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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교수들이 예정론을 놓고 토론하면 생기는 일ㅣ박재은 교수 vs 장재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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Пікірлер: 274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Жыл бұрын
본 방송은 홀리컴뱃 2를 제작하기 위한 펀딩 이벤트 (아래 링크) 로 진행되었습니다. go.missionfund.org/holycombat2 두 교수님의 홀리컴뱃 10라운드 풀버전을 보고 싶으시다면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kzbin.info/www/bejne/fnzdaJ2QfpuZlc0
@user-xt5ke9dx2p
@user-xt5ke9dx2p Жыл бұрын
두 분에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장재호 교수님 말씀에 감사합니다
@user-lw7rl8dp4z
@user-lw7rl8dp4z Жыл бұрын
박재은교수님의 예정론을 확실히 지지합니다 박교수님 홧팅 할렐루야_~^^
@user-ou7yt1hn3n
@user-ou7yt1hn3n Жыл бұрын
다른 분도 말씀하신 거지만 믿음으로 퉁칠 것 같으면 애초에 이런 토론을 하는 이유가 없죠. 자기 믿음을 얼마나 논리적으로 잘 변론하고 타인의 주장을 논박할 수 있는가 그걸 따져보자고 토론을 하는 건데요. 믿으니까 믿음이다는 식으로 논변할 것 같으면 로고스가 성립을 하겠습니까. 그게 기독교에서 비판하는 상대주의의 맹점 아닌가요.
@frrddeed5
@frrddeed5 Жыл бұрын
그렇게 똑똑하시면 홀리 2에 신청해보세요. 얼마나 논박 잘하나 보게. 온라인상으로 남 뒤땅 까지말고.
@ericgrace4739
@ericgrace4739 Жыл бұрын
@@frrddeed5논리적인글에 무논리로 이야기하면 어찌힙니까 깽패입니까.?
@user-qy3fn6nj5u
@user-qy3fn6nj5u Жыл бұрын
@@frrddeed5댓글은 내용에 대한 반론인데, 본인은 타인을 정죄하는 혐오를 하네. 이러니 개독이라 불리지.
@user-xu1qq6xx3v
@user-xu1qq6xx3v 8 ай бұрын
예상된 답변 실망이 아니고 수준이 영 아니다 입니다. 뭔소린지도 모르겠고. 차라리 소설가가 더 통찰력 있지않나 싶네요. ㅎ ㅠ
@traum2002
@traum2002 8 ай бұрын
이런 배틀이 바로 조직신학입니다. 조직신학은 상대 교파의 허점을 파고들어 공격하고 자신들의 교리를 방어하기 위한 학문입니다. 기독교는 수천년 동안 이 논쟁을 치열하게 해왔고 각 교파의 대부들이 있지요. 그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나름의 논리정연함이 있고 높은 신학적 연구와 고찰을 하였는데. 저 박재은 교수라는 분은 전혀 그런 소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믿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만 하는 사람이 신학교 교수라는 것이 믿기지 않네요.
@user-pt7kb6mx4c
@user-pt7kb6mx4c Жыл бұрын
예정론과 관련해서 중요한 포인트는 예정은 곧 하나님의 "영원성"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 예정은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자유의지의 근거가 된다...... 즉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을 때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와질 수 있다. 도덕법칙이 있다는 것은 기계론적 물리법칙으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도덕법칙은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단순히 기계적인 물리법칙에 종속된 결정된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그 자유의 형이상학적 근거로 하나님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도덕법칙-율법-에 자율적으로 따르면서 기계적인 물리법칙의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는 진정한 자유를 가진 존재임을 실천적으로 증명한다. 하나님의 예정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정확하게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참여함으로)인간은 단순히 도덕법칙의 노예로써 도덕법칙을 의무감만으로 순종하는 존재, 단순 도덕법칙의 저주가 아래 높이지 않고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자유와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이중예정에서 중요한 포인트 중 또하나....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유기(or 심판)하시기로 한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이 악하신가?? 결코 아니다.... 인간중심주의-인본주의의 문제는 인간을 가치의 중심으로 생각-판단하는 것인데, 이것은 곧 죄이다. 단 한 사람도 구원하지 않고 모든 인류를 다 심판하신다고 해도 그것은 곧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선하심을 훼손하지 못한다.
@user-ou7yt1hn3n
@user-ou7yt1hn3n 8 ай бұрын
말에 어폐가 있으신데요. 예정과 자유의지의 양립불가능성을 논할 때 자유란 '하나님 가운데 있을 때 인간은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다'의 자유가 아닙니다. 가령 예정론에 따르면 그 '하나님 가운데' 있게 되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어떻게요? 인간의 마음을 조종하셔서요. 그건 자유의지가 아니에요. 진정 자유로운 상태에 도달하는 것조차도 자유롭게 못 하니까요. 하나님께서 뽑아주는 사람만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고 나머지는 부자유란 말이죠. 자유의지 담론에서 보편타당하게 논의되는 자유의지란 누가 안 뽑아줘도 스스로 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의지라는 것이고요.
@user-ou7yt1hn3n
@user-ou7yt1hn3n 5 ай бұрын
​@@onlyjesushoony 자유 개념은 결코 모호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예정론이 논리필연적으로 함의하게 되는 결정론적 세계와는 절대 양립 불가능합니다. 논리를 초월해서 하여튼 예정론이어도 결정론이 아니고 하여튼 자유의지랑 가능하다는 식으로 비논리적으로 믿을 게 아니라면 말이죠. 그렇게 믿는 것도 존중은 합니다. 하지만 그건 논리는 아니에요. 비논리죠. 다시 말하지만 자유 개념은 결코 모호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모호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예정론과 양립이 가능할 정도로 모호하진 않습니다. 예정론과 양립불가능하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는 명확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유함"에서 말하는 자유는 엄밀히 말해서 자유라기보단 온전해짐 혹은 충만해짐 같은 개념이랑 가까워요. 예정론과 자유의지는 양립 불가능하다고 할 때 그 자유의지랑은 엄밀히 말해 다른 개념이란 겁니다. 이때 자유의지라 함은 대안가능성이 있어야 하고 인과론적으로 혹은 물리주의적으로 완전히 환원되진 않는 고유의 의사결정 능력을 뜻합니다. 예정론적으로 보면 인간에게는 사실 악을 선택할 자유행위조차 없는 겁니다. 모든 것은 결정돼 있고, 그러한 결정론적인 세계의 모든 결정론적인 사건들을 결정론적으로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니까요. 자유행위 주체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는 거죠. 악행조차도 말입니다. 따라서 살인자는 그 스스로 선택해서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살인을 하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 살인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무신론적 결정론보다 유신론적 결정론이 자유의지를 양립시키기에는 더 어렵습니다. 사실 소수지만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 가능하다는 분도 없진 않거든요. 그런 분들도 자유의지를 재정의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정말 많이 받습니다만, 유신론적 결정론은 창조자를 전제하기 때문에 정말 답도 없습니다. 그 창조자가 모든 사건과 모든 행위의 유일하게 유의미한 실제 주체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user-ou7yt1hn3n
@user-ou7yt1hn3n 5 ай бұрын
@@onlyjesushoony 그러니까 님이 말하는 그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고요. 하나님 안에서 자유함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 안에서 충만해짐 내지 온전해짐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걸 가지고 예정론과 자유의지를 양립 가능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죠. 그렇게 말한 적 없다고요? "예정은 곧 하나님안에서 자유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결국 그런 뜻이에요. 애초에 개념이라는 것은 인간의 로고스 기준에서 이뤄지는 의미 정립인 거고요. "하나님 안에서 자유함"이 아예 인간의 논리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아예 이해를 초월한 불가해였으면 몰라도. "충만해짐" 혹은 "온전해짐" 개념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의지 담론에서 논의되는 그런 엄밀한 자유와는 다른 겁니다. 그래서 특히 장로교에서 추종하는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조차 마니교와의 논쟁에서 결정론적 예정과 반대되는 자유의지를 옹호했던 거고요. 그 자유의지는 인간의 자유의사 결정능력이지 결코 하나님 안에서 자유함 같은 충만함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이 논의가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를 정확히 캐치하셔야 합니다. 이건 절대 그렇게 단순히 아 하나님 안에서 나는 자유로워~ 하는 영적인 신앙고백을 포괄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자유의지 담론과 맥을 같이 하는 논의란 것입니다. 이때 자유의지 개념은 그런 영적인 게 아니에요. 그래서 어느 정도 논리적으로 정립되었을 만큼은 충분히 모호하지 않다는 겁니다. "결코 모호하지 않습니다"에서 "결코"는 그런 의미의 수사로 사용했던 거고요. 그래서 그와 관련된 중요한 기준을 제가 제시해드렸던 거 아닙니까. "자유의지라 함은 대안가능성이 있어야 하고 인과론적으로 혹은 물리주의적으로 완전히 환원되진 않는 고유의 의사결정 능력을 뜻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런 인간의 "자유행위능력"과 관련해서 논쟁을 했던 거지 하나님 안에서는 영적으로 충만해지는 그런 어떤 "성스러운 상태"와 관련해서 논쟁을 했던 게 아닙니다. "예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가능한지 가능하지 않는지 제가 그런 얘길 했나요?"라고 하셨는데 "자유의지와 예정 둘 다 주셨다는 것이 깨달아 지는 것이지요"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애초에 그런 생각으로 글을 쓰시고 있는 거 뻔히 보이는데요 뭘. 그리고 "예정론이어도 결정론적이라는 비논리적인 얘길 한 적도 없구요?"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니까 예정론이어도 결정론이라는 게 아니라 예정론이면 논리필연적으로 결정론이라구요. 이때 자유의지를 하나님 안에서 충만해지는 어떤 거룩하고 성스러운 의지 정도로 이해를 하셨다면, 번지수 잘못 찾으셨습니다. 여기는 지금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곳이 아니에요. 아예 논의의 맥락 자체를 잘못 파악하신 겁니다. 이 밑으로는 답글 달지 않겠습니다. 너무 맥락을 못 따라오셔서 솔직히 더 대화를 나눌 필요성을 못 느끼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최소한의 이해 정도는 하고 있는데 말이죠.
@user-vm8fk7ll7z
@user-vm8fk7ll7z 5 ай бұрын
장로교 예정설 자칫하면 우리가 살아서 성화되어 가는 과정이 간과될수 있습니다 한번 구원받았으니 되었다 이것보다는 매일매일 회개와 구원의 은총과 다 함께 다려갈길을 가야되는것입니다
@user-eo9qo7ss6y
@user-eo9qo7ss6y 3 ай бұрын
장로교를 잘못 이해하고 계십니다. 장로교는 구원 받았음을 확신하면 주신 구원에 감사하여 매일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이 은혜 받은 자의 마땅한 도리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나, 살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구원 받지 않은 것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구원 주셨으니 방종하라고 어디에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당최 이런 논리는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히려 감리교쪽이 '자기 의'에만 충실한 삶을 살게 될까 걱정입니다. 인간의 의지를 강조할 수록 인간의 의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전적 은혜만을 외치지 않는 감리교의 신학이 결코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opencommunitychurch3481
@opencommunitychurch3481 Жыл бұрын
유익한 영상이네요^^ 예정론과 알미니안 주의를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어서 좋네요. 제가 경험한 바로는 칼빈주의자이지만 칼빈주의를 웨슬리안과 뒤섞어 말하면서 자기가 칼빈주의의 정석을 안다고 자부하시는 분이 계셨거든요. 지난번 양시무스님과 아델포스님과의 대결에서도 그렇고 이렇게 좀 더 명확히 알게 됨에 감사하네요. 두 분 다 수고하셨습니다.
@shlee3343
@shlee3343 9 ай бұрын
박재은 교수님 말씀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고 절대적인 주권자이신데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했던 인간이 무엇을 선택할수 있을까요? 인본주의적 사상에 물들고 미혹당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제대로 이해하고 배운다면 예정론이 얼마나 성경적인지 알것입니다
@ji6824
@ji6824 9 ай бұрын
토론 온라인 방송이 있었구나. 좋은 방송 기획입니다.
@user-ul4op8zl5t
@user-ul4op8zl5t Жыл бұрын
수준높은 자율주행으로 넓은 길로 갑니댜 슝
@user-qz7gm6od3s
@user-qz7gm6od3s 5 ай бұрын
박재은교수님 말씀을 재대로 설명해주시니 감사합니다. (99.999% 동의 합니다.)
@dolbyatmos5983
@dolbyatmos5983 Жыл бұрын
사실 현대 신학의 논의들에 대해 고려한다면, 박재은 교수님께서 예정의 교리에 대하여 이성과 논리의 영역 보다는 믿음의 영역, 즉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 놓는다는 부분이 어느 정도는 이해됩니다. 물론 신학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접하지 못한 분들의 경우에는 이것이 불편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깊이 나아가다 보면 특히 역사 속에서 이성과 합리성의 부분과 신비의 부분에 대하여 신학자들이 많은 고민을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말을 함에 있어서 이성과 논리를 내세우는 부분이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죠. 재밌는 것은 이것이 비단 예정론의 교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 교리들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겠네요. 저는 비록 개혁주의를 지향하지만, 신학적인 논의에 있어서 사색할 때에 유연할 필요가 있다고 여깁니다. 만약 각자가 자신의 교리를 이성적으로만 주장하고자 한다면 자칫 배타적이고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따름입니다. 이 경우 감리교와 장로교는 서로 합의점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기독교적인 아량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교리적 체계가 완벽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저는 오히려 중세나 종교개혁 시기의 논의들을 다시 불러내기 보다, 이성적으로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한 박재은 교수님의 주장이 더 끌리네요.
@user-ou7yt1hn3n
@user-ou7yt1hn3n 8 ай бұрын
말에 어폐가 있으신데요. 엄밀히 말해 예정 교리의 변론에서 쓰이는 신비란 '예정 교리는 맞지만! 논리적으로 따지면 말이 막히니까 하여튼 맞는 걸로 하자!'인 것이죠. 예정 교리와 상충되는 주장들은 그러한 신비와 불가지에도 불구하고 그냥 틀린 거고요.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있을 것 같으면 예정 교리 자체도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영역이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예정 교리를 부정하는 건 틀렸다고 판단가능하나, 예정 교리의 논리적 모순은 사실 모순이 아니고(그래서 결국 예정 교리는 참이 맞고) 그게 왜 모순이 아닌지만 판단 불가능하다는 식. 대단히 편협한 논변이죠.
