg1o 4 жыл бұрын
@[북튜브] 책과 생각 플러스 삼위일체같은 교리를 기존 문화에 끼워맞추는 식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한국에서 삼위일체를 무당접신하는듯한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영안이 열린다거나 영빨/기도빨이 쎄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그와 같은 이유겠죠.
@BE-mr5sm
@BE-mr5sm 4 жыл бұрын
@@DamascusLiveTV 네 댓글 감사합니다.
@BE-mr5sm
@BE-mr5sm 4 жыл бұрын
@[북튜브] 책과 생각 인간 이성의 우상화 (혹은 합리주의의 우상화)가 가져올 수 있는 신학적 오류와 그 심각성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하고 하며,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비이성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서, 무비판적으로 칼빈주의 예정론을 수용하자는 주장을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그 주장에 대한 그 어떠한 지지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셔야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예로 드셨는데, 이 교리는 성경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진리들 (예: 기독론, 예수님의 완전한 하나님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되심) 위에 세워진 교리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이 그 보다 무한히 크신 하나님을 두고서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칼빈주의 예정론은 어떤가요? 계시된 진리들 위해 세워졌다고 믿으시나요? 하지만 다른 계시들과 상충하는 부분들이 (예: 제가 위에 언급한 부분들) 많기 때문에 그것이 온전한 진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칼빈주의 예정론은 말그대로 인간이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주권이란 어떻다 라는 특정한 개념을 갖고서, 그 개념에 맞추어 하나님의 예정을 이해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 예정론이야 말로, 형제/자매님께서 우려하고 계신 이성주의/합리주의가 나은 위험한 결과물인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교리가 성경의 계시들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마땅히 수정되어야겠지요.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양립할 수 없다고 말씀드린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100% 양립한다고 믿지요. 제 주장은, 칼빈주의 예정론이란 프레임 안에서는 그 둘이 양립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칼빈주의 예정론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인간의 책임은 성경과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과 같지 않습니다. 형제/자매님은 다음과 같이 글을 쓰셨죠. “합리주의의 틀 속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으니 모든 책임도 하나님께서 지셔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니께서는 인간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인간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걸 보니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건 아니구나 생각하게 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을 강조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을 말하고, 인간의 책임을 말하면, 그 계시에 맞는 방식으로, 그 분의 예정과 주권 그리고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이해할 생각을 하셔야죠. 도대체 왜 하나님의 계시들이 서로 상충될 수 밖에 없는 방향으로 (칼빈주의 예정론) 이해하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형제/자매님께서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씀하고 있지만, 인간 이성에 합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선하게 만들려 하면 딴길로 빠지게 됩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바르게 드러내고 있다 여기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훼손하고 있는 거죠. 인간 중심의 신학이 낳는 자연스런 결과로 보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에 친숙한 것 또한 당연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단지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창조하신 보편적인 도덕적 선을 넘어서서 성경과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선에서 그 근원을 찾습니다. 반면에 제가 묻죠.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을 훼손한다고 보시는건가요? 오히려, 형제/자매님 께서 하나님의 주권을 말씀하시지만, 인간 이성에 합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악하게 묘사하며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으시나요? 칼빈주의 예정론이야 말로 인간 중심의 신학이 낳은 결과입니다. 오랜 인간의 역사 속에서 폭군과 같은 왕의 주권에 익숙해진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을 그것과 같게 투영한 심각한 실수입니다.
@user-ll6gz6if9h
@user-ll6gz6if9h 4 жыл бұрын
S Hine 공감됩니다만 좀더 구체적으로 자료를 받아볼수 있을까요?? blueday3212@naver.com
@user-lj3px5jn9y
@user-lj3px5jn9y Жыл бұрын
예정이 없었으면 스스로 하나님께나아와 회개할사람은 아무도 없었을겁니다 예정되지않은사람들도 하나님은 잃어버린양처럼 똑같이 사랑하시는줄 믿습니다 이지구상에서의 보이는 모습으로 모든걸 결정하시는것이 아님을 믿습니다
@psupccea
@psupccea 3 жыл бұрын
내자신도 믿고싶진 않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창세이전에 모든것을 결정하시고 또 알고 계신것이 맞죠 누가 구원받을지 또 누가 구원받지 못할지를....... 예로써, 내가 지금 하나님을 만나 내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죽은 후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를 하나님께 물어본다면 난 모르지만(죽어봐야 알겠죠)하나님은 이미 모든걸 아시기에, 대답해 줄 수 있죠. 언제 내가 어떻게 죽을지 또 죽은후에 구원 받을지 못 받을지를......