@dolbyatmos5983
@dolbyatmos5983 7 ай бұрын
@@user-ou7yt1hn3n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특정 교리들은 신비의 영역, 그리고 신념의 영역에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 점에서 예정론의 불합리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예정론에 반대하는 교리를 합리적이라 받아들이는 것이나 모두 개인의 신념에 근거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독교의 교리들을 이성을 통해 사색할 수는 있다고 여기지만, 그것을 이성으로 증명 가능하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정말 그런 것인지 증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정론이 옳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것이 틀렸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지 틀린 것인지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제가 고려하는 증명은 과학적 실험이나 증거 수준을 갖는 경우를 말합니다. 저는 이런 방향의 증명이 기독교 교리에서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혹 가능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증명해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그러므로 저는 예정론을 참이라고 "믿습니다." 제 신념체계는 이성적으로 모순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제게 신비의 영역에 해당합니다.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저는 삼위일체도 그렇게 사색합니다. 동시에, 저는 과학적 사실들도 신념 체계에 속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과학 이론을 실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가설을 학습하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 역시 전문가의 설명과 그의 실험이나 증명의 목격과 관찰에 의존합니다. 저는 전문가의 견해를 신뢰하여 과학적 사실을 전부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스스로를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배타적인 분들이 저는 우려스럽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이 명확한 지식을 얻고 합리적으로 사고하여 유일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런 분들에게 제가 신비라고 말하며 믿는다고 여기는 것이 무지하고 비합리적으로 보이겠죠. 그러므로 이렇게 예정론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저 역시 조직신학의 교리들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념 체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user-ou7yt1hn3n
@user-ou7yt1hn3n 7 ай бұрын
​@@dolbyatmos5983 저 역시 개인적인 신념은 존중합니다.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논리적으로도 충분히 따질 수 있습니다. 정확히 하셔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모순은 맞지만 믿는 겁니다. 물론 그 모순은 인간의 인지한계로 따진 모순이기에 사실은 모순이 아닐 수도 있긴 해요.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로고스는 우리의 인지한계 내에서 산파술을 하며 진리에 다가가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게 '너 자신을 알라'인 거죠. 너는 무지한 존재니까 따지지 말라는 게 아니라. 같이 따져가며 무지에서 로고스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순적인 믿음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모순이라는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조차도 인간의 인지한계를 운운하며 사실은 신비랄 것 같으면 우리 세상에 모순이 아닌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게 실은 기독교에서 비판하는 상대주의적 태도랑 매한가지고요. 적어도 이런 시시비비를 가리는 토론장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신념 고백도 물론 할 수 있긴 하죠. 하지만 논리적으로 따져보자면, 그걸 모순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모순이 아니랄 것 같으면 그와 관련된 논리를 들고 나와서 논파해야지 로고스에 훨씬 부합하는 태도인 거지요. 그냥 아몰라 아무튼 아니야 라고 하는 게 아니라요. 아니면 언술을 확실히 하셔야 합니다. 모순을 부정할 만한 논리는 부재하지만 개인적으로 모순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뭐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사실상 논쟁 포기 선언이나 다름없지만 뭐 논쟁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개인적인 고백을 하려는 거면 상관없으니까요. 오히려 앞서 말했듯 존중받아 마땅하죠. 그런데 예정론이 옳냐 그르냐 논쟁하러 나와서 인간의 인지한계를 뛰어넘는 신비를 운운하며 모순을 옹호하다? 그건 논리적으로 그냥 논쟁 포기 선언이 맞습니다. (이 동영상 제목 보이십니까? 이 자리는 그런 자리입니다)
@dolbyatmos5983
@dolbyatmos5983 7 ай бұрын
@@user-ou7yt1hn3n 그렇군요. 이 논쟁이 무언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계신듯 하네요. 존중합니다. 저는 성서신학을 공부하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조직신학 영역은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실 성경이 말하는 바가 저런 교리들의 논리적 싸움과는 사뭇 다르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사함은 제 경험상 믿고 싶은 걸 믿습니다. 더욱이 인터넷 댓글로 사람의 생각을 바꾸기엔 어렵죠. 사실 저에게 그러실 것이 아니라 정 문제가 있다고 느끼신다면 위의 교수님께 직접 메일을 보내시는 등 해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user-ou7yt1hn3n
@user-ou7yt1hn3n 7 ай бұрын
​@@dolbyatmos5983 아니 뭐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통상적으로 이런 논쟁에서 어떤 태도를 지니는 게 바람직한가 뭐 그런 얘기죠. 서로의 이성을 비춰보며 산파술 하는 게 우리에게 허락된 로고스입니다. 상대와의 논리적 소통이 무지에서 벗어나 진리에 다가가는 길인 것이죠. 그게 변증적 방법론이고 논쟁을 하는 이유 아니겠습니까. 그냥 신앙고백하는 동영상에서 신비를 논하셨으면 저도 그러려니 했겠죠. 그런데 아니잖아요? 당연히 님의 댓글도 해당 영상의 논쟁적 성격을 연장적으로 해석해서 받아들인 거죠. 님께서는 그렇게 해당 영상의 논쟁적 맥락을 연장적으로 받아서 댓글 다실 생각 없었을 수도 있지만요. 그냥 한번 말해본 거다 라고 하실 수는 있고 정 그렇다면 저도 딱히 뭐 반론할 생각은 없는데 어쨌든 처음에는 그렇게 이해할 만도 했으니까요. 그게 논쟁적인 게시글에서는 자연스러운 맥락 해석이죠.
@noah88family
@noah88family 10 ай бұрын
인간이 하나님을 자가만의 이성과 지식으로 다 포함 할 수있다는것이 오히려 모순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예정의 영역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 하나님의 영역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 이시기에 우리의 자유의지를 해치지 않으면서 완전 하시다고 생각합니다
@shlee2032
@shlee2032 Жыл бұрын
다메섹-엠마오, 아델포스-양시무스 대결에 비하면 퀄리티가 떨어져도 너무 떨어진다. 한 사람은 근거 없이 오만하고, 한 사람은 말을 정돈을 못하고. 신학교 교수들이 얼마나 자기 울타리 안에서 고여가고 있는지 잘 보여준 토론인 것 같음.
@user-ik7rx5eg7r
@user-ik7rx5eg7r Жыл бұрын
뭐 교수라고 토론을 잘하는건 아니니깐 이해는되는데 좀 아쉽긴함
@frrddeed5
@frrddeed5 Жыл бұрын
@@user-us8bd1tx2o 그럼 니가 나가든가
@user-sg2fb3qc6q
@user-sg2fb3qc6q 9 ай бұрын
자칫 예정론이 결정론으로 들릴수 있겠지만 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하심과 작정하심의 역사는 우리가 측량할수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과 끝을 예비하시고 생각이 있으시구나 정도로 해석을 하려 합니다. 인간의 선택의 자유와 하나님 섭리의 조화가 아닐지요 성령님께 은혜와 궁휼을 갈구하며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user-bz7vi9lb1f
@user-bz7vi9lb1f 5 ай бұрын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타락하면 구원을 잃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구원상실의 경고 교리입니다. 위의 논증은 극히 치우친 칼빈주의적 접근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자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구속은 한번이지만 구원은 이루어가는 것입니다.(빌2:12) 미혹받지 마세요.
@typoon0
@typoon0 3 ай бұрын
제 견해는, 달리하는 것이 중생하고 성령의 내주안에서 강권적인 견인속에서 (자유 의지는 있지만) 순종과 죄에 대한 일깨우심,회개와 성숙(성화/~>구원의 완성) 속에서 거룩한 성품에 참예하고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며 스스로 자멸하듯 죄의 구렁텅이로 자꾸만 스스로 망치지 않으면,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가시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참고 )
@user-bz7vi9lb1f
@user-bz7vi9lb1f 3 ай бұрын
@@typoon0 그 견해를 모두 부정한다기 보다는 성령께 계속 의도적으로 불순종하여 스스로를 망친다면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pyonjb
@pyonjb 3 ай бұрын
타락의 정의를 내려보세요
@user-bz7vi9lb1f
@user-bz7vi9lb1f 3 ай бұрын
@@pyonjb 여기서의 타락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름 때문에 닥치는 죽음과 핍박이 두려워 그리스도를 의도적으로 배교함을 포함하여 성령께 의도적으로 불순종하고 회개를 거부하고 반복적으로 죄악을 지음과 마귀와 죄로 오염된 세상을 추구함을 돌이키지 않는 것이지요.
@user-bk3lp2tz6o
@user-bk3lp2tz6o Жыл бұрын
2)알미니안 주의 알미니안주의는 칼빈주의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좀 더 강조합니다. 1610년에 우이텐보게르가 칼빈주의의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 발표한 5개 조항의 항변론입니다. Natural Inablity -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자연적 무능력 Conditional Election - 예지에 기초한 조건적 선택 Universal Atonement - 인간의 개인적 믿음에 의해 제한되는 보편적 속죄공로 Prevenient Grace - 선행적 은총 Conditional Perseverence - 조건적 견인 알미니안 주의 또한 인간이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므로 누가 믿음을 선택할지, 거절할지도 미리 알고 계십니다. 구원 받을 사람과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을 결정(예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시는 것입니다. 구원과 멸망은 하나님의 택정(예정)으로 된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권(자유의지)을 어떻게 사용했느냐로 결정짓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택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이 은혜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할 수 있으며, 구원받지 못하는 책임을 인간에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알미니안 주의는 인간의 선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현재의 구원을 확신할 수는 있지만, 미래 어느 시점에서 내가 믿음을 버릴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어 미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 시점에서 예수 안에 머무는 삶을 강조합니다. 현재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있다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믿음을 언젠가 버린다면 받은 구원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는 다릅니다. 이미 택정받은 사람은 넘어질 수 있지만 구원 받은 사람은 미래에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적 은혜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죠. 인간의 자유의지가 거부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3)웨슬리안 주의 웨슬리주의는 웨슬리 본인이 말한 것과 같이 알미니안주의에 속해 칼빈주의를 비판하고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칼빈주의와 같이 알미니안주의를 비판하며 그 가운데 균형을 찾아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웨슬레주의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외적 부르심 즉 은혜의 말씀으로 부르시고, 내적 부르심 즉 성령으로써 말씀을 적용하도록 부르십니다. 이 두가지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믿습니다. 웨슬리는 자유의지로 믿음을 만들 수 없다고 하는데서 이단으로 정죄된 펠라기우스와는 다릅니다. 또한 하나님은 항상 기다리고 계시고 인간이 어느 때나 선택할 수 있다고 하는 알미니안 주의와는 다르게,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믿음을 발생시킨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주권적인 행동이지만, 인간은 자유의지로 거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칼빈주의와도 다릅니다. 웨슬리주의는 알미니안주의의 도덕적 행위들을 지키면서도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는 ‘이신칭의’의 원리를 지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인간은 선을 선택 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했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심으로 우리의 ’자유의지’가 선을 선택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자유의지’ 조차도 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죠. 성경은 하나님의 예지속에 예정된 대표적인 2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예지하심을 통해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구원 방법’을 예정하셨습니다. 개인의 구원을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아실(예지) 뿐입니다. 그분의 아심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훼방하는 것이 아닌 존중한 결과입니다. 미리 안다고 해서 어차피 멸망당할 사람 그들을 위해 은총을 베풀 필요가 있나?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이 그것을 용납 못합니다. 그분의 전지하심이 그분의 사랑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죠. 둘째는 하나님은 예지하심을 통해 개인의 사역을 예정하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개인의 자유의지가 말살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성향과 성품 그들의 선택을 내다보시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개인과 민족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노아의 3명의 아들이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을 예언하고 야곱과 에서가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을 예언하며 야곱이 12아들을 축도하면서 예언합니다. 예레미야도 그가 무엇을 할 것을 택정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역적 예언은 개인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성품과 성향을 아시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노아는 하니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아 세 아들의 미래를 예언합니다(창 9:25-27). 함에게는 저주를 선포합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창 9:25) 예정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끝을 맺죠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예정하심에 대한 성경절입니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행 3:20) 엡 1:4,5절을 자칫 개인의 구원을 예정한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 ‘우리를 예정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이 되게 하셨다’ 여기에 핵심은 예정된 구원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택함을 입은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정된 구원의 방법에 참여하는 자는 택함을 입은 자고 예정에 속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구원을 예정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정된 구원의 계획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택한자, 예정된 자로 받아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롬 9:10-14은 개인의 구원에 대한 예정이 아니고 하나님의 예지 속에서 그들의 사역을 예정한 것입니다.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ㄷ)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ㄹ)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보시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질문해 주세요~^^
@mtj1021
@mtj1021 Жыл бұрын
토론 이해에 도움되는 댓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user-dt2uw6ez2w
@user-dt2uw6ez2w Жыл бұрын
저와 신학적 노선이 같군요 첨이네요 이런분~^^
@user-bk3lp2tz6o
@user-bk3lp2tz6o Жыл бұрын
@@user-dt2uw6ez2w 종종 글 올리겠습니다. ㅎㅎ
@user-tu3hs5xd8u
@user-tu3hs5xd8u Жыл бұрын
미리 아셨다는 것은 이미 결과는 정해져있다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다를수 있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결국 자신이 어떻게 될지 정해져있다는 점에서 예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주심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인데 그것을 인간의 자유의지로 막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너무나 훼손하는 것 아닐까요?
@user-tu3hs5xd8u
@user-tu3hs5xd8u Жыл бұрын
예지예정은 모두를 구원해야지만 하나님은 선한분이라는 인본주의적인 생각에서 그것을 피해가기 위해 만들어진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결정한게 아니라 하나님은 다 구원하려고했는데 너네가 거부해서 어쩔수 없었던거야. 하나님한테 뭐라고 하지마라고 들립니다. 세상의 모든죄를 짊어지고 간 어린양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인간의 거절에 의해 전혀 값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ejflutestudio
@ejflutestudio 3 ай бұрын
예정은 우리 믿는 자들에겐 참 평안이자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절대주권을 바라보게 됨으로 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게 되는 은혜로 받는 영역입니다. 인간의 언어란 한계가 있기에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담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신학은 신으로 부터 시작하여 다시 신을 바라보고 경외하는 것으로, 인간의 감정이나 인간의 의, 공로 등이 석여버리면 그 본질이 훼손됩니다. 박재은 교수님 강의 평소에도 즐겨 듣고 저도 바빙크 참 좋아하는데요. 한가지 좀 아쉬운 부분은 유기를 ‘지나치다, 간과하다’ 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훼손하고 전능성을 약화시키는 표현 같아 다소 아쉽습니다. ‘사랑’이라는 기준도 하나님 자체가 최고선이시기에, 우리 인간의 감정으로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면 인본주의적 사랑으로 훼손되게 됩니다. 인간의 감정으로 토론하는 장소로 변질되지 않기를, 변질된 현대신학, 민중신학등 이상한 신학들이 범람해가는 이 시대에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으로 신학의 순수성을 잘 지켜내주시기를 기도하며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ahava97
@ahava97 Ай бұрын
저는 이중예정을 따르지 않지만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셔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누구는 거부하고 누구는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yjinkim318
@yjinkim318 Жыл бұрын
박재은교수의 생각을 지지합니다. 예수님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 곧 예정대로 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말씀이죠. 천국이 영원하다면 시작이나 중단이나 변경이나 끝이 없다는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예정으로부터 완성된 뜻이 이 세상에 시공으로 펼쳐 보이신다는 뜻이며 당연히 우주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의 주권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좌지우지 할수있다는 선악과적 죄를 범하는것이 자유의지로가는것이라 생각합니다.
@obayesian
@obayesian Жыл бұрын
과학이 결정론적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말은 잘못된 주장임 설령 그럴지라도 과학이 결정론적이므로 종교는 자유의지를 주장해야 한다는 것도 개연성 없는 주장임 장교수님의 경우, 과학 혹은 인간의 인식 체계가 창조와 우주를 절대 규명할 수 없다는 것인데 (마치 천주교 신부들과 같죠) 예정론 만큼은 인간의 인식으로 규명하려는 이중적 관점을 갖고 있음
@mjk7686
@mjk7686 Жыл бұрын
신앙의 관점이면 모든게 답이 된다 반대로 말하면 그러면 토론할 필요도 없다. 신앙 조차도 역사적으로 변해가는데 한발짝의 한걸음도 나아갈수 없다 교수보단 부흥사가 어울릴듯 이 토론을 통해 왜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줄어드는지 알듯합이다
@singsta_yh
@singsta_yh Жыл бұрын
선한 행동은 (예: 물을마신다)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고 예정론에 부합한 행동인데 악한 행동은 (예: 폭행, 살인) 내가 선택했기에 내가 책임을 진다????? 이게 맞는건가요??? 제가 이해를 잘 못 한건가요???????
@user-ou7yt1hn3n
@user-ou7yt1hn3n Жыл бұрын
이게 예정론의 가장 큰 약점이긴 하죠. 하여튼 맞다. 맞으니까 맞다. 그게 하나님의 신묘한 이치다. 인간의 이해로는 다 이해할 수가 없다(그런 식으로 따지면 예정론이 틀렸다는 주장의 근거로도 똑같이 써먹을 수 있지만 이것도 눈가리고 아웅하면서 방어함). 그래도 하여튼 하나님은 선하시고 하여튼 공의롭다. 아몰랑 하여튼 인간 책임이다 뭐 이런 수준으로 변론하지요.
@user-vu7li3yw7b
@user-vu7li3yw7b Жыл бұрын
칼빈이 100%옳은것은 아닙니다
@gogomankim
@gogomankim Жыл бұрын
예정론은 약점이 많은 교리이긴 하지만 왠지 예정론이 맞을거 같다
@user-tz2lv7qf8h
@user-tz2lv7qf8h 5 ай бұрын
예정론의 가장 큰 약점은 그래서 나는 뭘 하면되지? 이게 제일큰 약점인듯
@user-eo9qo7ss6y
@user-eo9qo7ss6y 3 ай бұрын
예정론은 사람의 모든 것을 창조 전에 미리 아시고 정해놓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4-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행동을 이미 영원 전부터 알고 계신다고 생각해야 옳습니다. 오늘 내가 일하던 중 길거리에 있는 쓰레기를 줍는 행동도, 또는 퇴근 후 집에 와서 부모님이나, 배우자에게 화를 내는 행동도 이미 영원 전부터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악한 일을 아셨다고 해서 악한 신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악한 행동을 할 것을 아셨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악한 행동을 눈감아 주셨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런 논리면 예수님을 보내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기준에서 예정하신 건데?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알미니안주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은혜를 입고 스스로 구원을 쟁취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신 거야. 그러므로 구원은 신인협동적이야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칼빈주의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은혜를 택할 수 있는 선함도 선행을 할 수 있는 선함도 아무 것도 없는 존재야.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이루시는 은혜야라고 말합니다. 즉, 예정론에 의하면 예정의 기준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있습니다. (엡 1:5) 우리는 판단 기준을 모릅니다. 성경도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알미니안주의도 이 부분에 대해서 입을 다뭅니다. 그래서 영상에 나온 박재은 교수님이 이 부분을 계속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모른다.' '인간의 논리와 인간의 지식 위에 있는 하나님의 그 높으심과 그의 거룩하신 선택을 믿을 뿐이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이유는 인간의 악한 행동에 대한 최종적인 처벌의 의미입니다. 우리 대신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즉, 악한 행동을 할 것을 미리 아셨고, 모든 인류가 그 미련함으로 멸망의 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을 아셨지만, 인간을 만드셨고, 영원 전에 구원받을 자들을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고(엡 1:5), 예수님을 대신 처벌하사 인간들을 구원하시고 그의 무한하신 긍휼을 나타내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이 댓글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다는 것을 마치 죄에 동조하신다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동조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안다는 것이 악한 게 아닙니다. 심지어는 오늘 신약 교회의 일원인 우리 역시 하루하루 자범죄를 지을 것도 미리 아셨습니다. 누구나 그렇죠. 오늘도 우리는 살아가며 거짓말도 하고, 형제에게 친구에게 가족에게 내 분을 이기지 못하기도 하고, 힘든 이웃을 보살피지 못하기도 하고, 베풀지 못하기도 하고, 나랑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나만큼 사랑하며 살지 못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박해와 미움이 무서워 예수님을 온전히 드러내는 순교적 삶을 살지도 않습니다. 매일 내 삶을 불태우며 전도해도 모자란 그런 죄인들인데 전도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은혜를 받았다 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더군다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떨까요. 인간의 죄는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했다 말씀하실 정도이셨습니다. 인간의 죄는 결국 자기가 죽음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모든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박재은 교수님이 이 부분을 잘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받을 책임을 자기의 책임으로 돌리십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인간의 죄를 위한 대속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사 무한한 사랑과 긍휼을 베푸셨고 세세 무궁토록,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영원히 찬양받으시기 위해 영원 전부터 이런 일들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user-gx7tm4uq8w
@user-gx7tm4uq8w Жыл бұрын
예정을 선택 즉 구속사적으로 접근해야지 모든걸 다 예정하였다로 접근하면 오류가남
@user-fe3nf9zl7d
@user-fe3nf9zl7d 7 ай бұрын
예정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 우리 토론의영역은 상대적인 면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supermilal
@supermilal 6 ай бұрын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속성 안에서 만이 이해되고 알 수 ㅇㅆ지요..
@noah88family
@noah88family 10 ай бұрын
이중예정론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종교와 기독교가 섞여서 나타나는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의 행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셨으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것,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것이 전부이다 라며 태도로 현실을 살지 못하는 경우...." 이를테면, 질병이 있으면 기도하면되고 문제가 생기면 기도원에가서 기도해야한다...등등 하나님의 완전하신 섭리가 작동하는 이 세상에 우리에게 오늘 하루를 주셨고 나에게주신 직업, 가족, 친구, 사회 모든것이 의미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삶을 살아가는데 최선을 다 해야 한다! 결코 이중예정론이 자유의지를 약화시키는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예정을 믿고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걸 안다면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 이심을 고백한다면...그분이 주신 우리의 일분일초가 얼마나 귀한것입니까? 진정으로 믿는자는 결코 하루를 헛되게 보내지 않을것입니다... 삶으로 싸워 나갈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부활한 성도로 예수와 연합한 삶을 살아내는 진정한 예배입니다.
@user-wt9kz5ju5t
@user-wt9kz5ju5t Жыл бұрын
내 가 하나님과 가까워 질수 있다면 예정론도 맞습니다 주님은 내가 그와 연합하길 원하십니다
@tilltheend475
@tilltheend475 3 ай бұрын
이런게 궤변이죠
@lexicalgreek
@lexicalgreek 10 ай бұрын
장로회 측에서는 예정론을 논하는게 시간 낭비다.. 라고 볼 수 있을것 같네요
@user-bc6pz1jv9s
@user-bc6pz1jv9s Жыл бұрын
예정론은 잘못이 없다 예정을 계시와 엮는순간 본인은 스스로 예수가 되며 사이비가 된다. 그렇기에 예정은 신학이론으로 존재 해야지 강단에 들고 올라가면 안된다.
@kimdongnam
@kimdongnam 10 ай бұрын
신학. theologia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학문인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학문인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학문을 인류학이라고 칭하는 것은 우선 개인의 편리에 의한 것 같고요. 유기가 아니라 간과다라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프레임 씌우기가 될 수 있지만, 적어도 유기든 간과든 지나치심이든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창세부터 정한 구원받을 사람들의 여집합이라는 의미에서 조금도 변함이 없죠. 이중 예정론은 신정론과 맞닿아 있습니다. 신정론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물음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에게 변호하려면 당연히 인간의 논리와 언어로 설득해야죠. 신앙과 고백, 아멘과 할렐루야는 설교단의 언어일 수는 있어도 세속의 토론의 언어는 아닙니다. 설령 예정론에 의심을 품은 반론자들의 입장을 다 이해하고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세속의 눈높이에 맞추지 않는 것은 신학이 갖고 있는 하나의 오만이 아닐까요. 그렇게 계속 가도 카르텔은 곤고하기난 할테니까요. 교회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 사이에서 예정론이라는, 어쩌면 신학적 담론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를 교리에 신앙고백으로 화답하는 신자들은 줄 지 않을 테니까요. 예정론을 믿지 않는 신자들에게 성실히 변증할 필요도, 세속의 논리의 언어로 답할 필요도,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전능할 뿐 아니라 전지하시고, 전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에 악을 좀재하게 했는가. 어떻게 구원받지 못할 자녀를 정해 두었는가. 하는 질문은 비신앙적인 질문일까요. 이 질문은 신비의 영역이란 답으로밖에 설명될 수 없을까요, 정말. 어쩌면 아직 인간의 신학적 수준이, 인간의 언어가 도달하지 못해 그것의 진리 여부가 증명되지 못하다고 말하면 하나님의 무오성이 훼손될까요.
@songchoe5546
@songchoe5546 9 ай бұрын
인간의 첫-출발지 에덴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나무와 선악나무 설명의 말씀대로 살았다면 지금 우리는 영생을 얻었을것이다. 그러나 첫사람 아담부부 자유의지 선택에의해 우린 지옥에 갇혀버렸고 그들 후손들이 이곳서 첫사람이 실패한 자유의지를 들먹이고 있구나.😊
@dongmugil9410
@dongmugil9410 7 ай бұрын
아닙니다.. 아담은 애시당초 그 말씀을 지킬 만한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아담의 실수는 하나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 그런 능력도 힘도 없는게 인간 자체임.. 타락과 관계없음... 유일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거룩한 존재임...
@user-vm8fk7ll7z
@user-vm8fk7ll7z 5 ай бұрын
장재호 교수님 말씀이 맞아요 구원은 천국 갈때까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루어 가는것이지요 그러고나서 하나님이 주시니 값없는 은혜를 받는것입니다
@oc0606
@oc0606 4 ай бұрын
에베소서 1:4-5 보시길 우리 죄인된 인간은 인간 노력으로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수없습니다ㆍ 내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어 갈수없는 존재이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에 내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성령의 열매ㆍ그리고 성화되는 것입니다ㆍ 우리 인간에게는 선한게 하나도 없습니다ㆍ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매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하며 오직 예수그리스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음이니 우리는 자랑할것도 말것도 없음 이성적 논리적 표현보다는 믿음의 영역인것 같습니다ㆍ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ㆍ그래서 오늘도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ㆍ
@kimsh1714
@kimsh1714 10 ай бұрын
구원은 사람이 자유의지에 의해 하나님을 선택하고, 또 중간에 떠나서 구원에서 끊길 수도 있다는 것이 알미니안의 주된 의견인거죠? 저는 일단 예정론에 가까운 생각을 하는 사람인데요. 하나님은 세상을 시작 하실 때부터 생각을 가지고 시작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리해보시고 그 다음엔 잘못된 걸 고치시고 새로운 방법도 시도해보시는 방식이 아니라(얘가 믿음을 잘 유지해 가나 지켜보시고 방법을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시작 하실 때부터 목적과 결과를 계획하시고 그것을 끝까지 이루시는 성실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정론을 이야기할 때 결정론과 헷깔릴 수도 있습니다. 결정론은 우리의 역할이 아무 것도 없이 이미 결정된대로 고정된 것인데, 예정론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시는 동안 우리가 반응하는 역할을 허락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반응이 선택의자유(자유의지)겠지요. 또 자유의지를 논할 수 있는데 선택받지 못한 사람은 안타갑지만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의지가 하나님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거나 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하나님을 선택할 생각자체가 없죠(전적인 타락). 반면 선택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할 선택도 하고 또 때론 싫어하시는 죄를 짓기도하고.. 그러다가 회개하구 다시 돌아오고 하지요... 로마서8장에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우리를(선택받은 자) 죽기까지 사랑하시기에 이땅에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닐까요? 사람의 선택으로 구원받고 또 끊어지는 거라면 죽기직전에 회개하고 죽어야 천국가겠네요.. 그리고 그런식으로 천국에 갈 수 있고 없고가 정해지는 거라면 예수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의 그 크신 은혜가 우리와 상관이 있을까요? 구원은 값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시지 우리의 선택이나 의지가 아닙니다. 아담을 생각해볼까요? 아담이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걸(선악과 사건)했다고 지옥 보내셨나요? 바로 죽이시지도 않으셨지만 이미 구원하시기로 선택한 자였기에 이끄셔서 구원하시잖아요... 한번 구원받아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끝까지 이끄실 거라 믿습니다. 내 아들이 아빠 아들 하기 싫어~ 라고 한다고 부자관계가 지워지지 않듯이요. 그게 사랑이겠구요.