@eunyounglee6503
@eunyounglee6503 3 ай бұрын
혹시 이 질문에 답주실분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최초의 인간 아담은 어떤 존재인가요?(자유의지를 지닌 무흠의 존재?) 창조이전에 구원과 유기를 정해놓으셨다면 왜 아담이 죄를 짓도록 놔 두어셨나요?( 즉 자유의지를 주셨나요?) 칼빈의 5대강령에 인간의 전적 타락에 의해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도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죄를 진 아담과 그 가족들 가인 마저도 하나님과 어떻게 대화했나요? 가인은 하나님께 고통스럽다고 도와달라고까지 하고 하나님이 가인을 보호하시는 장면이 성경에 나오잖아요! 둥둥떠다니는 시체같은 존재인가요? 궁금증을 풀어주실분들을 기다립니다
@user-kq2em4qf1h
@user-kq2em4qf1h 10 сағат бұрын
하나님을 창조주라 하면서 세상의 주인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그 결정 에 왜 이리 말이 많은가 선택받았던 받지않아던 하나님이 결정하신대로 이루어질것이다 누가 감히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목적하신 결정을 바꿀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힘과 지혜와 능력이 있고 강한가..? 우리가 태양을 만들수 있는가, 달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늘과 땅을 만들 수 있는가...? 우리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참새 한마리도, 구더기도 만들 수 없고, 이것들의 운명을 바꾸어 줄 수도 없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의 법칙과 질서를 바꿀수 있는가 죽지 않을 수 있는가 심판을 피할 수 있는가 지옥에 않갈 수 있는가 바꿀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비판하라 그러나 그럴수 없다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주권에 겸손히 순종하라 천국에 보내든 지옥에 보내든 순종하라 이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user-rs8iz1bg1o
@user-rs8iz1bg1o 4 жыл бұрын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감사^^ 하나님의 성품을 성경 텍스트 내의 일관성으로 비춰볼 때 당연히 극단적 예정론은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는 입장이 아닌가 싶어요, 근단적 예정론이 자기 의나 개인 타락에 빠지기 쉽게 하기도 하구요. 신학이 어려우면서도 알면 알수록 더 알고싶고 재밌어지는 매력이 있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하는 해석의 통로가 되는 문학적 텍스트로서 주는 즐거움이 있고, 그것을 개인의 삶에 살아내는 신앙적 측면에서의 즐거움도 그렇구요
@quokka_S2_cola
@quokka_S2_cola 4 жыл бұрын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게 자유의지는 단어 그대로 내 생각 내의지인 즉 "인본론"을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칼빈파던 웨슬리파던 둘다 공통적으로 말하는것이 있는데 자유의지라는것도 결국 하나님뜻안에서 움직이는것을 말합니다. 진짜 자유의지는 "신본론"에서 시작합니다.
@user-bp5cv4hj2o
@user-bp5cv4hj2o 3 жыл бұрын
더 알고싶습니다. 신본론에서 시작한 자유의지가 뭔지 검색해도 안나와서 그런데 혹시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wherefeetmayfail4911
@wherefeetmayfail4911 4 жыл бұрын
ㅋㅋ내용과 전혀 상관 없는 질문인데,, 왜 이어폰을 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ㅋㅋ 자기 목소리 녹음되는 걸 들으면서 하는건가요??? 궁금하네요 ㅎ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4 жыл бұрын
스스로 목소리를 들으면서 말하는게 더 편하고 습관돼서요.. ㅎㅎㅎ
@sjdhdhdjsbsj
@sjdhdhdjsbsj Жыл бұрын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라는 번역과 에서를 야곱보다 덜 사랑했다 라는 번역은 천지차입니다.
@fighting4786
@fighting4786 2 жыл бұрын
애초에, 우리가 자유의지가 있다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자유의지로써 생각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정론이라는것은,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던때, 곧 태어날때부터 우리가 알고있는 운명(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사주,팔자등) 이라는것을 부여받았다는것을 의미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다메섹님이 말씀하신것처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또한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것이죠. 보편적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운명에 대한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만나기전에 우리에게 매여있었지만 주님을 만난이후로는 "운명에서 해방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을 봤고, 저역시 그렇게 생각해왔었지만, 깨닫고보니 그게 아니었더군요. 단지 깨달았던 부분중 한가지를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우리들의 운명을 약점삼아 사단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허나, 하나님앞에 있는, 사단의종 되었었던 우리가 이제는 참 자유함을 얻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통해 정해진 우리의 운명은, 주님의 선하심으로써 앞으로도 성취될것임을 굳게 믿습니다.
@user-xb4tf3pu2d
@user-xb4tf3pu2d 4 жыл бұрын
둘다 주장하는 근거는 있지만 중요한건 얼마나 그 세계관이 타당한지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예정론을 믿는 분들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많이 얘기하시는데 그렇다면 아담의 타락이 예정되어 있는건지 정해진 대로 한다면 이런 세계를 왜 만들었는지 등 예정론을 반대한다면 하나님이 미래를 볼 수 없는, 전지전능자가 아닌지에 대한 세계관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에 어떤 주의에 대한 맥락 안에서만 얘기하는건 조금 무리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만약 세계관에 대한 틀이 없다면 이런 이론의 한 부분만 자르는 건 웨슬리의 말대로 그냥 놔두는게 낫다고 봅니다.
@parkdongjin3617
@parkdongjin3617 4 жыл бұрын
파라오 부분 들었을 때, 출애굽기에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이라고 하는 부분이 나오는데요...흠...