@before_idisappear8776
@before_idisappear8776 Жыл бұрын
전 신학 1도 모르긴 하지만 간과라는 단어는 조금 적절하진 않은 거 같아요 교수님이 표현하시고자 하는 내용에 적절한 것 같지는 않아요
@user-bm6mt1ur8z
@user-bm6mt1ur8z 6 ай бұрын
성경의 문맥적 예정의 본래적 의미는 자유의지와의 대립각이 아닌 오히려 상보적 작용으로 말미암아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을 서로 세워주는 정체성에 있습니다
@wcdc2024
@wcdc2024 8 ай бұрын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 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디모데후서2:12-13) 논증하신대로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영원하시지만, 인간은 늘 변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구원의 약속은 영원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불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변함없이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월절과 홍해 도해를 통해 구원하셨지만, 그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구원을 유지하지 못하고, 신실하지 못함으로 광야에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slmjang56
@slmjang56 4 ай бұрын
하나님의 전능성의 전제를 잘못된 것으로 가지 않아야 하는 논리성과도 맞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의 이 땅의 삶은 나그네입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 인생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도록,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배우는 학교로 허락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때론 우리가 생각하는 그 잘못된 길로 가는 것도 막지 않으시고 허용하시고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성숙해 나가는 것이지요.
@user-po3sv3gj1r
@user-po3sv3gj1r Жыл бұрын
이중예정은 닫힌 종말에서 파생되는 질문일듯. 종말이 열려있다면, 예정의 덫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수 있다. 사변적 종말로부터 시작된, 사변적 예정에 대한, 논리적 접근은 없는가??
@user-lr5bj7qe8c
@user-lr5bj7qe8c 11 ай бұрын
인간의 자유의지의 속성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과 그 속성에 좌우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전적으로 선했습니다. 인간은 사탄의 유혹으로 이 형상을 스스로 부인하고 선악과를 먹으면서 파괴됨으로, 원래의 성결한 자유의지가 아닌 파손되어 오염된 자유의지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오해한 자유의지의 관념을 가지고는 바른 신학을 하기가 서로 곤란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정론의 1차적 근거가 되는 요절인 엡1:4,5절은 하나님의 소유하신 선하신 의지와 성품을 전제한 것임을 공감할 때 큰 오해와 의견 상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과 최대의 은총과 최선의 뜻을 전제한 예정론이 아니면 결국은 인간의 오염된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그릇된 명철(이해)에 근거한 지혜놀음에 그치게 되겠지요.
@dongmugil9410
@dongmugil9410 7 ай бұрын
파손되고 오염되기 전 즉 아담이 죄를 짓기전 자유의지는 하나님 말씀을 준수할 힘이 있다고 ? 원래부터 그런 힘도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게 인간의 자유의지임..
@user-lr5bj7qe8c
@user-lr5bj7qe8c 7 ай бұрын
@@dongmugil9410 아, '임의로' 의지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의지고 선악과 먹지 말라시기 전에 먼저 먹으라는 명령에 순종하게 되는 의지임. 단지 마귀가 가로챘을 뿐.^^ 하나님보다 지혜로우심 곤란하시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이미 그리스도로 지음받은 존재(고후4:4, 골1:15 참조). 선악과 금령은 이것을 보호하는 안전장치. 마귀는 이것을 이용해 가로챈 것.
@ChristIsMyKingAndImHisServant
@ChristIsMyKingAndImHisServant 2 ай бұрын
물론 예정론에도 정도가 있지만 칼빈주의식 예정론은 특히 sola scriptura 와 tota scriptura 안에서 열린신론을 반박 할 수 없다고 보여집니다. Chris Fisher와 Matt Slick의 토론을 보면 예정론이 완전히 무너지더군요. 예정론이 성경적이라 하지만 원어의 문맥, 통사론, 문법을 고려하면 오히려 비성경적이고 성경의 구절들을 일부씩 따로 떼어 이해하고 논리를 추가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junyoungpark9356
@junyoungpark9356 Жыл бұрын
지금 터키 상황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알고 있으셨고 예정 하신건가요..?
@romin1208
@romin1208 11 ай бұрын
그러시겠죠.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면 예정론은 설명이 어렵죠. 노아의방주때.. 노아네 식구 빼고 다 쓸어버리심.. 진짜 비인간적인..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선함 입니다. 인간의 도덕이 선이 아닙니다.
@user-rn8lj2mu6r
@user-rn8lj2mu6r Жыл бұрын
의미있는 토론입니다.
@user-rk3pe4cs1k
@user-rk3pe4cs1k 6 ай бұрын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에서 이것은 무엇일까요? 구원인데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기 때문에 구원도 되고 믿음도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은 구원뿐만 아니라 믿음도 선물입니다. 즉 믿음이 우리가 믿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게 해주신 것입니다. 믿음은 믿어지는 것이지 믿어야겠다 선택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자만이 믿어서 구원을 받게 되니 하나님의 선물(거저 주는 것)이고 은혜입니다. 내가 믿어서 구원받았어라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자기 선택이라면 자랑할 수 있겠죠. 믿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데 절대 믿음을 하나님이 주신 후에 빼앗아가지는 않죠. 요10:27-28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양으로 선택된 자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믿어집니다). 그렇게 믿음을 주셔서 영생을 준 자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예수님은 주신 믿음을 빼앗지 않고 믿음을 빼앗을 수 있는 어떤 세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나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엡1:5-6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지옥에서 왜 하나님은 나를 선택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 하겠지만 하나님의 의와 우리의 의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공의롭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항상 의롭습니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렇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창조자요 주님이시요. 초월자요 주권자이시기 때문일 것입니다.(토기장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상상 그 이상의 이상의 이상의 초월적인 분이십니다. 우리의 의에 대한 논리를 초월하십니다.
@tenorgizer
@tenorgizer 6 ай бұрын
그럼 선택받지 않은 자 중에서 지옥에 대한 무서움으로 인해 하나님을 믿고싶어 하는 사람은 결국 지옥에 가는 건가요?
@user-rk3pe4cs1k
@user-rk3pe4cs1k 6 ай бұрын
@@tenorgizer 지옥에 대한 무서움(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도 사실 기적입니다, 성령의 역사일 수 있습니다)도 그것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고 싶어져서 믿음이 생긴다면 천국에 가죠... 믿고 싶어져도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지옥에 가겠죠. 그런데 믿고 싶어진다는 자체가 믿음에 거의 다가와 있다고 생각은 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택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게 종교개혁으로 기독교가 탄생한 절대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이 예정론입니다. 예정론이라고 해서 논이라는 표현을 써서 확정되지 않은 논리같이 이야기하는게 사실 저는 싫습니다. 예정이 된 것이 너무 확실하게 말씀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믿게 됩니다). 마13:10-15절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비유로 말씀하셔서 제자들이 잘 알아듣도록 하시기도 하지만 비유로 말씀하셔서 택함받지 못한 자들은 천국의 비밀을 알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도록 깨닫지 못하도록...(신천지는 이것을 자기들 비유를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마태복음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가 믿음의 고백을 한 것은 하나님이 알게 해주시는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36:3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보고도 믿지 않는자는 성부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자가 아닙니다. 성부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예수님께 주시고 주신 자를 예수님은 내쫓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께 주신 자만이 예수님을 믿고 믿는 자는 예수님이 다시 내쳐서 믿음을 배반하도록 허락지 않습니다. 알미니안들은 에베소서1장의 택하는 것이 개인이 아니라 단체(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말이다고 호도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정을 부정하고자 그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이 말씀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도 많았지만 믿지 않는 자도 많았기에 이런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들 중에도 택함받는 자가 있고 불택자가 있다는 뜻입니다.(에베소서1장의 택함이 개인이라는 뜻입니다). 엡1: 5-6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거저 주시니 은혜입니다. 거저 준다는 표현이 은혜를 잘 표현한 말입니다. 자기의 결정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알미니안은 마지막 결정은 자기가 합니다)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결국 결정하는 자기 의를 드러내기에 은혜가 될 수 없고 자랑이 됩니다. 하나님은 거저 주심으로 우리가 그 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십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저 단순이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지금 시대에도 한번 아들은 아무리 망나니라도 영원히 아들입니다. 아들의 특권을 주었다가 뺏는 분이 아닙니다. 아들의 은혜는 영원히 아들입니다. 고전2:4-5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지혜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할때도 성령을 의지해서 해야 합니다. 내가 이해되어서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user-rk3pe4cs1k
@user-rk3pe4cs1k 6 ай бұрын
삼하7:14-16절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은 다윗과 솔로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아들로 삼아 주십니다. 사울은 그 주었던 은총을 빼앗아 버리지만 다윗과 솔로몬은 사울보다 더한 죄를 지었는데도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시지만 그 은총을 빼앗지 않으시고 그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십니다. 결국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나라로 영원히 서는 것을 예언한 말이기는 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이 그래서 은혜입니다. 택함받지 못한 자는 불공평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죄로 인해 홍수로 죽어갔습니다. 단 노아의 식구들만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불공평합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의롭다고 하시며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며 절대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노아를 택했고, 노아의 후손 중에 특별히 아브라함을 택했고,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택했고,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했고(태어나기도 전에),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유다지파를 택했고 예수님 이후로는 전세계에 택한자들이 있습니다.
@user-eo9qo7ss6y
@user-eo9qo7ss6y 3 ай бұрын
귀한 말씀과 요약입니다. 이 분 말씀에 100% 동의합니다. 많은 분들이 예정론을 말씀하시면서도 복음서에 있는 택정함의 구절에 대해선 말씀하시지 않는 분들이 너무 많아 정말 너무 아쉽게 생각하였고 그래서 저는 예정 교리를 설명할 때 복음서의 말씀을 자주 인용하는데 이 부분을 너무 잘 말씀해주셔서 통쾌합니다. 특히, 택정함에 관한 말씀은 요한복음에도 잘 나타나 있어 저도 몇 구절 첨부해보겠습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 믿음은 마치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의 주체적으로 일어나는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이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어야만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난(태어나다, born) 자가 아니면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가만히 읽어보시면 이런 뉘앙스가 굉장히 많습니다. 인간에게 믿을 것도 말씀하시지만, 그 이전부터 택함받은 사람들, 곧 하나님께 난 자들만이 이런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것도 가르칩니다.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기본적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신자는 '아버지께서 주신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명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입니다. 성부께서 성자께 택자들을 보내시고, 성자는 택자 자신의 구원의 사역과 자신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을 통해 부활을 완성하십니다. 이것이 삼위 하나님의 사역의 흐름입니다. 가끔 유기라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을 주장하려면 요 6:39에 따라 반드시 예수님이 실패하셔야 할 것이라는 말씀도 덧붙여야 합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께서 반드시 실패한다고 말하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상식 밖의 인본주의적인 생각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 인간의 입장에선 마치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 안에서 구원과 유기가 결정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분부분은 맞을 수 있어도 전체 성경적으로는 전혀 맞지 않는 해석입니다. 이런 점은 성경의 언어에서 가장 잘 확인이 됩니다. 성경언어의 특징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했다 하더라도, 그 모든 원인과 책임자는 하나님이시라고 표현하는 것에 있습니다. 잠언 말씀도 이런 부분을 잘 보여줍니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또 모세이야기도 이런 점을 잘 보여줍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는데, 구약언어에선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출애굽기 10:27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 보내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로를 자유의지가 없는 로봇으로 만드신 걸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바로는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했습니다. 그 자신에, 그 자신의 자유의지에 매우 충실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보내기 싫었던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와중에도 모든 원인이 본인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출 10:27) 이것을 신약교회와 그 구성원인 성도에게 적용하면 마찬가지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행함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전적 은혜요, 전적인 선물입니다. 예정교리는 이런 성경적 언어에 가장 충실한 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의 근원이시요, 이유이시요, 시작이시요, 마침이십니다. 그 분이 처음부터 계획하셨고, 그 분이 마무리 하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user-gq6dt2lr3d
@user-gq6dt2lr3d Жыл бұрын
박재은교수님은 잘모르는 분이지만 조금 실망입니다. 왜냐하면 교수이기에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서 설득을 해나가는 것이 필요한데 "신앙의 영역"으로 "나는 믿습니다"라고 하면 대화나, 토론이나, 설명이나, 설득이나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적어도 신학교 교수님이시기에 요구하는 부분이 있어서 장재호교수님이 분명히 답변하기도 어려운 것을 알면서도 서로 다름에 대한 큰 기준점이 되는 "예정론"을 굳이 "배우기 위해서"라고 질문을 하였는데 박재은 교수님은 너무 무책임한 대답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결과는 더 참담하네요. 인기투표도 아니고...
@user-bk9iq6ns2t
@user-bk9iq6ns2t Жыл бұрын
복면가왕처럼 이력과 모습을 감추고 진행하고 후에 밝혀주셔도 좋겠다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인기투표” 분위기가 없지 않아서였습니다. 전 풀로 다 봤는데 주제마다 두분이 장단점도 보여주셨던 것 같고 교수님들 답게 듣기도 다 좋았던것 같은데 댓글, 대화창 분위기에는 “교세”가 보였던것 같은 느낌은 저도 있었어요.
@user-gq6dt2lr3d
@user-gq6dt2lr3d Жыл бұрын
@@user-bk9iq6ns2t 좋은생각인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대화"와 "토론"에 미숙한부분들이 있고, 더 나아가 기독교안에서 "토론"이 어려운 부분이 교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삼아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영상을 보다 화가난 부분이 이 부분 때문입니다. 그냥 일반목사님이시면 "그럴수있지"라는 여지를 둘수 있지만 서로다름을 두고 토론하는 장에서 시작부터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 신앙의 영역"이라 하면서 철벽을 치고 "이거까면 믿음이 없는 것이야, 신앙이 없는 것이야"(물론 이렇게 까지는 하지 않으셨지만)라는 것으로 시작을 하면 토론이 되겠습니까? 이거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입니다.
@user-bk9iq6ns2t
@user-bk9iq6ns2t Жыл бұрын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분에서 불편했던것도 같습니다ㅋㅋㅋ전 출연자를 응원하는 듯한 “역시 00의 아들“ “역시 00은 이래야지!” 라는 늬앙스의 응원들이 좀 그랬거든요. 보다보니 실제로 교세의 크기가 댓글 쪽에도 반영되눈 둣한 느낌이 ㅋㅋ근데 교수님들 하실때는 그래보였는데 그 뒤에 있던 출연자들의 번외토론에소는 또 교세랑 상관 없는 투표결과가 나오더라구요ㅋㅋ
@user-bk9iq6ns2t
@user-bk9iq6ns2t Жыл бұрын
그래서 자꾸 아쉬운게 맞는말 같은데 교단이나 사람에 대한 호감도 때문에 제가 편견울 갖고 화자의 내용을 보고 있지 않은가 반성하면서 보게되요 ㅋㅋ홀리컴뱃이 텍스트로 책으로 나오면 사놓고 다시 보면 왠지 영상으로 볼때랑은 다르게 느낄수도 있울것 같네요. 영상때랑 다른 참가자분들의 말씀에 더 설득될것 같아요
@tgg3985
@tgg3985 Жыл бұрын
신앙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지요. 그걸 교수이기때문에 설명하라? 실망? ㅎㅎㅎ
@peterpaul224
@peterpaul224 10 ай бұрын
예정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예정을 인정한다는 전제는 예정에 대한 이의제기는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라는 결론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면 토론할 이유가 없는거지요.. 타종교인들과도 하는 토론을 개신교안에서는 불가능한 이유가 뭘까요? 참고로 저는 장로교 목사입니다..
@abcde8630
@abcde8630 Жыл бұрын
양시무스 vs 아델포스 한번더 부탁드려요..
@user-vm8fk7ll7z
@user-vm8fk7ll7z 3 ай бұрын
양시무스와 아델포스님 재미있게 봤는데 배틀 한번 더 해주세요
@user-or7vr1go8r
@user-or7vr1go8r Жыл бұрын
디모데전서 2장4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에 이르기를 원하노라 하셨는데 예정론 그대로면 하나님이 거짓말쟁이가 되네요? 본인이 직접 다 골라서 선택해놓고 왜 저런 말을 하죠 ? 저는 예정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얘기 하고 싶은게 선택받는자와 못받을자를 미리 하나님이 정해놓으셨는데 본인이나 본인 가족들 지인들이 그럼 선택을 못받고 구원을 못받는다고 해도 받아들일수 있을까요??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예정론지지 하는사람들은 이중적이라고 봅니다
@magiah2481
@magiah2481 Жыл бұрын
하나님께서 누가 구원을 받을지 못 받을지를 미리 정해놓으신 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가 구원을 받을지 못 받을지는 이미 알고 계십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노라 그렇죠. 그런데 결국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원하셔도 결국 이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원 받지 못합니다. 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지옥을 선택했으니까요
@ens7252
@ens7252 Жыл бұрын
나는 극악한 죄인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와 내 가족을 멸망하기로 예정하셨더라도 의로우시다고 봅니다.
@user-yu3sh9lg4o
@user-yu3sh9lg4o Жыл бұрын
성경에 그 구절만 있는게 아니라서 여러 교단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모두 다 다른 주장을 하는데 모두 다 정통교단인것은 성경에는 다양한 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딤전 2:4는 대표적으로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자였던 알미니안과 그 추종자들이 즐겨썼던 말입니다. 신기하죠. 개혁주의에서 시작된 칼빈주의 알미니안이 반대적인 견해로 돌아섰으니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당시 시대의 상황과 배경을 알면 쉽습니다.
@user-zw1lu2yx5o
@user-zw1lu2yx5o Ай бұрын
구원은 사복음서에 쉽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칼빈 루터 등등. 무슨 의미가 있나요 예수님을 벗어나면 다 이단입니다.
@jeonghyeonchoi3530
@jeonghyeonchoi3530 Жыл бұрын
현재 신학이 말하는 예정은 언약과 복음과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복음으로 언약을 폐하여 예정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뽑아버린 결과입니다. 곧 예정은 언약과 관련된 것인데 복음으로 언약을 폐하고 언약에 속한 것을 복음에 적용하여 혼합시킨 것입니다. 먼저 예정의 대상은 롬 8:29에서 미리 아신 자들입니다. 미리 아신 자란 롬 11:1에서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아모스 3:2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알았다고 하시어 이스라엘 외에는 미리 아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 아신 자란 롬 8:28의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신 자로 합력하여 선을 이룰 자들로 이 선을 이루는 일을 엡 1:11에서는 기업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 뜻대로 부르신 자는 롬 8:27의 성도입니다. 이 성도는 곧 롬 8:33의 택하신 자들입니다. 그러니 예지 예정의 대상은 일단 유대인입니다. 이를 증명하는 것으로 롬 9장에서는 택한 자들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곧 이스라에에 대한 것이라 하며 택함을 이스라엘 조상들과 연관시킴니다.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설명하며 야곱의 택함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곧 이 택함을 받은 자들은 롬 8:28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선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는 롬 9:4에서 언약과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언약과 약속이 폐하여 지지 않았다는 것을 조상들을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지 예정은 하나님의 선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기업으로 택하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택함은 언약과 관련이 있고 이 언약은 조상들과 맺은 것입니다. 그러니 조상들과 언약을 맺을 때 택함을 받은 것으로 출생전에 택함 을 받은 것입니다. 이 택한 자들은 할례를 받음으로 언약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언약이 없는 이방인은 복음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언약을 받은 것과 이방인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언약은 택함에 의하여 할례를 받음으로 언약에 참여하고 복음은 믿음으로 세례를 거쳐 이 언약에 참여합니다. 이는 할례는 죄를 범하기 전 곧 난지 8일 만에 받으나 세례는 죄사함의 회개를 요하는 믿음에 의하여 받게 됩니다. 그러니 유기자란 믿지 않는 자를 말하는 것으로 사실 상 유기지가 아니라 복음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의 대상은 언약이 없는 이방인이니 미리 택한 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복음과 관련된 예정은 복음을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로 예정된 것이지 믿을 자를 먼저 택하여 예정한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한 것은 엡 1-3장에 더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dongmugil9410
@dongmugil9410 7 ай бұрын
예정을 운명론으로 생각하는 신학자와 목사들은 도대체 생각이 없다... 하나님은 미리 아심으로 구원의 길을 예정하신 것이지.. 니는 천국에 니는 지옥에 간다고 창세전부터 결정한 것이 아니다..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미리 그렇게 되도록 설계하신 것인가 ?
@dongmugil9410
@dongmugil9410 7 ай бұрын
성경대로 믿자....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는 저를 믿는자는 창세전에 이미 정하셨다(요한복음 3:16).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지않고 창세전에 미리 구원받을 자들은 미리 정하셨다.(디모데전서 2:4) .. 천국갈 사람 지옥갈 사람이 창세전에 이미 예정하신 것을 믿는 자만이 구원받는다.(창세기 1:1절) , 구원받을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 그래서 전도할 필요가 없다 (사도행전 16:5)
@user-ie8mx4mz8t
@user-ie8mx4mz8t 3 ай бұрын
태초에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두셨을때 하나님께서는 동산중앙에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모든일을 계획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죄인임을 명확히 하신겁니다. 죄를 계획 하셨냐구요? 우리의 본성입니다. 모세도 다윗도 살인자였지만,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넘어짐도 아십니다. 그리고 배신하였지만, 끝내 믿는자로 회심했던 베드로와 저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ahava97
@ahava97 Ай бұрын
그런데 왜 통합 측 교수님은 안나오세요?
@NadriYahoho
@NadriYahoho 10 ай бұрын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학문인데 왜 성경은 사용안하시나요? 모든 걸 성경으로 말한다면 하느님에 관한 더 정확한 결론에 이를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upiterr-h4j
@upiterr-h4j 7 ай бұрын
박재은 교수님 칼빈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기독교강요에서 배제하였습다. 언급하지 말아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관점의 이론에서 모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해됩니다. 기독교강요 저술의 관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칼빈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맞지 그의 사상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대표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user-il4sn2jc8c
@user-il4sn2jc8c Ай бұрын
하나님이 모든걸 아시는것과 모든걸 계획하신다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다른문제인데요,,, 이 둘을 같은 의미로 쓰고 계신것 같아 걱정이 되어지네요 하나님의 속성중에는 공의가 있으시고 사랑이 있으신데... 흑백논리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계획한다고 믿어버리면 선악과의 사건, 믿는자와 믿지 아니한자의 나뉨, 천국백성,,, 이 모든게 운명적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되어지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이유에 대해서 이해를 해보면 좋을것 같습니다. 자유의지는 받아들이면서, 예정론을 온전히 받아들일수 있다는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네요,,,
@hachunsung8097
@hachunsung8097 Жыл бұрын
박재은 교수는 예정론에 대해 신앙과 하나님의 입장에서 논하는 것같다. 대학 사회에서 토론은 이성과 논리라는 방법적 도구와 신학적, 성서학적 근거로 진행해야 하는데도 이를 무시하였다. 주최자 다마스쿠스는 박재은 토론자에게 이러한 점을 주지시켰는가? 이럴 거면 무슨 토론이 필요한가? 창피하고 안타깝다. 토론은 토론다워야 한다.
@hyunminseon9263
@hyunminseon9263 Жыл бұрын
유기하심을 간과하심으로 단어만 바꾼다 해서, 뭐가 달라진다는거죠?
@user-lj2fx7ny9i
@user-lj2fx7ny9i Жыл бұрын
그렇지않아도 당시 댓글에서 많이 이야기되던 부분이었던걸로 기억해요.
@user-vt4mc8rz7r
@user-vt4mc8rz7r Жыл бұрын
제 입장에서는 받아들이는? 듣는 입장에서 좀 더 부드럽게 수용할 거 같아요.
@user-or7vr1go8r
@user-or7vr1go8r Жыл бұрын
그러게요 무슨 말장난하나 ㅋㅋ 과연 본인이나 가족이 선택 못받아도 저렇게 말할수 있을까요
@user-ow9tj7wd3b
@user-ow9tj7wd3b Жыл бұрын
@@frrddeed5 이중예정은 천국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이 태초부터 정해져 있다는거 아닌가요? 그렇다면 성경에 예수님께서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나 또한 베드로서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표현을 하나님의 이중인격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칼빈주의는 예수님께서는 특정한 자를 위해서만 보혈을 흘리셨다는 제한속죄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계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특정한 사람만을 택하셨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요한복음 3장16절에서 믿는 자마다를 택함 받은 자마다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user-ou7yt1hn3n
@user-ou7yt1hn3n 8 ай бұрын
@@user-vt4mc8rz7r 그럼 본질은 유기나 다를 바 없다는 거군요.
@dongmugil9410
@dongmugil9410 7 ай бұрын
창세전에 미리 지옥갈 사람, 천국 갈 사람 하나님이 정하셨다를 믿는게 하나님의 절대 주권, 전지전능하심을 인정하는거다 ? 이게 참 믿음이다 ?
@user-zx9kq6cg9p
@user-zx9kq6cg9p 6 ай бұрын
칼빈의 에정론은 분명하게 틀렸습니다 그렇다고 웨슬리의 자유의지론이 다 맞는 것도 아닙니다.
@LimTurtle1999
@LimTurtle1999 Жыл бұрын
아델포스님이 최종보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토론...
@user-tu2le6jz8e
@user-tu2le6jz8e Жыл бұрын
예정론이 선교적 사역에서 심각한 훼손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선교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개인의 의인데 행위구원이 맞나요? 예정론이 사변인건 맞는데 그리스도 밖에 구원이 있냐가 설명이 안되서 발전된 교리가 예정론인걸로 알고있습니다. 구원이 삼위하나님의 사역이기에 인간의 공로가 없다. 인간은 모두 타락했고 인간안에는 그 어떤 선도 이룰수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즉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니 그래서 자연스럽게 구원받을자를 하나님이 예정하셔서 효력있게 부르시고 구원하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지 않고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에 어떠한 부분에 성령의 조명하옂 심 없이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다라면 그것은 인간의 공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곧 행위 구원으로 빠지고 반박시 당신의 믿음으로 하나님 열심히 믿으십시오
@user-id7sk6kt7t
@user-id7sk6kt7t 7 ай бұрын
저는 예정을 믿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도록 나타나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건 신비입니다. 성경은 왜 예정과 버려두심을 가르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는 자들은 부르시고 또한 택하시고 택한자들을 이끌어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내가 그 분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은 하 영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구원하신다는 것이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군가를 유기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유기되었는데 몇몇은 구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나는 구원하시지 않으셨냐 되 물수 없다는 것이죠. 그것은 구원자의 마음이라는 것이고, 옹기장이이신 분께서 어떤것은 쓰시고 어떤 것은 깨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응하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user-ne4dq8sv5d
@user-ne4dq8sv5d 5 ай бұрын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니 인간을 창조 하면 타락해 지옥에 갈것을 이미 아실텐데 굳이 인간을 창조해서 지옥에가서 고통 받을 영혼을 왜 만드는거죠.. 이건 선하신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그냥 하나님 스스로 완전하신분인데 왜 인간을 창조하신거죠.. 그 하나님도 거부할수 있고 쌍욕할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시고 자유의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찬양 받기 원해서 창조한거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아 겁나게 어렵네 이거
@user-xj7iy7sn4b
@user-xj7iy7sn4b Жыл бұрын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5:39)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러 이땅에 죄된육신의 몸으로 오신게 아닙니다. 인간들은 구원을 얻으려고 성경을 연구하지요.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러 이땅에 오신게 아니기에 인간이 자기를 구원하기위해 믿는 예수는 우상 예수일 뿐입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는 누5장8절 베드로의 고백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발 저를 떠나 주십시오"라는 천국은 커녕 지옥가야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13:24) 구원은 인간의 어떠한 종교적 노력으로도 들어갈수 없습니다. 즉 인간쪽에서의 어떠한 행위로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거지요.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받을수 있지요. 주님께서 이땅에 오신 이유는 창세전 아버지 하나님의과의 언약(구약에명시된 말씀)을 이루기위하여 즉 주님의 주되심을 십자가상에서 다이루시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으며 주님께서는 주님의 주되심을 증거하라고 자신의 백성(성도)들에게만 성령을 주셨기에 성령받은 사도들과 성도들은 십자가만을 증거하며 오직십자가만 자랑하지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인간이 죄된 몸으로는 어떠한 종교적 노력으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십자가를 증거하라고 성령을 주신 주님의 지체들만 십자가의 피능력으로 덧입혀져 아들의나라(천국)에 들어갈수 있지요. 성도만이 율법(십일조 주일성수 말씀대로살기 종교적행위)이 죄아래 가둬두기 위한 주님의 조치이며 악마들은 율법을 지켜 행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며 십자가를 제거하여 자기가 만든 거짓 천국(지옥)으로 인도하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고전8:6) 주님을 위한 세상이지요. 십자가만 밝히 보이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yaraeja
@yaraeja Жыл бұрын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보다 이중 예정론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과오를 범하는 예지예정.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지만 이스라엘 모두가 구원받은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을 또 만들고 있는것 같아요? 나는 믿으니 택함받았고 모두가 택자는 아니다 갈라치기 아닌가요?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하면 모두를 택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예정이 아니라 자유 아닐까요? 경로입력보다 자율주행이 더 수준높지않나요?