@qwerty-jk5xw
@qwerty-jk5xw 4 жыл бұрын
그렇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다섯번째 재앙까지는 파라오가 마음을 굳게 하여 he became harden 이나 그가 완악하여 he was harden 이렇게 표현 되어있어요!! 6번째 재앙에 여호와께서 완악하게 하여 라는 부분이 처음 등장합니다. 7번째부터는 다시 그가 완악하여 라는 표현이 되어있고요. 그렇게 작정하신것이 아니라 파라오의 반응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user-pr6sd1zy9h
@user-pr6sd1zy9h 4 жыл бұрын
파라오가 완악함을 자유의지로 선택한거여요 주님은 파라오의중심과 그생각이 악하심을 아시기에 롬1장 처럼 그가 선택한대로 내버려두셨구요
@TV-pc2tr
@TV-pc2tr 4 жыл бұрын
1. 예정이 헬라어 '프로위덴티아' 앞을 내다봄이라 하더라구요 전지의 영역이겠죠 여기의 하나님의 선택이 들아가있다고 보아야할까요 사실 신학자들의 영상을 종종보는데 그곳에서는 전지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아니기에 누구는지옥가고 천국가고를 정하심이 아닌 '알고계심'으로만 맺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2. CS루이스가 하나님은 늘 현재에 살고계시다말씀하신것에 공감하여 사실 그분에게 앞서 봄은 성경의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라고도 봅니다 인간은 시간에 갇혀사니깐 시간을 초월한 말씀을 하신다면 이해할수없겠죠 그러면 우리의짧은생각으로 과거의 때에 미래의 일을 정하셨다라고 볼 수 있지만 초월적인 시각에서는 지금도 그 예정하심에 포함되어있다고 보아도될까요 예정하심의 끝을 인간의 시각으로 판단하지못한다.. 3. 자유의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예정에 있다... 지금 제가 이글을 쓰는것도 예정되있다고 칼빈주의자들은 이야기합니다 개미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으니 궁금해하지말아라. 다이해할 수 없다라고하기엔 성경을 읽으면서 드는 의문은 그치지않네요. 이것을 믿음이 없다고 표현할사람들이 있다면 그분들과 대화해보싶구요 인격적인하나님이 내 뜻에 토달지마라고 얘기하시진않을것같아서. 택함받은자들을 위한 제한적속죄와 유기가 사랑이시라는 분의 아무래도 의문이 사라지지않습니다ㅎ. 양측을 주장하는 근거말씀이 다 확실한터라. 답답하여 글을 적어봅니다ㅎ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4 жыл бұрын
말씀하신 것이 칼빈주의 이중예정에 반대하는 개념인 예지예정입니다
@user-zb5yl2po1m
@user-zb5yl2po1m Жыл бұрын
예정론은 부가설명을 추가하면 추가할수록 누더기골램마냥 깔끔하지 못함
@jiwookim1762
@jiwookim1762 4 жыл бұрын
예정은 남이 아닌 나에게 적용하면 조금 더 아름답(?)지않을까 싶습니다. 나같은 자도 택해주셨음에 감사하고, 또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을 따라 행하면서 전하면서 사는거.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랑이라고 하시고 오래참으시고 자비와 긍휼이 풍성한 분이라고 하시고 우리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최근 예레미야로 큐티를 했는데 이스라엘은 그 선민의식때문에 결국 못 돌이키게 되는 걸 보면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가 나에게만 해당된다고 말하는 건 그와 다를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반역할 것을 알아도 출애굽 시키셨고 기다리셨고 훈련시키시고 진노중에 모세의 중보를 들으셨으며, 애굽왕이 완악할 것을 알아도 10번의 기회를 주셨고 그 기회를 단순히 애굽왕에게만 사용하신 것이 아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보이시고 주변 국가들이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하는 등등 한 일을 통해 수많은 방면으로 일하시는 걸 보면 역시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은 우리가 다 알수 없는 거잖아요? 역시 우리 하나님 대단대단 다 아시는데 그렇게 하신다는거 무능력이 아니라 그만큼 포기하지 않는 무한한 사랑이고 자비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사람인지라 결국 우리 생각 고 한계만큼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생각 안하려구요.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는거. 그게 제가 꿈꾸는 저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ChristIsMyKingAndImHisServant
@ChristIsMyKingAndImHisServant Ай бұрын
구절들 잘 인용하셨습니다. 이중예정이 맞다면 왜 인간을 만드심을 후회하셨고, 왜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시고 찾으시며, 왜 모세의 중보로 스스로를 그 화로부터 돌이키셨고, 유다에게도 보좌를 약속하셨으나 유다가 사탄에게 내어지길 허락하셨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선하시고 모두가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나 사랑은 강제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신뢰하고 믿고 순종하는 대신 뱀과 하와의 말을 믿고 하나님께 불순종 한것과 같이요.