@NibusMik
@NibusMik 2 ай бұрын
경로 입력과 자율 주행 재밌는 표현이네요. 변인통제가 완벽하다는 관점에서는 의미있는 표현이 아닐 수 도 있는 것 같고요.
@user-LGtwins0827
@user-LGtwins0827 7 ай бұрын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할 의무나 책임이 없죠. 예정돼었으니 내맘대로 못하는거 아니냐는 말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임..
@user-kq2em4qf1h
@user-kq2em4qf1h Ай бұрын
하나님을 창조주라 하면서 세상의 주인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그 결정 에 왜 이리 말이 많은가 선택받았던 받지않아던 하나님이 결정하신대로 이루어질것이다 누가 감히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목적하신 결정을 바꿀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힘과 지혜와 능력이 있고 강한가..? 우리가 태양을 만들수 있는가, 달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늘과 땅을 만들 수 있는가...? 우리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참새 한마리도, 구더기도 만들 수 없고, 이것들의 운명을 바꾸어 줄 수도 없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의 법칙과 질서를 바꿀수 있는가 죽지 않을 수 있는가 심판을 피할 수 있는가 지옥에 않갈 수 있는가 바꿀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비판하라 그러나 그럴수 없다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주권에 겸손히 순종하라 천국에 보내든 지옥에 보내든 순종하라 이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davidshin9200
@davidshin9200 6 ай бұрын
그냥 각자의 믿음으로 ..
@songchoe5546
@songchoe5546 9 ай бұрын
"이미와아직" 논쟁은 500년전 화란 도르트에서 (종교재판소) 논쟁이 끝났음에도, 침묵해야할 "아직은" 시퍼렇게 살아 꿈틀거리네..?!!😊
@jhbak4383
@jhbak4383 Жыл бұрын
예정론을 지지하는 사람이 예정론을 이해 못함ㅋ 깔비니즘도 아니고 웨슬리안도 아니고 애들이 뭘 배우것노
@user-vt5vn6go7c
@user-vt5vn6go7c 6 ай бұрын
이건 견해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누구든지 믿은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발 예정설에서 벗어나세요. 진리는 언제나 단순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꼐서 지옥 갈 자도 미리 정해놓았다는 것은 신성 모독입니다.
@user-eo9qo7ss6y
@user-eo9qo7ss6y 3 ай бұрын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믿음은 혈통, 육정, 또는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난 자가 아니면 누구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도 말씀하시지만, 그보다도 먼저 신적 의지와 결정이 있었음을 말씀하십니다. 마 13: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막 13:26-27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갈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벧전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단순하게 생각나는대로 적어본 구절들입니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위 본문들은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아주 확실한 말씀들입니다. 하지만 이 외에도 단순히 택함, 택정, 예정, 선택, 정함, 인침, 보증 등의 단어들은 간단한 검색만 해보셔도 수백 구절 이상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러나 유기에 대한 말씀은 몇 구절이나 되는지 여쭤보고 싶네요. 윗 구절만큼의 '확정성'을 드러내는 '유기'의 구절은 얼마나 되는지요? 최소한 성경에 있는 확실한 예정과 선택에 대한 말씀들이 그것을 없이 해도 괜찮을 만큼 적은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인정해야 될 것입니다. 이건 사실 해줄까 말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나치기엔 너무 많은 구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정론을 교리로만 배우면 뭐 그런 논리가 있어 할 수 있지만 성경을 읽으면 또 다른 문제로 다가옵니다. 예정에 대한 말씀이 너무 많아서요. 그리고 이건 알미니안주의자들에게 항상 드리고 싶은 말씀인데 제발 인간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재단하려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 부분은 욥기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욥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의인이었으므로 하나님께 자신이 잘못한 게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해달라 요청합니다. 뭔가 잘못아셨을 거라고 말입니다. 욥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른 답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욥이 있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높은 차원의 얘기를 말씀하십니다. 선과 악, 합당함의 문제는 '너가 볼 때의 기준이 아니라, 내 기준의 문제이다'라고 말입니다. 즉, 신정론의 문제는 단순히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선하고 악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선을 완벽하게 재단할 수 없습니다. 선은 하나님이시고, 그러므로 선과 악도 하나님께서만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논하는 것은 그저 그 편린을 우리의 지식 안에서 이해해보고자 함일 뿐입니다. 인간의 선이라는 건 굉장히 상대적인 것이어서 시대에 따라 다르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독재가 절대악인 것처럼 비춰지지만, 왕정시대에는 왕의 독재야 말로 절대선의 이상적인 정치의 형태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절대악의 표본처럼 비춰지지만, 고대시대에는 사람을 죽이는 것도 필요에 따라 선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선'이라는 기준입니다. 인간의 선은 인간의 시대와 역사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악하시네 마네, 예정하셨다고? 악의 저자네 마네 하는 것은 지극히 '현대인'의 인본주의적인 생각으로밖에는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인들이 말하는 선의 기준이 하나님께서 말하시는 절대선의 기준과 완벽하게 부합한다고 장담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므로 정말 이성적인 사람은 인간의 결핍을 전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지식이 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만이 오직 선하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지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가진 부족함에 대한 이해와 인정과 지식입니다.
@tilltheend475
@tilltheend475 3 ай бұрын
​@@user-eo9qo7ss6y위의 적은 구절들은 구원과 아무 관련없는 구절들입니다.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 제발 단순하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user-eo9qo7ss6y
@user-eo9qo7ss6y 3 ай бұрын
​@@tilltheend475 정확하게 궤변이십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인 줄 알지만, 그런 식의 회피는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비판하려면 무언가에 대해 잘 알아보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냥 알기 싫으니 구원과 관계 된 게 아니라고 호도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위의 구절들은 이미 공교회적으로 구원과 관련이 있다고 의견이 끝난 구절들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간단한 코멘트들을 적어봅니다. 요 1:12-13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 이것을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양자의 교리'라고 부릅니다. 모든 조직신학(교의학)에서는 양자 교리가 구원의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그렇게 단순히 생각되어야 할 주제가 아닌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맏아들이신 예수님과 함께 천국을 상속할 상속권이 생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마 13:11 천국 비밀의 허락권 - 성경에서는 구원을 의미하는 다양한 표현들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표현 중의 하나가 바로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의 기간동안 하신 일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셨습니다. 즉, 구원이란 말은 다른 말로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을 택자들에게는 허락되었고, 바리새인들 등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구원에 관한 이중예정의 의미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막 13:26-27 그 때에 ... 택자들을 모으리라 - 복음서에 나오는 '그 때'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영광을 받으실 때(특히 요한복음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입니다. 마가복음 13장에 언급되는 '그 때'는 후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종말에 재림하실 때에 택하신 자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십니다. 오직 택하신 자들만 모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의지에 대한 함의는 1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요 6:37-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 - 이 부분은 그냥 읽어보시면 왜 구원과 관련된 건지 아실텐데 아예 읽으려는 노력도 안 하신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올바른 토론은 상대의 주장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면밀히 살피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알미니안주의를 지지하려 위 본문을 읽지 않는 태도는 성도로서 합당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구원과 관계 없다는 식으로 호도하며 아예 읽지도 않으려고 하지 마시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어주십시오. 이 구절처럼 구원을 말하는 구절이 없습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 만큼 구원과 관련된 구절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보내주신 자들을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이 바로 성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자 하나님에 의해서 반드시 성취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처럼 유기가 반대하는 구절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이끄신 자들을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에 구원에도 유기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소명과 칭의와 영화에 관한 내용입니다. 조직신학(교의학)적으로 모든 신학자들이 구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구절입니다. 즉, 공교회와 모든 목사님들이 구원의 지식으로 다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이게 구원과 관련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이단입니다. 공교회에서 인정하는 내용을 혼자만 인정하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1)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십니다(소명) 2)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십니다(칭의) 3)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영화) 이 때 영화란 온전히 영광스럽게 변한 상태를 이릅니다. 곧 결과적으로 성도가 구원에 이른 온전하게 이루어진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갈 1:15, 엡 1:4-5 태로부터 택정함과 창세 전에 예정함 - 택정과 예정이란 말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냥 정하셨다'에 방점을 찍을 일이 아니고, 내 의지가 생기기도 전해 '이미 정하셨다'가 중요합니다. 바울을 그가 나기 전에 태로부터 '택하셨고', 우리는 창세 전에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죄 사함을 받기로 예정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엡 1:7) 구원을 의미하는 여러가지 말들 중에 하나가 바로 '죄 사함'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자들만이 죽지 않고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을 사모하고 상고하는 분이시라면 이 말이 왜 구원을 의미하는지 양심껏 이해하실 것입니다. 벧전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 - 피 뿌림은 죄 사함의 다른 말입니다. 즉, 피 뿌림도 구원을 의미합니다. 성경말씀까지 인용했더니 '단순'히 '구원'이 안 적혀 있다고 '안' 읽으시려는 노력이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그런 태도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존중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안 적혀 있지만, 천국, 하나님의 나라, 택함, 의로움, 죄사함, 피뿌림, 영화 등이 바로 그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을 부디 외면하지 마십시오.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라는 교리를 믿고 공부하지 마시고 부디 성경을 읽으시길 권합니다. 그러면 예정교리가 얼마나 성경에서 내증이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user-vt5vn6go7c
@user-vt5vn6go7c 3 ай бұрын
@@user-eo9qo7ss6y 예정이 아니라 예지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와 불신자를 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미리 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명도 구원에서 떨어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미리 알고 있죠, 누가 안믿을지. 잘 생각하세요. 예정론이 한국에서만 이렇게 판을 칩니다. 미국에서는 명함도 못내밉니다. 빌리 그래험도 예정론 하면 치를 떨던 사람입니다.
@user-eo9qo7ss6y
@user-eo9qo7ss6y 3 ай бұрын
@@user-vt5vn6go7c 아니죠. 그건 미국에 감리교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리교는 유독 미국에서 유행한 종파이구요. 당연히 미국만 상정하면 장로교의 이중예정보다는 감리교의 예지예정을 믿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감리교도가 많은 나라이니까요. 그런데 예지예정은 감리교와 알미니안주의를 주장하기 위한 교리일 뿐이지 성경적인 주장은 아닙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복음서에 나온 세 부분에 대해서 알미니안식으로 해석이 가능한지 확인 해보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3장 10-12절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에 대해 허락된 자와 허락되지 않은 자를 구분하시죠. 인간이나 그 제자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구분한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받을 자와 받지 않아야 할 자를 구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는 오히려 알미니안주의에서 말하는 '일반적 구원'에 완벽하게 배반하는 구절입니다. 누가복음 9장 4-5절 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누가복음 9장 5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라고 말씀하시죠.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감리교가 말하는 일반적 구원, 곧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과는 너무도 다른 냉담한 복음 전파의 방식입니다. 요한복음 6장 70절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알미니안주의의 특징은 하나님조차 그 사람의 구원은 끝까지 모르신다는 것이죠. 한 번 은총을 받은 후에도 인간의 의지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총을 저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그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께서 보장해주시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이 나머지를 이루어 가야할 부분이라는 것이죠. 이런 논리라면 누군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긍휼한 마음으로 말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직 인생을 다 살지도 않은 어찌 보면 불쌍한 가룟 유다를 위해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라 단정하고 계시죠. 오히려 십자가의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마귀를 택했다는 함의까지 엿볼 수 있는 구절입니다. 이 때 가룟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나요? 하나님의 결정론적이 않으심이 느껴지나요? 하나님께서는 아직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수 있는 가룟 유다에게 왜 마귀라고 단언해버리신 걸까요? 이 외에도 아마 제가 하나하나 다 적으면 최소한 십수 구절은 알미니안주의에서 해석할 수 없는 구절들을 댈 수 있을텐데 가볍게 복음서에서 생각나는 세 구절만 적어보았습니다. 저는 성경을 좋아합니다. 교리로 말하지 마시고 성경으로 대화하길 원합니다.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 이런 것보다 얼마나 성경을 성령님의 조명하심 아래에서 읽으셨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또 그렇게 장로교의 예정론을 부인하시는데, 그렇다면 감리교가 말하는 모두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방식에 위 말씀들이 어떻게 부합하는지 직접 확인해보시고 코멘트를 주시길 바랍니다.
@paulmun1921
@paulmun1921 Ай бұрын
신학을 과학으로 설명하려는것은 좀 우습네요,칼빈의 예정론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젊은 신학자들의 토론 모습 참 보기 좋습니다
@kyj880821
@kyj880821 Жыл бұрын
?? 감신교수님 발언에서 좀 걸리는게, 과학이 모든것이 결정되어 있다고 하기때문에 신학이 자유의지를 강조해서 우리 선택이 의미있게 만들어야한다?? 이게 무슨말이죠? 신학과 과학은 별개로 가야할거같은데.. 오히려 결정론이 예정론을 지지하는걸로 보입니다.
@user-ou7yt1hn3n
@user-ou7yt1hn3n Жыл бұрын
세상이 정말 그렇게 결정론적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에 대한 인간 책임 또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결정론자들이 하나같이 자유의지 부재론자들인 이유가 있어요. 근데 이를 달리 말하면, 즉 결정론이 함의하는 유물론적 세계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인간은 사실 인간이 아니라 기계라는 것입니다.