@Sunny-bj1tt
@Sunny-bj1tt 2 жыл бұрын
선교사님 밀씀 감사해요 제나이 육십이가까운데 예수님을 정신차리고 믿을려고 가까이하려하면 저희 교회는장로교회인데 목사님말씀중에 십일조와 목적헌금을 작정하면 만배의 축복받는다하는말씀을 들을때와 예지는 하나님에대한 백프로 신뢰가 가는데 절대예정을 말씀하시면 속에서 거부감이나요 믿음이 심란하고 다른파로 옮겨야하나하고 너무 고민중이예요 물론 저의 부족함이 첫째지만요 전 믿음은 선물이지민 그선물을 푸는자가 갖는거라믿어요 절대 예정인지 구원에대해 더 자세한말씀 부탁드려요 방언에 대해서도요
@user-er9jx8eg6q
@user-er9jx8eg6q 3 жыл бұрын
예정론이 우리에게 거부감을 주는 이유는 사랑의 하나님이 누군가를 유기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속성에는 반드시 선택의 요소가 있기 마련입니다. 내가 a를 사랑한다는 것은 b를 선택하지 않고 a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선 이런 사랑을 우리와 하시기 위해 아담에게 하나님을 선택(순종)하거나 선택하지 않는(불순종=선악과를 먹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만을 사랑하도록 아담을 만드셨다면 그것은 로봇을 만든것이지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니까요. 제 소견에는 이 지점에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점이 있다고 보는데, 바로 전적타락입니다. 아담 이후에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선을 행할 의지가 하나도 없어 하나님을 선택하고 싶어도 우리의 자유의지로는 선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나니) 그래서 구원이 은혜의 선물이 됩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주께서 우리를 선택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누군가를 택하여 부르셨다는 말은 반대로 누군가는 택하여 부르시지 않고 내버려 두시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지옥갈 사람을 정해두셨다고 표현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자기 옳은대로 행하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표현하는게 정확합니다. 모두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유기되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니까요. 그렇기에 유기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공의와 사랑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내버려 두시고 공의롭게 심판하심이 있어야 우리를 거부할 수 없는 은혜로써 인도하시는 사랑도 온전하게 됩니다. 처음에도 이야기했지만 온전한 사랑에는 선택이란 요소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서 내놓는 반론에 칼빈주의자들이 마치 "야 그냥 토기장이 비유 봐!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판단해? 빼액" 하기만 하진 않습니다... 물론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판단하면 교만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전적타락했다면, 그래서 내가 죽을수 밖에 없고 하나님을 선택할 선한 의지조차 없다는 것에 동의가 되면 나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소망은 창세 전에 미리 정하신 나의 구원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조차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게 동의가 되시는지요? 웨슬리가 비판한 지점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믿기만 하고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니까요, 하이퍼 칼빈주의, 구원파같은 이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음을 강조하는 일, 하나님의 주권을 흐리는 일은 더더욱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옳은 것은 더욱 옳게 추구해야지 다른 방식으로 추구하면 그것은 더이상 옳은것이 아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행위 모두 중요하지만 전적타락의 교리가 끝없이 회개하는 삶 속에서 받아들여진다면 믿음에 기초를 두고 그 위에 행위를 쌓는 형태가 되는것 같습니다.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3 жыл бұрын
두가지 의문을 제기해봅니다. 1. 전적타락한 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을 수 없는가? 오히려 타락했기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방법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믿음은 선행이 아니라는 점에는 대부분의 개혁주의자들도 동의한다. 그렇다면 왜 인간이 선행을 할 수 없는 상태란 사실이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없는 상태란 생각으로 이어지는가? 2. 선택하지 않고 유기한 자들의 죄가 자기 자신의 선택 때문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내버려두는 (개혁주의자들의) 하나님이 공평한 것은 아니다. 자식이 5명 있는데 5명 모두 양아치라 내버려두면 곧 교도소행이 예상된다 해보자. 그 중 2명만 사랑과 정성, 교화 노력을 들이는 아버지가 있다. 나머지 3명이 교도소에 간 뒤 말한다. "왜 우리는 내버려두었느냐, 이건 불공평한 게 아니냐." 구원받은 2명의 자식이 답한다. "너희가 교도소에 간 건 너희 탓이다. 아버지가 너희를 교도소로 보낸게 아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완벽히 공평한 분이다. 그분의 주권을 해하지 말라." 과연 이 아버지는 공평한가? 구원받은 2명의 아이들의 태도는 합당한가? 아니라고 답한다면, 개혁주의자들의 태도가 이 2명과 거의 흡사하다고 말해야겠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user-er9jx8eg6q
@user-er9jx8eg6q 3 жыл бұрын
@@DamascusLiveTV 답변 감사합니다. 저는 평신도라 전문적으로 신학을 하는건 아니지만 이렇게 나눠가며 무엇이 옳은지를 나누는 과정에서, 어떤 점이 달라서 분기하게 되는지 아는 것은 매우 유익한것 같습니다. 어떤 것들이 다른지 이해할 수 있게 잘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을 바로바로 드리지 못하는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ㅠ 말씀하신 분기점들에 대해 제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선행을 못하는게 왜 믿지 못하는 것인가? 에 대해선 제 생각에는 의인이 없다는 것이 단지 남을 돕는 일 등의 행동을 못하게 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정신작용 등을 포함한 모든 선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인을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강간하는 것과 같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일이 선한 일인 이유는 ㄱ. 하나님께로 모든 선한 것이 나옴 (약 1:17) ㄴ. 성령하나님이 아니면 예수를 주시라 할수 없음(고전 12:3) ㄱ과 ㄴ을 고려하면 예수를 주라고 하는것, 즉 믿는것이 하나님 때문에 가능하고 하나님께로 나온 이 믿음이 선한것이라고 볼 수 있는것 같습니다. 2. 공평한가? 라는 질문에 저는 하나님의 공평의 개념이 사람의 공평의 개념과 다르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구원문제 말고 또 성경의 다른 예는 아침일찍부터 일한 사람과 저녁에 들어온 사람이 같은 일당을 받았다는 것인데,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이 불공평해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 이야기합니다. 내가 가진 공평의 개념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속에서 얽히고 설켜 구축된 잘못된 개념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공평에 하나님을 끼워맞추려는 시도보다는 하나님의 공평에 내가 따르는게 맞다고 봅니다. 내버려 두신 이유는 불공평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피조물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기에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모두를 구원한다면 그것은 애초에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어야 하는것과 똑같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존재를 만들게 되는것이니까요. 진정한 사랑에는 선택이란 요소가 있기 마련입니다. 불공평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죄 지은 사람이 사망하게 되는 공의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것처럼 2명의 사람들이 3명의 사람들에게 "너희,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건 당연해" 라고 말하는 것은 틀렸습니다. 왜냐면 가장 먼저는 그 2명은 현 시대에서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는 표현은 없고 우리 삶을 경주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셔서 우리의 구원이 태초부터 미래까지 현재로 존재하시지만 우리에겐 우리가 새몸으로 부활해 사는건 미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미래의 일을 절대 알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전도서 9:1) 따라서 우리는 미래에 있을 나의 구원을 지금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선민사상을 갖고 사는것이 구원파같은 이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나도 구원받았는지 모르고 저 사람도 구원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도, 상대방도 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평의 개념을 이야기하며 마치 자긴 구원받았기 때문에 안전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배격하는 듯하게 이야기 하는것은 반드시 잘못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공평 개념은 틀리지 않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태도는 틀리기 쉽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seongilyeo984
@seongilyeo984 3 жыл бұрын
성경이 말하는 중요 포인트를 놓치고 계시네요. 이 부분이 잘 정리되면 성경이 이해하기 쉽습니다. 전적타락, 자유의지 이런 단어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아무 도움이 안되는 단어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우선 해결해야 할 신학적 문제점을 보자면, 로마서 9장의 토기장이 비유는 예레미야 18장을 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토기장이 비유의 본 뜻이 구약에 있습니다. 대부분 토기장이 비유로 예정론 주장을 하시는데, 굉장히 큰 오해가 뜻하지 않게 나쁜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토기장이는 자기가 만든 그릇을 얼마든지 깨뜨릴 수 있습니다. 아끼는 그릇이든 아니든 관계없습니다. 오히려 아끼는 그릇에 흠이 나면 흠이난 그 그릇을 가차없이 부서버리고, 또 그렇게 부서버린 그릇은 다시 본래 그릇으로 되돌아오지 못한다는 경고입니다. 이 점이 토기장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9장의 토기장이 비유는 좋은 그릇이 흠이 생기면 그 그릇을 아끼지 않고 부숴버리며 다시는 그 그릇은 좋은 그릇이 될 수 없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히브리서 6장의 경고와 히브리서 10장의 경고가 토기장이 비유를 풀이한 구절입니다. 예정론의 근거구절이 될 수 없지요. 오히려 예정론이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되는 구절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조하는 바는, 빛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빛이 없을때엔 어둠에서만 살았지만, 빛이 나타남으로써 빛을 따라갈 수 있게 된것이죠. 그리고 빛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빛을 따라가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이 있으며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지만, 빛을 알고도 빛을 따라가지 않는 자에게는 가차없이 버리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번 버림받으면 다시는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빛을 따라가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자고, 빛을 따라가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으니까 안따라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능력인데, 그 능력 중에 하나가 성령을 각 사람에게 주셔서 그 사람이 죄에서 완전히 떠나게 도우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빛을 따라가는 사람이 온전한 의를 이뤄서 율법의 의를 이루게 하시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자는 빛을 따라가며 성령의 도움으로 죄에서 떠날 것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자는 성령을 따라가지 않고 죄에서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못믿는 것이므로 믿음이 없다는 증거와도 같습니다. 세상은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으로 빛을 따르는 자에게 죄에서 벗어나게 도우십니다. 믿음의 증거는 그 사람이 죄를 반복해서 짓는지를 보면 알 수 있고 또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으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자는 죄에서 떠나고자 발버둥치고 또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려고 애쓸것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못믿어 죄에서 떠나고자 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더하려고 반복해서 죄를 짓거나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그 사람은 버림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시험하면 그가 하나님께 의를 받았다고 해도 그 사람의 결말은 멸망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가르치는 본뜻입니다.
@r3t34rkrl3kl
@r3t34rkrl3kl 2 жыл бұрын
언제 예정론이 저런거였지ㅋㅋㅋ 원래 지나고 고백하는 차원에서 그나마 이해하는 거임
@user-kr4cy1wc8i
@user-kr4cy1wc8i 2 ай бұрын
아주 잘 설명했습니다. 형제님..... 감사합니다. 예정론은 사실 그 교리를 으지하는 수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고 있는 이단교리입니다.