@kyj880821
@kyj880821 Жыл бұрын
@@user-ou7yt1hn3n 글세요 예정론 반대하는 이유랑 똑같네요. 정작 예정론은 자유의지를 어느정도 인정하면서 답을 찾으려하는데 말이에요.
@user-ou7yt1hn3n
@user-ou7yt1hn3n Жыл бұрын
@@kyj880821 그게 사실 말이 안 되니까 그에 따른 비판이 있는 거지요. 백날 영원한 현재 시전하면서 방어해봤자죠. 그렇다 한들 사건의 선후는 있을 테니까요. 요컨대 정해진 사건을 향해 나아가는 식으로밖에는 행위할 수 없다는 것을 함의하니까요.
@kyj880821
@kyj880821 Жыл бұрын
@@user-ou7yt1hn3n 글세요 예정되어있지 않은것도 말이 되는거 같지는 않은데요.. 성경에 예언이 기록되어있는것만 봐도, 예수님이 유다가 배반할걸 알고 베드로가 부인할걸 예지하신 것만 봐도, 그리스도인이 최후 승리를 믿는 것만 봐도 말이죠. 예지는 하시지만 예정은 안하신다?? 창세전부터 예지하셨는데 그대로 창조하셨으면 예정이지 뭔가요..
@nocrossnocrown9143
@nocrossnocrown9143 Жыл бұрын
​@@kyj880821 예언의 언급에 항상 따라오는 것이 성취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연관되어 주로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알고계셨다면 가롯유다를 처음에 제자로 부르시는 것도 받아드리기 힘든 부분입니다. 제자로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적어도 그런 결말은 아니었을테니까요.. 베드로의 부인도 그의 말이 트리거가 되어 미리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그를 깨우치시기 위한 일들을 정하시고 이루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엔트로피에 따라 생각하면 이미 정해진 미래의 시간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user-oq3np8gn1j
@user-oq3np8gn1j 2 ай бұрын
구원은 어려운게 아니라. 아주 쉬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인간들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 인류 모두에게 죄인으로 살아가고 죽으면 지옥 가기에 우리의 조들을 구원하시고자 2천년전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시고 장사 되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심을 마음으로 믿고 내가 죄인임을 입술로시인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받으며 (로 10장 9 절)한번 받은 구원은 절대로 취소 될 수 없음을 성경에서 말씀하십니다. 그후에 내가 죄를 지으면 죄를 자백 하면됩니다
@jkjk-yy2br
@jkjk-yy2br Жыл бұрын
장로교 교인이지만 장재호교수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
@user-id7sk6kt7t
@user-id7sk6kt7t 7 ай бұрын
장로교는 에스터민스터신앙고백을 근거하고, 우리의 신앙의 선서가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본인이 장로교인이지만 장로교 신학은 반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고시고 발언하시길 원합니다.
@user-lo3kw8kj1q
@user-lo3kw8kj1q 4 ай бұрын
정말 골 때립니다....하나님이 뽑아서 지옥 보낸게 아니고 간과하시고 지나쳐서 지옥보냈다면 그 수가 수천억명아니 수조명이 될수도 있을것 같은데 인간 같으면 밤에 잠이 올까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수천억명을 지나치고 간과하심으로 지옥 쳐 보내놓고 아무렇지도 않으신건가요... 그 수천억...수조억명은 지나쳐지고 간과해져서 영원히 유황불에서 고통받아야 되나요......정말 골 때립니다...도저히 믿겨지지 않습니다...하나님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신앙의 영역이니 입 다물고...생각하지 말고....그냥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게 오히려 나을것 같네요
@user-eo9qo7ss6y
@user-eo9qo7ss6y 3 ай бұрын
이건 신정론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예정론 논쟁과는 별 관련이 없는 얘기이십니다.
@traum2002
@traum2002 Жыл бұрын
신학자... 그것도 학생을 가르친다는 교수가 "신앙으로 믿습니다!!" 라는 걸 논리로 내세우다니... 수준이 처참합니다. 그리고 예정론과 자유의지가 동시에 만족 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헛소리를 칼빈부터 지금까지 해대니.... 논리적으로 구슬프기까지 하네요. 자유의지라는 것이 기껏해야 물 한잔 마실 의지 따위를 말하는 건가요? 자유의지라고 하면 내 의지로 내 구원을 선택할 수 있는 지경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함이 타당하지 않나요? 자유의지가 있으면서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는 얼토당토 않은 소리는 고만하시고, 예정론이든 자유의지든 주장을 하려면 한 가지만 하시오.
@user-ou7yt1hn3n
@user-ou7yt1hn3n 8 ай бұрын
맞는 말씀이지만 저도 하나만 첨언하자면요. 예정론이 전제하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에 따르면 "기껏해야 물 한잔 마실 의지"조차도 자유롭지 않습니다ㅎ
@traum2002
@traum2002 8 ай бұрын
@@user-ou7yt1hn3n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신의 전지성이 훼손되지 않으려면 인간에게는 그 어떤 의지도 없어야 하지요. 그러다보니 예지예정이란 개념도 만들어 내던데... 그러니까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데, 그 선택을 신이 미래를 미리 보고 알 수 있다" 라는 황당한 소리이지요. 결국 충돌하는 두 논리를 동시에 성립하도록 하려다 보니 해괴망측한 논리가 전개된다고 생각합니다.
@user-ou7yt1hn3n
@user-ou7yt1hn3n 8 ай бұрын
​@@traum2002 그래서 나온 방어논리가 어거스틴 시간론이죠.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해 계셔서 세상을 마치 "영원한 현재"처럼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에, 특정 시점에 대한 미래값은 그 미래 시점에 앞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즉 인간은 그 모든 각각의 시간점에서 자유의지를 발휘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단지 이를 관측하고 계신 것뿐이다! 라는 논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시간의 흐름, 순서, 인과가 부정되는 건 아닌데 말이죠. 특정한 행위를 하는 식으로밖에는 나아가지 못하는 존재를 자유롭다 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다만 그래서 예지예정보다는 이중예정이 예정론의 틀에서 보면 더 정합하긴 하죠. 전지성은 상기했듯 논리필연적으로 결정론적 세계관을 함의하니까요. 그리고 그러한 결정론적 세계를 창조하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 본인이시죠. 그래서 자유의지를 아예 부정하는 칼빈주의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전적 타락이 부정되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긴 있지만 그 자유의지는 오염된 자유의지라서 스스로는 구원을 받아들일 수 없고,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야 한다(=하나님께서 마음을 조종해주셔야 한다)는 것인데 자유의지를 아예 부정하면 전적타락도 당연히 부정되고 그러면 심판의 근거도 부정되는 거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한 자유의지만 부정하는 경우가 또 많습니다. 물론 그것도 클래식한 전지성과 모순되는 주장이긴 하지만 자유의지와 전지성이 하여튼 양립가능하고 쳐준다 하더라도(일반적으로 인간의 인지한계 때문에 그 신묘한 조화를 이해할 수 없다(=하여튼 가능하다)는 식으로 설명), 악을 선택하는 인간의 경향성(=전적타락)도 결국 하나님께서 설정한 것이기에 악의 문제를 피해갈 길이 없죠.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원죄를 얼마든지 전가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러셨습니다. 인간에게 부여돼 있는 죄성은 다시 말해 스스로의 주체적 선택(인격적 하자)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내재돼 있는 기계적 하자라는 것이지요. 따라서그 존재론적 하자를 설계한 창조주, 즉 하나님이야말로 인간 죄성의 진정한 책임자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함의하게 됩니다. 이것이 상쇄되기 위해서는 구원에 대한 자유의지까지 긍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직접 택하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적어도 유기만큼은 부정해야 악의 문제를 커버할 수가 있는 거죠.
@user-xu1qq6xx3v
@user-xu1qq6xx3v 8 ай бұрын
수사학으로 논증하면 안되지요. 진실추구 그 자체로 목표를 두어야죠.
@markleekr
@markleekr Жыл бұрын
예정론을 싫어하는 이유 예정론을 가지고 이상한 모든 말을해서.. 특히 예정론이 확장되 모든것이 예정되어있다는 식으로 모든 사건사고 까지도 예정되어 있다로 확대됨.. 특히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말하면서 제국주의에 의한 국가의 지배상태라던지 국가적으로 일어나는 대형 사건을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말하면서 그 안에서 있는 피해자들을 향한 애정조차 없고 그냥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이유로 위로와 사랑이 없이. 그냥 넘어가는 장로회 전도사로서 신앙고백으로써 내가 지금까지 온것은 하나님의 은혜고 예정이었기에 가능했구나 라고 고백은 하지만. 총리 지명자였던 문모씨가 온XX교회에서 한 간증이나 이런걸 극혐하는것은 그 안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임. 칼빈도 신앙고백적 예정만 말했지 이중예정이니 이런 말 한적없음..
@jongmoonlee1046
@jongmoonlee1046 Жыл бұрын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전지전능을 수호하고 싶어서 그런거죠. '그래서 그러면 하나님이 그걸 모르냐?'라는 질문에 무조건 '알고계시지'밖에 못하니까요. 전지전능에 초점을 맞춰서 논리를 전개하면 일단 전통적인 결정론으로 이어지게됩니다. 이러면 omniscient만큼은 다른 어떤 주장들보다도 확실히 변호해내죠. omnopotent도 거의 변호는 되는데 문제는 omnibenevolence부분에서 우스꽝스러워지죠.
@user-lj2fx7ny9i
@user-lj2fx7ny9i Жыл бұрын
신의 전지전능을 위한다기보다는 믿음vs행위에서 행위를 완전히 죽여버리기 위해 꺼낸 이론으로보입니다. 겉으로는 신의 전지전능을 핑계대고있지만 속으로는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것이죠.
@user-ou7yt1hn3n
@user-ou7yt1hn3n Жыл бұрын
​@@jongmoonlee1046 하여튼 선하시다. 하여튼 공의로우시다. 하여튼 인간 책임이다. 인간의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다능! 으로 모든 게 다 방어가 되죠 ㅋㅋㅋ
@akjaak8156
@akjaak8156 Жыл бұрын
모든 것은 예정되어있으나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선택을 바꿀 수 있기도 한 것.
@user-nh9mr4wx1o
@user-nh9mr4wx1o Жыл бұрын
신앙에 싫고 좋음을 따지는것이 잘못됫다는게 박교수님이 말하시는거임요
@joshuakim3314
@joshuakim3314 Жыл бұрын
아니 신학교수들이 성경말씀 인용을 왜이렇게 안하지 신학교수들 맞나? 성경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성경말씀이 안나오고 온갖 과학적 이론과 옛날 학자들 이야기를 하고 앉아있습니까?
@user-ou7yt1hn3n
@user-ou7yt1hn3n 8 ай бұрын
왜냐하면 그래봤자 해석투쟁밖에 안 되거든요. 그래서 예정론 토론할 때는 특히나 성경구절 암송대회 잘 안 합니다 원래.
@dongmugil9410
@dongmugil9410 7 ай бұрын
예정의 의미를 미리 정했다로 해석하는 모지리들 정말 많구나... 하나님 혼자 복치고 장구치고.. 상관없는데..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은 뭐니 ? 그것도 하나님 뜻이니 ? 하나님도 참 고상한 취미를 가지셨구나.. 니들이 생각하는 예정이란 의미를 믿는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거라고 ? 마귀같은 놈들이네..
@swc7412
@swc7412 Жыл бұрын
(박재은 교수님께서 강력하게 밀어붙이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모든 것을 계획하신다.”라는 믿음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이라는 속성으로부터 곧바로 따라 나오는 결론이 아닐뿐더러,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심각하게 왜곡한다고 생각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런 식의 ‘유신론적 결정론’은 사실상 우주론적 폭군와도 같은 신, 진정한 의미에서 피조물의 자유를 허용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인형 놀이’를 즐기는 신을 상정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들이 겪을 고통과 악 하나하나를 모두 ‘계획’하고 ‘작정’하면서 자신의 연극 대본에 심취해 있는 ‘신’을 진정으로 선한 하나님, 예수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ns7252
@ens7252 Жыл бұрын
자신이 멸망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깊은 자각이 없는 이는 주권적으로 예정하시는 하나님이 폭군으로 보일 것입니다.
@ys9018
@ys9018 3 ай бұрын
논리도 없고 고민도 없고.. 누구신지는 말 안 하겠습니다
@Jj-ms4du
@Jj-ms4du 3 ай бұрын
Right?
@ikkim3649
@ikkim3649 Жыл бұрын
예정론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신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그 정의는 "전지와 전능성"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도 전지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예정론에서 하는 개념은 보다 철학적인 개념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신이시다. 신은 전지전능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지전능해야 한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것을 모르실리 없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당연한 귀결이다. 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바로 하나님을 인간이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하시는지... 이사야 55장 말씀 :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규정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전지와 전능이라는 인간의 철학적개념으로 규정되는 분이 아니기에 예정론은 처음부터 잘못 출발된 것이라고 봅니다.
@Thinknorma
@Thinknorma Жыл бұрын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이라는 속성 조차 인간이 알 수 없으면서 하나님을 전지전능하다고 단정지으면 안된다는 논리이긴 것 같은데... 인간이 인격적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 인간에게 허락하신 범주에서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을 알아가고 표현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실 때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는지, 일부 인간은 유기하셨는지에 관해 인간의 입장에서는 내가 또는 내가 관련된 자가 유기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겠지만,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 아닙니까. 유기라는 결과가 불쾌하지만 실재하는 만큼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일부를 유기하셨다고 표현하는 것은 표현이 과격하다고는 볼 수 있지만 틀린 것이라고 이해되지는 않는데요
@user-nz5gy4cu7y
@user-nz5gy4cu7y 27 күн бұрын
이중예정론을 고집하는 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쏙 빼닮았다
@frrddeed5
@frrddeed5 4 күн бұрын
이중예정이 뭔진 아냐?