@jeonghyeonchoi3530
@jeonghyeonchoi3530 11 ай бұрын
롬 9장은 이스라엘의 택함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택함에 대하여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토기장이가 임의로 그릇을 만들듯이 하나님은 임의로 이스라엘을 택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에 대하여 이의를 달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택함은 언약과 복음은 믿음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언약은 유대인에게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택함은 엡 1장에서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예정을 입어 기업으로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기업으로 택함을 받은 것을 구원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구원은 믿음에 의한 것으로 율법의 조건이 행함이듯이 복음의 조건은 믿음입니다. 곧 율법은 행함의 의이고 복음은 믿음의 의입니다. 이 복음으로 하나님의 경륜인 하늘것과 땅의 것을 통일하려 하시는 것으로 이는 곧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은 하나되게 통일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에 미리 택한 자가 있다는 예정은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구원은 무조건적이 아니라 조건적입니다. 그 조건이 곧 믿음입니다. 이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하고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행함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구원을 선물이라 한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과 구원도 구별하지 못한 예정론은 잘못입니다.
@resurgamm
@resurgamm Жыл бұрын
더글라스 무의 NICNT 주석도 보셨나요
@Pneo01
@Pneo01 3 жыл бұрын
한가지 생각은, 하나님께는 시간이라는 것이 아무런 장벽이 되지 못하고 전지하시니, 우리 자유의지의 결과를 이미 알고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의지의 결과를 이미 아시는 것 아닐까 합니다. 하나님께는 양자역학이 의미가 없는거죠. 이미 관측된 상태이니까.
@sammyjjang
@sammyjjang 4 жыл бұрын
저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한 지역의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큰 은혜를 입은 자로써 결혼전이시거나 자녀를 길러보시지 않으신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결혼하시고 꼭 자녀를 길러보세요^^) 어린 아이들을 키우면서 더욱더 느껴지는것은 하나님의 예정의 감사이며 자녀 양육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알게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죠! 특히 어린 아이를 기르다보면 아이가 하는 거의 모든 행동들의 결과를 “뻔히” 알수 있죠. 예를 들면 아이에게 뚜껑이 없는 일반 컵에 우유를 담아 쥐어주면 10초도 안지나 다 엎어지겟죠..당연히 뒷처리도 제 몫이 되겠구요 ^^;; 그래서 아이에게는 꼭 뚜껑이 있는 컵을 줍니다. 엎을껄 아니까..너무 간단히 비유이지만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심을 따라 타락한 우리의 자유의지로는 절대로 선택 할수 없는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제가 섬기고 있는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신학은 올바른 신앙 위에 쌓아야 한다” 우리가 예정론과 자유의지를 논하기 전에 (특히 구원적 관점에서) 먼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진정한 구원의 감격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뤄져야 될 토픽이라 생각됩니다. 한 성도가 복음에 반응할때 예정론이냐 자유의지냐가 중요하지 않죠. 다만 구원을 얻은 자가 그 구원을 주시기 위해 성삼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다 깊이 알아갈때 예정과 자유의지의 관계를 바로 이해할때 감사와 사랑이 더욱 넘쳐날 것입니다. 마치 한 아이가 놀라운 선물을 받아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 그 선물을 주신 부모님의 노고와 헌신과 사랑을 안다면 선물의 기쁨과 함께 부모의 대한 사랑이 더욱 커지듯 말이죠.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를 겸손케하시고 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시하신 놀라운 신비이자 비밀임을 확신합니다. 따라서 제 결론은 참신앙이 없는 예정과 자유의지의 교리적해석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 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는 바른 “신앙”교육과 생활이 “신학/교리”교육보다 먼저 선행되야한다 입니다. 늘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user-rs8iz1bg1o
@user-rs8iz1bg1o 4 жыл бұрын
제 경험상 바른 신앙을 위해 (바른) 성경 교육이 필요하더라구요, 처음에 믿게 되었을 때는 그저 구원의 기쁨만으로도 충분한데 신앙이 성장해가려면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면 신앙이 방향이 바르게 잡히기 불가능하다 생각합니다. 저는 반드시 바른 성경 공부가 필요하다가 생각됩니다. 신앙 생활 아무리 오래 하고 어떤 면에서 겉으로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장로님들? ㅎ) 예수님과 닮아가지 않는 모습만 많이 봐도 알겠죠? 그런 의미에서 예정론이나 자유의지냐를 고민해보는 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jenver9013
@jenver9013 4 жыл бұрын
흠.. 전 어릴 적에는 감리교에 다니면서 감리교리가 익숙하고 나이가 들어서 장로교신학을 배우면서 지내왔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예정론을 더 믿는 편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한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의지를 알고 있기에 예정을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시간안에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영상에서 말씀 하셨듯이 미리 예견을 해서 선택을 하고 안하고 가 아닌 시간의 밖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미리 알고 계신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칼빈주의도 하나님의 전지전능 하심을 가지고 해석을 하다보니 그에 따르는 한계는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런말저런말 들이 나오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전체적으로 사랑 하시지만 우리 인간의 선택으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 진다에 동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둘다 맞다고 생각하고 생활 하곤 합니다. 믿기 전의 사람에게는 믿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웨슬레가 말하는 것이 동의를 하고 믿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면 나를 선택 하셨을 까 하는 것에서 칼빈을 선호 합니다. 뭐... 어떤 것이 맞던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 하렵니다.