@heungkwanpark6761
@heungkwanpark6761 Жыл бұрын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 (엡2:1) 인간의 허접한 이성으로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을까 ? 인간이 논쟁을 할 수는 있지만 성경말씀을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인지 먼저 묻고 싶다 성경말씀을 논하려거든 어느정도의 말씀을 배우고 읽고 해서 건강한 논쟁을 해야지 정확한 말씀을 가르쳐도 듣지 않으려고 하는자에게는 불필요한 시간 낭비다 요컨대 성경말씀은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은 관심도 없겠지만 절대 깨닫지 못한다 성경말씀의 수신자는 구원받은 성도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틀리게 전하는 자들이 이단 위의 한 분은 이성으로 말씀을 판단하고 접근하는게 불편하다 성경 말씀중에는 이해할 수 없는 구절도 상당히 있다 그래서 말씀을 제대로 배우려면 히브리, 헬라 영어 한국말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신 분에게 배워야 되는데 …
@user-xg8wt6bv8o
@user-xg8wt6bv8o Жыл бұрын
짧게 얘기하고 끝이네요? ㅎㅎㅎ ;;;
@user-zx9kq6cg9p
@user-zx9kq6cg9p 5 ай бұрын
예절과 자유의지가 전혀 성경적인 것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예정론은 비 성경적입니다.
@user-vu7li3yw7b
@user-vu7li3yw7b Жыл бұрын
ㅋ 예정론자들은 자신이 멸망으로 예정 되었을수 있다고 절대로 생각안함 😊
@izumitachibana6266
@izumitachibana6266 Жыл бұрын
웃기지 마셈 누구도 그 예정을 하나님 밖에 모르기 때문에 내가 그 지나침과 간과의 대상 아닐까 두려움에 자꾸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됨. '내가 구원받았으니까 난 죄를 져도 천국가'라고 생각하는 건 구원파임. 예정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임. 댁이 말하는 예정론자들은 예정론을 아는 사람이 아님.
@user-vu7li3yw7b
@user-vu7li3yw7b Жыл бұрын
@@izumitachibana6266 ㅋㅋ 간과의 대상일까봐 하나님께 나아가봐야 멸망으로 예정되었다면 끝…ㅋㅋ 칼빈의 이중 예정은 칼빈의 생각일뿐 ㅋㅋㅋ
@izumitachibana6266
@izumitachibana6266 Жыл бұрын
@@user-vu7li3yw7b 님 무신론자이죠. 하는 말 보니 동영상은 당연히 안 봤겠고... 성경 좀 보시구요.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세요. 예정론인데 왜 예수믿으라고 하냐고요!? 예정은 하나님 영역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연구한들 알 수 없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user-vu7li3yw7b
@user-vu7li3yw7b Жыл бұрын
@@izumitachibana6266 칼빈주의 설명만 듣지 말고 칼빈 기독교 강요. 후크마의 칼빈주의 해석. 알미니안주의 웨슬리 신학 모두 읽어 봤어요…ㅋㅋㅋㅋ 님도 모두 읽어 보시길….
@izumitachibana6266
@izumitachibana6266 Жыл бұрын
@@user-vu7li3yw7b 글을 읽지만 말고 이해를 하세요.
@user-ne5pk2em3t
@user-ne5pk2em3t Жыл бұрын
들으면 들을수록 장재호 교수의 말이 맞다고 느껴지는데?????????? 예정론을 받아드리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건가? ㅋㅋ 성경 에베소서만 제대로 읽어도 이중예정론은 틀린 주장이란걸 알수 있는데 뭔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 안한다고 하는거지?????
@user-xs2lq3hl1l
@user-xs2lq3hl1l Жыл бұрын
둘다 지지안한다 이게 내 결론 ㅋ
@user-ei8rs9qs1j
@user-ei8rs9qs1j Жыл бұрын
하나님을 악마로 설명하면서 선하다고 말하는 예정론자들 다 지옥에서 불타는 영혼들임. 모든 일을 하나님이 예정하셧다면 인간이 책임질 일이 없는데 예정되어 있는 악이 왜 인간의 책임이냐? 인간 스스로 악을 행해야 인간의 책임이지.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처음부터 악을 만들고 덮어씌운다는 거냐? 너희들 눈에는 그것이 선으로 보이냐? 처음부터 거짓말을 한 것은 마귀라고 말씀하신건 하나님이셨는데 예정이 맞다면 처음부터 거짓말한 것은 하나님이고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마귀라고 고백하셨다는 이야기가 된다. 예정론을 만들고 추종하는 악마의 종들아 빨리 정신차리고 돌아오너라 하나님의 선하신 품으로. 계속 천국으로 인도되어야 할 불쌍한 영혼들을 다른 복음으로 몰아넣지 말고.신바리새인들아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믿으면서 당시의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한 바리새인과 같은 행태에서 빨리 벗어나라. 지금도 가짜 하나님을 진짜라고 믿도록 가르치는 교회로 가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예수님이 목숨까지 바쳐서 구하려고 노력하신 불쌍한 영혼들을 하나님의 품에서 빼았아 가는 도적질 빨리 멈춰라. 지옥 가고 싶으면 혼자 가라.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Жыл бұрын
과격함을 제외한다면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댓글입니다.
@user-it1tg7nc6n
@user-it1tg7nc6n Жыл бұрын
인기투표 거짓교사가 승리하네 어휴
@user-ne5pk2em3t
@user-ne5pk2em3t Жыл бұрын
그러니까요. 이중예정론 말도 안되는건데
@user-nh9mr4wx1o
@user-nh9mr4wx1o Жыл бұрын
박재은 교수님의 말씀에 저는 더 동의가 되네요. 하나님은 분명히 천국으로 인도할 사람 또는 지옥으로 보낼사람을 구분하여 창조를 했다고 믿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으로 신앙에 접근할거면 다른 종교 알아보시는게 옳다고 생각되네요. 저때문에 끔찍한 전장으로 내몰렸던 마린 따위는 저는 기억 못합니다. 분명 50 미네랄을 주고 내가 창조 해낸 피조물인데 저는 마린들이 어떤 고통을 받는 지 1도 관심 없었어요. 이게 신과 피조물의 관계 입니다. 토기장이가 깨질 그릇을 만들던 팔려고 만들던 토기장이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관계 없는 자들은 짐승으로 보십니다. 분명히 지옥에 갈사람 천국에 갈사람 을 창조하셨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옥을 가기위해 태어난사람 천국을 가기 위해 태어난사람 이라고 과감히 이야기 할수있습니다. 모든것이 예정 되어있습니다. 인간이 계획할 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사는 것은 하나님이시죠. 그럼 내가 죄를 짓는것은 하나님이 그길로 인도 하시는걸까요? 네 맞습니다. 내스스로 할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은 태어날때부터 사탄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납니다. 마귀의 자식은 죄를 당연히 똥으로 싸겠죠? 하나님의 계획 하심 맞습니다. 그러면 심판은 하나님이 받아야 할까요?? 어제 저글링한테 끔살당한 마린의 아우성이 제귀를 간지럽히네요. 그럼 하나님은 선하지 않다구요?? 그걸 피조물이 정할수 있을까요?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Жыл бұрын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명하셨고, 열매로 그 믿음을 알 수 있다 하셨죠. 이를 토대로 님께서 지닌 이웃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니 아마 천국으로 예정된 이보다는 님께서 얘기하신 하나님이 짐승으로 보는 존재에 가까울 확률이 높아보이는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본인이 소모되기 위해 전장에 몰린 마린일지라도 여전히 공의로운 하나님이라고 과감히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user-si2qx8vo2h
@user-si2qx8vo2h 11 ай бұрын
오른쪽 분은 신학함의 기본인 계시의존사색을 모르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인정해야 예정론이 받아들여지면서 믿어집니다. 왼쪽분이 옳아요. 오른쪽분! 신이 신이기 위해서 필요조건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고 있어요.
@jqgj6692
@jqgj6692 Жыл бұрын
우리 인간상식으로 생각해봐도 예정론은 충분히 말아안됨.. 예정론 주장하는사람들은 도대체 성경읽으면서 하나님을 인격으로 만난적이 있는지 의문임 이미 지옥갈놈 천국갈놈 나한테 오는놈 나한테 떠나는놈 미리 예정하셨으면 , 하나님이 감정이 어떻게 생기고 우리 인간들로인해서 어떻게 기뻐하시다가 질투하시다가 사랑도하시겟음? 인간들의 행하는바를보고 어떻게 그 순간마다 감정을 느낄수가 있을수가 있음??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 = 에서가 할짓을 미리알고 미워했을까? ,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만들어놓은 에서의 운명대로 에서가 행하는건대 굳이 미워하고 말고 할이유가 있음? 섭섭하거나 서운해할이유가 있음? , 예정론을 믿는다면 생기는 모순들 = "저놈들은 행실이 왜저리 악하지? 왜이렇게 하나님 안믿으려고 용을쓰지? , 아 지옥가기로 예정된놈이라 그런가~? 그래서 지옥갈짓만 골라하는건가~" " 믿든지 말든지 천국가고 지옥가는거 랜덤이니까 그냥 내 꼴리는대로 살면되네~ 성경공부 왜함? 하나님 알아서 모함? " " 죽일놈 살릴놈 미리정해놧는대 내가굳이 전도를 왜함? " " 내 친구 부모형제들은 전도해도 계속 안믿으려고하는대 아~ 구원못받기로 예정된자들이라 그런가? 아이고 ㅠㅠ"
@limdawon24
@limdawon24 Жыл бұрын
누구랑이야기함?
@resurgamm
@resurgamm Жыл бұрын
모순들의 예시가 굉장히 빈약하네요.. 제대로 예정론 믿는사람 아무도 그렇게 안해요.. 목숨걸고 선교를 이끌어온 인물들의 상당수가 예정론 믿는 개혁주의자들이었습니다.
@user-xg5gh2yu1r
@user-xg5gh2yu1r 11 ай бұрын
제가 비기독교적 입장에서 예정론에 대해 정리해 드리께요 불교는 생멸이고 불생불멸이라 합니다 즉 변하는 것과 영원한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근데 기독교는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해요 변하는 것이 영원할 줄 알아요 태어난 것이 영생하는 줄 알죠 그래서 태어나기도 전에 천국행과 지옥행이 정해져 있다고? 그럼 자유의지는 뭐야? 하면서 논쟁하지요 정해져 있는 건 변하는 것과 영원한 것이고 자유의지가 적용되는 것은 어디에 관심을 둘 것이냐 입니다 보화를 하늘에 쌓아라 영원한 것에 관심을 가져라 변하는 거에 그만 집착하고
@DamascusLiveTV
@DamascusLiveTV 11 ай бұрын
말씀하시는게 매우 임용진님 같네요. 다시 안오신다더니 오랜만에 오셔서 여전한 급발진 (마지막 부분)을 보여주시는군요. 혹시 얼마전 오픈챗방에서의 만남 때문인가요?
@user-xg5gh2yu1r
@user-xg5gh2yu1r 11 ай бұрын
아니요 임용진씨는 제가 모르는 사람입니다
@user-zb5yl2po1m
@user-zb5yl2po1m Жыл бұрын
10년 전 예정론 듣고 예수님에 대한 정이 뚝 떨어짐. 그래서 한 1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외줄타기 하는 중
@chenchen44
@chenchen44 Жыл бұрын
그럼 웨슬리계열 교회 가셔서 신앙생활 하시면 될 듯 하네요
@user-zb5yl2po1m
@user-zb5yl2po1m Жыл бұрын
@@chenchen44 그래서 교회 교리 신경 안 쓰기로 했습니다. 지금 다니느 교회는 교리를 강조하는 것 같지도 않아서 만족하면서 다니는 중입니다.
@user-zb5yl2po1m
@user-zb5yl2po1m Жыл бұрын
@@frrddeed5 그쪽은 믿음의 방향이 교리인가요?? 예수님과 교리는 같은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시길....
@user-zb5yl2po1m
@user-zb5yl2po1m Жыл бұрын
@@frrddeed5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가 교리라구요?? 교파마다 설명하는게 다르다고 말씀하시는건가요?? 교리는 성경의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 사용하는 도구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님의 논리대로라면 어느 교파가 사용하는 교리만이 진리인가요??
@user-zb5yl2po1m
@user-zb5yl2po1m Жыл бұрын
@@frrddeed5 그러니깐 교회에서 가르치는건 각 교파가 정한 교리라구요. 근데 님은 교리가 진리인 것처럼 말씀하시잖아요. 윗 댓글에 교리랑 예수님이 같은거라면서요. 비유하자면 성경은 원석이고 어떻게 가공할까 궁리하려 모이는게 교단과 교리입니다. 정확히 아셨으면 합니다. 교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교리에 대해 평가하는건 제 마음인데 왜 거칠게 말하시는거죠?? 지금 댓글 보니깐 걍 온화하게 쓰실 수 있으신것 같은데요
@unionasone
@unionasone Жыл бұрын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말은 예정론과 관련이 있지 않나? 결정론?
@jongmoonlee1046
@jongmoonlee1046 Жыл бұрын
고전역학에서는 내가 공을차면 그 공이 있던 위치와 힘을 받아 얻은 에너지, 그 에너지가 작용하는 방식에 의해서 매 시간마다 공의 위치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는 모든 입자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생각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위 내용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이중슬릿실험에 대해서 과학자들이 내린 결론인 코펜하겐 해석을 아인슈타인이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했던말이에요. '뭐? 모든것이 확률적으로 존재한다고? 그런 헛소리를 하다니!'라는 느낌으로 비판하고자 주사위=확률에 빗대어 말한거였어요. 양자역학으로인해 라플라스의 악마는 존재할 수 없다는게 밝혀지고 전통적인 결정론은 과학계에서 마이너해지게됩니다. 그러나 인과율이 부정되지 않는한 결정론이 무너지긴 어렵고 '확률론적 결정론'으로 여전히 건재합니다. (철학의 한 개념으로써의 결정론은 사람을 염세적이게 만들기 십상이라 발달하기 어려울거 같아보이는데, 과학을 만나 여러사람의 지지를 받는걸보면 기묘하긴합니다. 물론 옛날에는 종교-철학-수학-과학 등등이 딱히 분리되어있지 않았지요.)
@사랑으로돌아가는wheel
@사랑으로돌아가는wheel Ай бұрын
양자역학은 세상은 확률로 존재하고 다른 누군가가 확률로 존재하던 물질을 인식하는 순간 확률이 사라진다여서 아인슈타인은 세상은 확률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서 그런말을 한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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