@samskim5948
@samskim5948 6 ай бұрын
(로마서 9장 / 개역개정)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토기장이의 그릇은 선택과 유기의 대상인데, 그 대상이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 그렇습니다. 9장은 민족적 이스라엘에 대한 선택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이방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개인 예정에 관한 글이 맞습니다. (로마서 9장 / 개역개정)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그리고, 그 그릇에 대한 진노(유기)와 긍휼(선택)이라는 표현은, 구원에 관한 표현이지, 누구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했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누구나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결코 모순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모든 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지만, 오직 선택된 자만이 그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면 이것은 억울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아래 구절이 답입니다. 어느 유기된 자도 자신인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왜 존재하지도 않는 가능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예정을 폄하하고 부정하나요? 더구나, 그것이 나는 나는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자기의 생각으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FACT-ip9cw
@FACT-ip9cw 2 жыл бұрын
음.. 성경 읽다보면 귀있는자 라고 많이 나오는데 그것만 봐도 이해가됨. 이해안되면 그냥 선택받지못한거임.. 대충 영상 설명들어도그냥 성경중심이 아니라 입맛대로 성경위에 하나님위에 존웨슬리가 있는거임 ..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않는데.. 어떻게 천국감.. 그리고 대부분 찬양에서 하나님의 은혜 , 감사 이런것들 왜나올지 생각은 안해보셨음?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고 지금삶자체가 감사하다면 예정론을 믿어야지 믿지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내 노력으로 얻은것이고 삶을 주신것도 내가 스스로 자유의지로 노력해서 얻은것이다?ㅎㅎ 그럼 신은 왜있냐 ㅋㅋ
@TheMoonyangil
@TheMoonyangil 4 жыл бұрын
영상 잘 봤습니다~ 많은 부분에 공감이 가고요~ 다만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반대로 생각해 볼께있어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영상을 보신 분들에게요~ 자칫 예정론대로라면 하나님은 증오의 하나님이나 선택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매정한 신으로 생각 할 수 밖에 없다라는 오해를 할 수 있는데 반대로 선택할 기회 조차 없는 뱃속에서 소멸된 태아나 자폐증, 정신질환등 자유의지만으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자들이 무조건 자유의지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하나님이 더 무섭고 매정한 하나님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사실 자유의지로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더 나은 상황과 기회를 얻는 사람들일 확률이 많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선택받았고 자신을 구원받았다고 믿는 자들이 실제 삶에서는 그 증거가 보이질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아닐까요..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user-qc6cu5nj4r
@user-qc6cu5nj4r 4 жыл бұрын
'자유의지나 예정론 중 뭐가 맞다!' 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균형적인 시각으로 상황에 맞게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4 жыл бұрын
기회가 되면 추후 이런저런 가능한 반론들에 대하여 추가영상을 만들어 볼게요
@gt-sx8pw
@gt-sx8pw 4 жыл бұрын
이야 굿댓글이다
@monacobluehwang8060
@monacobluehwang8060 Жыл бұрын
14:50
@user-yu3sh9lg4o
@user-yu3sh9lg4o 10 ай бұрын
저는 칼빈주의를 채택하겠습니다 뭘택하든 자유니까요 ^^
@Anonymous-ux2co
@Anonymous-ux2co 4 жыл бұрын
아직 안봤지만 다는 댓글
@user-qr6il5jz7p
@user-qr6il5jz7p 2 жыл бұрын
예정이란 관점에 대해서 누구는 천국 가고 누구는 지옥 가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이미 전제가 잘못되었음,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사망이 왕노릇한 상황으로 구원에 관점에서 바라보아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끝까지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이끄시고 인도하신다는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들어 예레미야 같은 경우도 그에 해당하겠지요. (렘 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user-en9oi8of9e
@user-en9oi8of9e 4 жыл бұрын
하나님 예정론,자유의지론 초월하신분~~
@Uglylips
@Uglylips 4 жыл бұрын
안녕하세요 영상들 잘보고있습니다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질문할게 좀많아서 대충뽑아 몇개만할께요 시간 있으시면 댓글좀 달아주세요 님영상보니깐 모르면모른다 솔직히 말씀하시는 모습에 님같은 분이면 잘대답해주겠다 생각해서 몇자 적어봅니다 나쁜의도같은건없고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거니깐 좋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1.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하나님을 믿든 말든 자유롭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않으면 지옥간다는데 저기서좀 이상합니다 믿든말든 자유지만 날 믿지 않으면 지옥가!!이게 맞는건가요? 2.성경에 노아의 방주를 아주 정확한크기까지 적어놨던데 타이타닉호 반정도 크기던데 그많은것을 어떻게 실었을까요 3.대홍수때 사람들이 나빠서 다죽였다고 하는데 뱃속에있는태아나 태어난지 한달도 안된 애기들은 왜다 같이 죽이신건가요? 4.선악과 얘기중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꺼라는걸 분명알고계셨을텐데 왜 먹지말라고 하셨나요? 우선 저 네개의 질문이 정말궁금합니다 제발 답변좀 부탁드립니다 채널 항상 잘보고있어요 앞으로 더 좋은영상 기대하겠습니다~
@gypgoodandtruth6783
@gypgoodandtruth6783 4 жыл бұрын
이세상 저는 장로교는 아니고 천주교이지만 다메섹 선교사 님의 영상을 자주 봅니다. 제게 도움 되는 영상이 많아서요. Butting in하는 거지만 혹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제가 알고 있는 2, 3번 노아의 홍수에 대해 답변을 답니다. 노아의 홍수에 대한 근거는 1만 3천년 전 younger dryas 때 comet 소행성 충돌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2018년 말 NASA에서 Greenland 부근 소행성 충돌 흔적을 찾았고 이 밖에 다른 소행성이 대서양, 유럽, 남미에도 충돌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cpu simulation으로는 평균 200m에서 최대 1km 높이의 tsunami가 대륙을 덥쳤지요. (롯데 타워 높이가 500미터입니다) 그래도 인류는 살아남았습니다. 단 대홍수 후 남미에서 문명의 흔적이 사라졌음을 확인 하였습니다. NASA에서 2018년 말 확인한 그린랜드 소행성 충돌 흔적 kzbin.info/www/bejne/rIXVZImafNF5qJo Younger dryas 소행성 충돌 관련 영상 kzbin.info/www/bejne/mJfZg2qag6d9h8U kzbin.info/www/bejne/moukZZqIrbJnjZI Younger dryas comet impact와 Noah’s flood관련 과학 잡지 article. humanoriginproject.com/early-earth-history-the-great-flood/ 2. 성경에 나와 있는 노아의 방주에 대한 크기는 No Commet입니다. 왜냐하면 치수나 척도가 어느정도 통일 된지가 나폴레옹 때 부터 입니다. 대홍수 당시 척도의 실제 길이가 얼마인지 알 수 없습니다. 3. 영혼은 영생 합니다. 따라서 대홍수로 아기가 사망해도 천국으로 불러 들이는 것일 뿐이지요. 이 아기는 구원 받아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정말 무서운 건 지옥으로 가는 것이지요.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4 жыл бұрын
질문의 퀄리티가 너무 훌륭하신데 비해 시간적 한계로 링크를 드릴 수 밖에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만큼 짧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좋은 주제들이라 그렇습니다. 1. 제가 번역한 이 설교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정말로 좋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kzbin.info/www/bejne/pZvXc4OrhMmqr5o 2. 이 글이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m.blog.naver.com/osm4709/220612559351 3. 저도 모르겠습니다. 4. 선악과 뿐 아니라 에덴동산에 대해 설명하는건 쉽지 않습니다. 온갖 은유와 메타포적인 언어로 쓰여진 내러티브이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되면 다뤄보겠습니다.
@Uglylips
@Uglylips 4 жыл бұрын
@@gypgoodandtruth6783 정성스러운 답글 정말 감사합니다 2.제가 어디서 노아의 방주가 발견됐다는 보도를 본적이있는데 거짓보도였나보네요 답글 감사합니다 이해했습니다 3.천국으로 불러들이셨다니 좋은뜻으로 받아들이는군요 이거는 제가좀 이해하기 힘드네요 혹시 죄송한데 예수님 돌아가시기 전에 사람들은 전부 지옥에 갔다고 들었거든요 제가 잘못아는거면 말씀좀 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맞게 들은거라면 애기들과 태아는 왜지옥에 간건가요? 궁금합니다 시간 있으시면 답변부탁드립니다
@Uglylips
@Uglylips 4 жыл бұрын
@@DamascusLiveTV 정성스러운 답변 감사 드립니다 조금 아쉽네요 링크보단 님의 의견들을 듣고자 질문한건데...그래도 바쁘신 와중에 답글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종종 궁금한거 있으면 물어볼께요 바쁘시더라도 시간 나실때 답글 부탁드립니다~
@gypgoodandtruth6783
@gypgoodandtruth6783 4 жыл бұрын
이세상 아이고 저도 여기 채널와서 배우는 입장인데요. 간단히 이것만 답변 답니다. 2. 노아의 방주는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발견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으나 모두 거짓입니다. 저는 목재로 제작한 방주가 분해되지 않고 아직도 있다면 기적이라고 봅니다. 3. 가독교 교파에 따라 해석이 다르고 저는 다 이분들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중요한 건 믿음과 양심이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고 양심이기에 이로 본다면 아기를 지옥으로 보내지 않았겠지요. 또한 예수님 이전 태어난 사람들도 양심이 율법이 되어 생활 하였다면 구원 받을 것이라 바오로가 말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작성합니다.
@user-fu7nu1dw4i
@user-fu7nu1dw4i 4 жыл бұрын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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